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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May 14. 2020

타인의 삶

이제와 들으면 민망하고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과거 내 장래희망은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무언가가 되는 것이었다. 일어난 김에 출근하고 시간이 흘렀기에 퇴근하는 지금의 나처럼 과거의 나도 일관성있게 실행력은 제로였고, 그 덕에 원대한 장래희망을 발현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해 나이만 먹어 어느덧 스물다섯이 되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하고 후회 만을 남기기는 싫었기에 그제서야 나는 인생일대의 사건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사건 개요는 단순했다. 대학 생활을 겨우 1년 남겨두고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건가 하는 혼란에 빠졌고, 때마침 우연찮게 해외 빈곤 지역을 무대로 하는 단기봉사활동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이 길이 내 길이구나라는 찰나의 느낌으로 무기한 무계획의 현지 봉사를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국제개발 NGO의 현지 간사'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얻게 되었다.


실제 내가 맡게된 주 업무는 현지를 방문하는 한국봉사단의 봉사 프로그램을 인솔하고, 운영하는 일이었다. 빈곤 지역의 구호를 담당하는 단체의 성격상 주로 교회, 교사 단체 등이 봉사단의 주를 이뤘고, 방학이 되면 수십개의 팀이 왕래하기에 담당자이자 총 책임자인 나는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 곳을 방문하는 봉사단의 일정은 모두 빼다 박은 듯 비슷했다. 필리핀 니노이 아키노 공항에서의 픽업, 현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시내 쓰레기 매립지 위 주거지역 답사, 이후 현지에서 도움이 될만한 노동/교육 봉사, 마지막 날 밤 그럴듯한 레스토랑에서의 페어웰 식사.


수십 개의 팀을 인솔하면서 만난 수많은 봉사단은 항상 똑같은 장소에서 한 팀도 빠짐없이 울음을 쏟아내곤했다. 마닐라 도심 쓰레기장 위 주거지역, 카트몬이었다. 그 광경을 다시 떠올려보면 그럴만도 했다. 한국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만한 열악한 환경들이 가득 했기 때문이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를 지반 삼아 만들어진 판자집, 코를 찌르는 악취와 구석구석 쌓인 구정물, 그 사이를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 과거의 내가 그랬듯, 그 광경은 안타까움을 넘어 생경함을 느낄만큼 충격적이었다. 상상 이상의 빈곤을 맞딱드린 마음 여린 한국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기도 했다.


그렇게 울음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며칠 후 다시 그 곳에 가 봉사를 개시했다. 봉사팀들은 주로 어린이 교육, 장판 깔기, 건축 봉사 등의 활동을 진행하며 노동력과 건축 자금을 제공했다. 봉사팀에게는 그들이 제공하는 땀 한방울이 더 소중했고, 커뮤니티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가져온 벽돌 한장이 더 소중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렇게 일주의 봉사일정이 끝나고 나면 커뮤니티에는 그럴듯한 건축물 한 두개가 생겨났고, 봉사팀들은 DSLR 속에 그 곳 아이들과의 추억을 가득 남긴채 한국으로 향했다.


그렇게 진행되는 수십 번의 봉사활동을 바라보다, 내 머릿 속에 자그마한 균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곳 커뮤니티 속 사람들을 단순한 프로그램의 수혜대상이 아니라 한명 한명의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한국인 봉사팀은 어떤 존재일까.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 우리 집에 들어와 내가 불쌍하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다른 한편에서는 구석 구석 사진을 찍고 있다. 방문과 함께 가져오는 자그마한 선물들 덕분에 뭐 그리 티는 내지 않지만, 사실 그리 맘이 편치 않다. 뭐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내가 봉사하는 커뮤니티 속 사람들도 나와 전혀 동떨어진 '타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또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끔씩은 잊곤 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을 사람 대 사람이 아닌 하나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우를 범했다. 나는 이를 그들을 타자화시켰다고 표현하곤 했다. 그들은 나와 다른 궤를 가진 '타자'라고 인식하고, 내 머릿속 갖가지 이미지들을 그들에게 투영해 그들을 내 마음대로 완성시키는 실수이다. 타자화를 피하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해야하고, 갖가지 상황에서 그들이 어떠한 감정을 느낄지 고민해야하며, 그렇다고 지나치게 호혜적인 태도 또한 좋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며 1년여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나름대로 타자화의 우는 범하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그 덕에 1년여간의 빈곤가 생활에도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못 건졌다는 게 이제사 아쉽긴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여전히 누군가를 타자화 시키는 나를 발견한다. 장애인은 우리의 친구여야만하며, 경제적 취약층은 그럴듯한 외식이나 사치 없이 살아야 진짜 같다. 비극을 맞딱드린 유가족은 삶의 모든 즐거움을 잃어야한다. 하지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베스트셀러 이름처럼 사람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이고 오묘하다. 장애인에게는 친구가 필요없을 수 있으며, 경제적 취약층에게도 여느 서민들처럼 지름신이 강림할 수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배고픔을 느끼는 게 한낱 사람이다. 한낱 사람으로써 나는 스스로를 용인할 수 있는만큼 타인를 용인하고 있는지 매번 반추해본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스스로를 발견하면 반성하고자 노력한다. 그 길이 쉽지는 않지만 더 고민한 만큼 더 성숙해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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