나는 누군가에게 아쉬운 사람일까?
2025. 03.16
그는 참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아쉬운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대화를 할 때면 서로에게
"00 씨 왜 자꾸 제 생각을 읽어요? "
라는 말을 거의 매일 할 만큼 서로 똑 닮은 생각을 할 때가 많았으니까.
어떤 주제의 대화를 나눠도 나와 같은 가치관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니 어찌나 매력적인지.
그는 능글맞으면서도 서툴고, 섬세하면서도 투박한, 말로는 다 설명하기 힘든 묘한 매력으로 무장한 사람이었고
이따금씩 그가 던지는 터무니없는 화두는 내게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다.
이를테면 똥맛 카레와 카레맛 똥에 대한 논리적이고 심오한 토론이라던가...
그는 그렇게 무채색에 가깝던 내 일상을 조금씩 비집고 들어와 한 칸 두 칸 색을 칠하기 시작했고, 모났던 내 마음을 점점 동그래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를 내 일상에서 지워야 했던 순간이
나는 그 여느 때의 작별보다 특별히 더 힘들었다.
그리고 민망하게도 힘들다고 그에게 미련떨기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물론 시간의 총량과 별개로 좋은 사람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내가 그에게 술을 먹고 연락하거나 새벽 감성에 자니? 를 시전 하기엔 우린 참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한 번에 8시간이 넘는 통화를 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렇게 통화를 하고도 매일매일 할 얘기가 끊이지 않는 신기한 존재였다.
나는 통화와 카톡은 약속을 잡을 때만 한다던 그를 어느새 하루 종일 카톡 하고 전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그는 나를 부정과 우울의 늪에서 꺼내어 다시 잘 살아보고 싶어 지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별거 아니고 애매하면서도 야속하리만치 애틋한 우연을 떠나보내는 시간을 나는 대체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골백번을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포도밭의 여우가 되는 것.
어차피 백수라서 연애 부담스러웠잖아?
아니지 연애 생각만 해도 힘들었잖아?
사람에 질렸었잖아.
내가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아직 너무 불안정하다는 생각도 했잖아.
술 좋아하는 사람은 안 만나기로 마음먹었잖아?
또, 마지막 모습을 보면 회피성향도 갖고 있었던 것 같지? 그건 정말 피곤한 일이지.
혹시 어쩌면 그가 정말 그의 말처럼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몰라.
등등의 다소 찌질한 합리화.
이 방법이 아니고서야 나는 그의 생각을 좀처럼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즐겁지 않은 순간이 없던 그 찰나의 시간들이 흰 티에 묻은 원색의 얼룩처럼 어지간해서는 흐려지지 않을 만큼 선명한 흔적으로 남아버렸으니까.
그는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할 때면 이따금씩 나도 모르게
"00 씨는 정말 신기해요. 누군가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짐과 동시에 영양가 있는 대화를 할 수 있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저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00 씨를 알게 된 게 너무 좋아요. "
라는 찬양에 가까운 말들을 하곤 했고
그러면 그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라며 공감하고는 자신은 나와 함께 하며 어떤 감정을 느꼈고 생각을 했었는지 말해주었다.
그래서 포도밭의 여우 권법을 시전 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가 애틋했고 고마웠다.
나를 위로하던 투박한 진심.
나를 시도 때도 없이 웃게 한 그만의 독특한 생각과 언어들.
남자다운 외모와 반전되는 아기자기한 귀여움.
그가 갖고 있던 그만의 순수함.
뜬금없이 던지는 기발한 토론 주제 등
그는 내게 파스텔톤의 봄 같은 몽글몽글한 기억이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서 싫다.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사랑을 논하며 청승을 떨게 만드는 점도 사랑의 싫은 부분 중 하나다.
하지만 그를 보며 나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했고
그에게 받은 따듯한 마음이 내 못난 감정들을 속절없이 녹여버렸다.
그는 내게 세상을 다시 둥글게 볼 수 있는 힘을 주었고, 그가 내게 준 위로는 내가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만약 내게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몇 번을 돌아가도 나는 그의 손을 잡기를 택할 것이다. 끝이 지금과 다를 게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싫어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이 경험과 감정을 글로써 남기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다.
기억과 추억, 감정은 기록하지 않으면 흐려지기 마련이고
그는 내게 충분히 기억하고 곱씹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끝으로
이미 끝난 관계에 몇 가지 바람을 가져보자면
언제고 좋으니 당신도 나를 충분히 그리워해 주기를.
나도 당신에게 조금은 아쉬운 사람이기를.
나와의 추억을 기꺼이 이뻐해 주기를 바란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보자면
우리가 각자 극복하고자 했던 것을 극복하게 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때 우리에게 한 번의 우연이 더 찾아오기를 바란다.
이건 우리의 만남을 인연보다는 우연이라 표현하고 싶다던 당신에 대한 회고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