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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Oct 12. 2020

수 헤는 밤

숫자, 숫자,


회사에 다니다 보면 갖가지 숫자들에 치이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달성률, 목표, KPI, 만족도 등등 그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그 많은 숫자는 N년차 직장인인 내 눈앞에는 그저 물고기 눈앞의 물처럼 아무것도 아닌 의미들이다. 가끔은 그 의미 없음이 배가되어 퇴사 욕구를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인정하는 단 하나의 숫자, 월급 때문에 꾸역꾸역 매달을 되풀이하고 있다.


결국 숫자라는 건 현상의 문자화에 불과한데, 당최 회사라는 조직은 본질은 무시한 채 수에만 목숨을 걸곤 한다. 사업의 본질과 관계없이 그달, 그해의 지표에만 골몰하고, 그 결과에 따라 누군가는 회사를 떠나고, 누군가는 승진한다. 이제는 이러한 아이러니함에 익숙해질 때가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순진한 건지 이러한 아이러니함을 볼 때마다 회사를 박차 나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물론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8월의 여느 날 밤, 야근 중이던 내게도 아이러니의 순간이 다가왔다.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출하. 좀 더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서플라이체인매니지먼트…. 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냥 거래처가 제품을 원하는 순간에 제품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문제는 회사의 매출이 거래처가 제품을 받는 순간을 기준으로 기록된다는 점이었다. 그날 밤 나는 내일 오전 출하 목록을 정리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출하된다면, 8월 매출 목표를 초과하겠구나'. 매출 목표 초과 달성이라면 괜스레 좋은 거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이곳에서의 초과달성은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이달의 초과 달성은 다음 달의 매출 감소와 직결되기에 이른바 당월-차월간의 매출 밀당 능력은 이 회사의 주요한 업무 역량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방향성은 명확해졌다. '출하를 막아야 한다'


이미 밤은 늦었고, 출하될 물건은 물류센터 어느 곳엔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막아야 한다. 방법을 골몰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권한으로는 확정된 출하를 돌릴 수는 없는데, 라고 생각하던 중 물류 담당으로 일하고 있는 동기가 생각난다. 에라 모르겠다. 전화부터 걸고 보자. 통화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역시 한국 사회는 인맥인 건가, 동기의 몇 마디에 해결책이 명료해진다. 동기 ID로 내가 로그인 해 강제조정을 하면 된단다. 그렇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월권이라는 것, 혹여나 누군가 내가 왜 그 ID로 조정을 했는지를 문제 삼기 시작하면 징계감이다. 그렇지만 거래처에 제품이 하루 이틀 늦게 배송된다고 문제 삼을 사람은 이 회사에 아무도 없다. 두 번째, 하나하나 일일이 조정해야 한다는 점. 몇 시간은 걸릴 일이기에 '형이 그걸 다 하게?'라는 의문문이 되돌아왔지만, 다른 옵션은 없다.


결국 나의 30대 소중한 시간을 한땀 한땀 수놓아 출하 일정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기계가 운전도 알아서 척척해주는 2020년에 이런 노가다 작업을 한다는 게 참 허탈하기도 했지만, 갖가지 노동요를 들어가며 작업에 정진했다. 수 시간이 지나 8월 딱지가 붙어있던 물건들에는 9월 딱지가 붙기 시작했고, 12시를 넘길 즈음 8월 목표를 적당히 맞추는 수준에서 8~9월간의 밀당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사무실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문득 고민했다. 내 하루를 잡아 삼킨 이 숫자 놀음들은 세상 무가치한 요식행위인 건지, 아니면 나의 팀원, 동료들의 가정을 지탱시켜주는 소중한 행위인 건지. 실제 회사의 운영과 아무 상관없이 8-9월의 기록만 바뀌었다는 점에서는 세상 무가치한 일이기도했고, 그 기록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고 살아갈 동료 곧 누군가의 부모 혹은 자녀에게는 의미있는 일이기도 했다. 결국 그 값어치를 도통 모르겠는 나는 그저 소중한 저녁을 이렇게 허비했다는 허탈감, 목표를 맞추는 데에 성공했다는 데에서 오는 뿌듯함, 그리고 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오후 2시경, 8월 목표는 다시 올라 갔다. 사유는 옆 파트의 실적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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