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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Aug 16. 2021

눈의 밀도

나는 드물게 일기를 쓴다. 곱씹어보면 일기라는건 문자 그대로 하루하루의 기록인데, 몇 년에 한번씩 띄엄띄엄 남기는 글을 일기라고 불러줄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일기를 쓴다. 그때 그때 하루의 느낌과 생각을 담아 글을 쓰고 이를 컴퓨터 속 하드디스크에, 그리고 익명의 블로그에 저장한다.


늦은 밤 잠 못 이룰때 스스로를 조심해야하는 시간이 있다. 새벽 2-3시경이 바로 그때인데, 어렸을 적 이런저런 고민과 외로움을 담아 썸녀에게 "자니..?" 라는 문자를 보내던 바로 그 즈음이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런 문자를 보낼만큼 찌질하지는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바로 그 시간을 보내다보면 온갖 잡념들이 몰려오고, 그러다보면 간만에 메모장을 켜 그 날의 일기를 남기곤했다. 짧게는 몇 달에 한번, 길게는 몇 년에 한번 쓰는 일기이다보니 자연스레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내뱉는 게 그 일기의 주된 내용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드물지만 차곡차곡 일기는 쌓여갔고, 어느샌가 나는 그 야심한 새벽에 새 일기를 쓰는 대신 예전 일기를 읽어보곤 한다.


일기를 읽다보면 과거의 나는 참 소소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일기 속엔 이제는 OO맘이 된 그때의 썸녀와 어설픈 데이트를 마친 뒤 설렘에 잠못이루던 나를 볼 수 있고, 난생 첫 여행, 베트남행을 앞두고 여행 한 달 전부터 론리플래닛을 한글자 한글자 정독해가며 읽었던 기특한 내 모습도 있다. 삶엔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니 그 당시에는 크나큰 스트레스를 주었던 사건들도 가득하다. 고작 3개월짜리 인턴자리에서 나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꼰대 선배에게 인정받으리라 이를 갈고 버텼던 일부터, 학창시절 나보다 더 잘 노는 것 같은 친구의 모습을 보며 열등감을 느꼈었던 흔적까지. 고작해야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인정이었고, 고작해야 다들 가보게 될 클럽 몇년 먼저 가보는 수준의 사건들이었는데 그땐 뭐가 그리도 심각했을까 하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사람은 성장해나가며 각자의 세상을 팽창시킨다. 물리적인 공간이든, 0의 개수가 늘어가는 경제력의 영역이든, '그거 나도 해 봤어' 하는 경험의 영역이든, 우리는 성장하며 더 넓은 세계에서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각자의 영역을 넓혀나간다. 내 나와바리가 넓어지고, 꿈만 꾸던 것들을 경험해가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여행을 통해 꿈만 꾸던 장소에 도착해 보내는 하루만큼 달콤한 게 있을까.


그럼에도 그 성장의 과정에서 아쉬운 단 한가지는 바로 나는 유한한 시간과 몸뚱아리를 가진 한낱 사람이라는 점이다. 내 경험과 영역이 넓어질 수록 그 영역 안에서의 밀도는 점점 낮아진다. 40자 안에 우겨넣어야했던 그 피쳐폰 시절 문자메시지 하나는 지금의 기나긴 카톡 대화보다도 진했고, 서투르고 가난했던 그때의 여행은 모든것이 수월한 지금의 여행보다 더 많은 기억들을 남겼다. 사람도 마찬가지, 길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도저히 꺼내지 못했을때의 씁슬함은 스스로를 참 밉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들 뻔한 선택을 하나보다, 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팽창을 멈추고 짐을 지어가는 일. 누군가와의 연애든, 결혼이든, 아이를 갖는 일이든, 결국 팽창된 세상속에는 내가 추억할 일이 없기에 그런 결정을 하나보다. 팽창을 멈추고, 성장을 멈추고, 더 깊게 바라보고 호흡할만한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일. 더 구속적이고 더 밀도높은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일. 결국 그게 스스로를 구속하는 답답한 일일지라도.


눈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눈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큼은 서로는 서로에게 전부인 밀도 100의 시간이니까. 나는 앞으로 살면서 그런 시간을 얼마나 더 가질 수 있을까. 그려려면 내게도 그런 구속이 필요할까. 매번 내 세상이 넓어지기만을 원했던 내게도 이런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걸 보니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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