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또렷해진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실 것 같데.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아프셨던 것도 아니셨고 분명 바로 그 전날까지 컴퓨터로 글을 쓰시던 외할아버지셨다. 당시 92세 셨다. 물론 연세가 있으셔서 기력이 예전같지는 않으셨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의 소식이었다. 외할머니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지 2년 째, 그날 따라 집에 혼자 계셨던 외할아버지는 하필이면 정신을 잃으셨고, 뒤늦게 들어온 친척동생에게 발견되어 급히 병원으로 옮겨지셨다.
그러고는 그렇게 늘 보고 싶어 하셨던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가시게 되셨다. 당시엔 코로나 시국이라 가족들 모두 유리창 너머로 멀리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 거리와 시간의 벽이 너무 야속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3개월만에 천국으로 가셨다.
성인이 되서 맞이하게 된, 가족의 죽음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누구도 외할머니보다 먼저 가실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확히 5개월 뒤, 따스한 봄날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그 때,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를 따라 천국으로 가셨다.
여기서 끝이면 좋았으련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6개월 뒤 우리 곁에 계셨던 친할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1년 이라는 시간동안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친할머니, 세분을 연이어 떠나보냈다. 연달아 치르는 이별 속에 찾아오시는 손님들도 우리 가족을 걱정했다.
어릴 때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죽음에 대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어른들은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끼리 저 구석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이제는 훌쩍 커버린 성인이 되어 만난 '죽음'의 두 글자를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에서, 또렷하게 마주쳤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병상에서 마지막 숨을 힘겹게 내쉬는 모습들과 그 과정 지켜보는 우리의 모습이, 난 아직도 기억에 선명이 남는다.
지난 목요일, 친구와 함께 연극 <킬미나우>를 보았다. 지체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펼치지는 이야기었다. 극이 진행되면서, 아버지는 본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제는 자식이었다. 어디에, 누구에게 맡기고 가야할지 많은 고민들과 고뇌의 과정들을 거치다 끝내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이별을 맞이한다.
보는 내내 마음이 먹먹해 지는 연극이었다.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남은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와, 죽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우는 자식의 모습이 그때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어서 너무 힘들었다.
극장을 나와 친구와 함께 말없이 걸으며,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내일도 당연히 올 거라고 믿으며 살아갈까?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하루가 올 거라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는데 말이다. 예전에는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다는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이별을 여러번 겪고 나니 그 말이 마음 깊은 곳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그리고 그 또렷함 속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것들도, 관계에서 오는 감정이나 오해들도 조금은 덜 중요해 지는 게 있다. 그동안 '중요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죽음이라는 커다란 질문 앞에서는 의외로 쉽게 작아진다.
그래서 오늘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쫓기듯 살아가기보다 내게 주어진 이 하루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해본다. 언젠가 마지막 그 순간에 돌아보면 참 괜찮은 하루하루를 보냈었다고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