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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Aug 08. 2020

오잉? ENFP? 나는 ESTJ라구!

생긴 대로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두 딸들이 초등  학년일 때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1박 2일 가족캠프에 참여한 적이 었다. 결혼 10년 차였고 아이들도 우리 부부도 다툼 없이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캠프 참가자들 모두가 캠프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MBTI 검사를 했고 공통점이 많았던  남편과 나는 내향적, 외향적만 다른 ISTJ와 ESTJ가 나왔다. 우리 두 사람은 역시나~하며 함께 웃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여 세월이 흐르도록 나는 ESTJ 답게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결정을 하며 성실하게 살았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웃는다고 무조건 행복하고 운다고 꼭 슬프지만은 않듯, 언성 높이고 싸우고 토라져서 말 안 하고 하는 '트러블'이 없다고 해서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두 번째 10년 사이 큰 일도 두어 번 겪었고 나는 생사의 갈림길 언저리에서 헤매기도 하면서 우아한 백조의 헤엄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처절하게 발질을 해야 했다.

제주 여행 중 만난 변시지 화백의 이 그림 앞에 아주 오랫동안 서 있었다. 저 그림 속에 내가 있는 착각이 들었었다.

 사실 결혼 후 10년 간은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느라, 또 그다음 10년은 IMF 여파로 맞이한 공무원 구조조정의 한가운데에 휩쓸려 매일매일 노심초사하고 억울하기도 하면서 반쯤 얼이 빠진 채 정신없이 살아야 했다. 행정가들과 자치단체 기초의회 의원들은 보건진료소를 지하여 별정직 공무원인 진료소장들을 감축 대상에 올려 정부의 감축 목표 비율을 맞추고 일반직 공무원들의 자리는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고 싶었고, 마을 유일의 관공서를 잃고 싶지 않은 성난 주민들은 매일매일 군수실로, 면장실로 찾아가 떼를 쓰는 슬픈 일을 반복하며 몇 년을 겪었다. 웃고 있지만 슬프고 슬픔 가운데 기쁜 나날들, 자세히 보면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 같은 삶인데 그게 또 이상하게 억지로 '처커 덕 뚝딱~' 굴러는 가고 있었다! 도무지 내겐 받아들이기도, 맞추기도 싫은 박자가 맞지 않는 하루하루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나를 집어삼켰고 나는 하루에 하루를 더하는 10년  동안 심신이 피폐해졌다. 그러나 멈추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멈추면 생명도 끝나는 일이라고 세상이 다들 말하고 있었다.


 그즈음 직무보수교육을 갔다. 해마다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50시간의 교육이어서 전국 오지에 흩어져 있는 2천여 명의 진료소장들이 여러 기수로 나뉘어 2박 3일 동안 한 곳에 모여 보건진료소장 직무교육과 간호사 보수교육을 함께 받는 것이다.(올해는 코로나 19의 여파로 온라인 교육을 받았는데,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 어쨌든 그 교육에서 또 MBTI 검사를 받았다. 10년 전에 검사를 해 보았으니 크게 흥미롭지 않았지만 같은 성향끼리 모이는 것이 재밌을 것 같아 기대하면서 검사에 임했다.


 오잉? 이게 뭔가? 결과는 ENFP? 다시 해봐도 ENFP다. 당황스러웠다. 이게 아닌데..... 예전 검사와는 거의 정 반대로 나온 결과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쨌든 수업은 계속되었고 결과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둠으로 앉아 대화를 시작하는데, 그렇게 죽이 척척 맞을 수가 없었다.

'맞아, 맞아! 나도, 나도!' 다들 비명에 가깝게, 마치 잃어버렸던 이산가족을 몇십 년 만에 만난 느낌처럼 말이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이렇게 극적으로 다르게 나올 수도 있을까? 강의 후 점심시간. 혼자 식사하고 계시는 MBTI 강사님을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식판을 들고 다가가 함께 식사해도 되나요? 하고서 맞은편에 앉아 질문을 했었다. '그런 일은 거의 없는 일'이라고 하셨고 장시간의 환경적 요인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의 성향을 바꾸어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도 거의 가능하지 않다고 하셨다.


 나는 그 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베로니카, 그동안 다른 사람으로 사느라고 네가 얼마나 힘들었겠니......'


 그랬다! 거의 가능하지 않은 걸 억지로 하면서 살아왔다. 힘도 좋았다. 서로 맞지 않아 어긋나기만 하는 삶의 톱니바퀴를 억지로 굴리는 동안 에너지는 고갈되고 나는 타고난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다. 자아상실..... 그것은 고통이었다.

저 가시를 보라. 무섭도록 단단하고 날카로운 저 가시가 사실은 줄기의 표피세포가 변해서 끝이 날카로운 구조로 변한 것이다.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 수단이다.

 돌이켜 어렵사리 기억해 낸 어린 시절의 나는 오 남매 중 유난히 엄마에게 야단을 많이 맞은 아이였다. 곱슬머리라 독하다, 꾀가 많다,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싫증을 잘 내고 까불고 호기심 때문에 항상 말썽을 저지르는 아이였던 나는, 오 남매를 기르며 먹고사는 일로 고단한 엄마를 항상 화나게 하는 존재였다. 엄마는 엄하셨다.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하셨지만 당근보다는 채찍이 쉬우셨던 분이었다. '자식의 훈육=매질'이 당연히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옛날 부모님들은 심지어 학교 담임 선생님께 보내는 가정 통신문에도 '때려 주세요'라고 적으시곤 했다. 나는 자라면서 매를 맞지 않기 위해 규칙을 따르고 신중하게 움직이고 성실함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만 쉽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다. 


 사춘기 시절 백일장에 입상하면서 그림 그리기를 접고 얼결에 시작한 글쓰기가 재능이 되었고 각종 백일장을 휩쓸면서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칭찬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글을 쓰고 살 줄 알았던 나는 엄마가 정해주신 진로를 선택해야 했고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업무수행에는 ENFP성향보다는 ESTJ 성향이 요구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나와 여러모로 닮은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그 공통점들이 발견될 때마다 기뻤다. 나를 사랑해 주는 그 남자의 맘에 들기 위해 더 노력했고 그 남자의 맘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일도, 가정도, 삶 전체를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꾸려 나가려 집중했다. 그렇게 삶의 톱니바퀴는 오랜 세월을 굴리고 굴려 닳고 깎여 비슷하게 아귀가 맞아 들어간 것처럼 보였고 나의 삶은 누구라도 부러워하는 완벽한 삶으로 구조화되어갔다. 그렇게 ENFP인 나는 긴 세월을 ESTJ가 되어 살았었던 것이. 그 와중에 정면충돌 교통사고도 있었고 후유증에 시달리던 나는 어느 날 쓰러졌고 대학병원을 거쳐 강남의 한방 명의에게 치료를 받으러 다니게 되었다.


 "나는 간장 종지만 한 사람인데, 냉면 대접 같은 당신이 나한테 맞춰 사느라 병을 얻었으니 내가 당신 병 꼭 고쳐 줄 거야"

이틀에 한 번씩 4개월 간 강화에서 강남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니 왕복 4시간의 차 안에서 남편은 내게 그렇게 자신을 탓했지만 그게 어디 꼭 남편의 탓이기만 하랴. 나답지 않게 살았던 내 탓도 있는 거지..... 

하필 바위 틈에서 싹터 자란 소나무에게도 희망을 품어 보는 나다.

 병을 고치고 나니 용기도 생기고 희망도 품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답게 살기 위해 나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를 찾는 것과 나답게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베로니카의 삶을 추구하려니 남편 가족들과의 관계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전의 나 아닌 나였을 때는 문제가 없었던 관계가, 내가 나답게 살려고 마음먹으니 뒤늦게 충돌이 생겼다. 무시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이 속한 가정뿐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가정도 중요한 삶의 한 부분이니 소홀하기 어려웠으리라. 전통적인 효 사상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남편과 그들과 적정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나 사이에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어려운 이해관계가 발생했겠다. 빌려준 돈 천만 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천만 원에 누나를 사 올 수 있겠냐'라고 기꺼이 누나를 선택하면서도 한편으로 어머니의 '지켜야 할 경우와 해야 할 도리'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여성비하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어긋난 유교전통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쨌든 나답게 살겠다는 아내와 아머니, 형제 사이에서 몹시 통받은 모양이었다. 체중까지 줄 정도로 힘겨워하던 남편은 종합 검진 상 신체적인 이상은 없었으니 결국 마음의 짐이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이전의 '억지 춘향'으로 되돌아가긴 싫었다. 그걸 알기에 남편은 홀로 고통받아야 했고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선 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도 있다는 문제로 또 다른 고민을 해야 했다.


 결국 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공황장애를 겪었다. 겪어 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알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고 나서 나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죽음 아니면 이혼뿐일까....'  


 두어 달의 시간이 흘렀고 어머니의 생신이 되었는데 남편은 묻지도 않고 '혼자 다녀올 테니 신경 쓰지 말라'라고 했다. 미안했지만 '이제부터 당신 말대로 각자의 어머니에게 각자 알아서 효도하기로 하자'면서 '이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어머니의 생신에 동행하지 않았다. 평일이었다. 갑자기 마음과 태도가 바뀐 남편에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냥 고마웠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던 어느 날, 마음 맞는 이들과의 따뜻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남편은 담담하게 자신이 심리학 교수님께 상담받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체중이 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남편 역시 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평소 친분이 있던 교수님께 정식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상담을 받았다고 했다.


 '집 사람이 이혼 얘기까지 하고 공황장애를 겪는데 미치겠더라고요. 나도 너무 힘들고 죽겠다 싶어서 상담이라도 받아볼까 하고 그 교수님을 찾아갔지. 내 힘든 얘기 주욱 했더니 부모님에 대해 물으시더라고. 그러더니 형제자매에 대해 물으시더라고. 다 얘기했지. 그랬더니 집 사람에 대해 묻더라고. 장인 장모, 처형, 처남 지 다 물어보시더니 딱, 하시는 말씀이, '아내분이 많이 힘드셨겠네요. 아내분에게 잘해 주세요'하시더라고. 아니, 내가 힘들어서 상담을 받는데 다짜고짜 아내에게 잘하라니 황당하더군. 그래서 내가 '나름 잘한다고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더 잘해 줘야 하나요?' 했더니, '아내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하게 해 주세요.' 하더라고. 충격받았지......'

나는 꿈에도 몰랐던 남편의 상담받은 이야기는 내게도 충격이었다.

'그 정도로 힘들었구나..... 그런데도 그 교수님이 하라는 대로 내게 해 주었구나......'

 

 그렇게 나는 또 회복되었다. 따뜻하고 열정적인 나는 풍부한 상상력과 융통성을 발휘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가장 나다운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오지랖을 펼치고 남의 일에 참견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고민한다. 그저 그들이 행복감을 느끼고 기뻐하며 마음에 가득한 안심을 느끼며 잠들기를 바란다. '덕분'이라는 말을 듣고 나도 감동하며 보람을 느끼고 에너지를 얻는다. 나는 그렇다. 시골 어르신들이 '우리 소장님 덕분에 우덜이 이렇게 오래 산다'라고 귀여운 투정을 부릴 때 나다움을 느낀다. 딸아이들이 '엄마는 여자로서도 멋있다'라고 말해주면 또 그렇게 가슴 뿌듯하다. 주변 이웃들이 '도대체 못하는 게 뭐냐'라고 하면 '아들을 못 낳았어요~"하며 너스레 떨지만 그 칭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타고난 천성대로 사는 것이 가장 나답다. 나답게 사는 것은 나  혼자 멋대로 사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세상에 살면서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도 필요하다. 마음껏 가지를 펼쳐 살면 될 것 같지만 내가 뻗은 가지가 그늘을 드리워 햇빛을 받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이가 있다면 그 탓은 내게로 돌아올 것이다. 대신 나와 타인이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 나다움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관계에서 나다움은 더욱 빛나지 않을까.


 나 답게 사는 이야기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해 보긴 처음이다.

미술 전공한 딸이 그려준 내 캐릭터다. 여간 맘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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