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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Aug 04. 2020

너 저 라면 가져가서 끓여 먹을래?

오늘은 아버지 기일입니다.

 그날은 광복절이었고 나는 간호대학 졸업반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국가고시 공부 좀 하겠다고 시골집에도 가지 않고 한 달을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광복절은 국경일이라 공부도 쉬는 날인지 도서관에 몇 명 안 되는 사람 중에 그나마 아는 애가 나뿐인 친구가 급히 도움을 청하여 나 역시 소개팅에 나가 있었다. 약속한 친구가 펑크를 냈단다. 아는 오빠를 다니는 교회에 전도하면서 소개팅을 약속했었단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라는 친구의 촉구나는 그냥 점심이나 얻어먹을 얄팍한 생각으로 나갔는데, 소개팅에 나온 사람이 TMT(Too Much Talker)였다. 살다 살다 그렇게 말 많은 남자는 이후로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새로 나가게 된 교회 청년회에서 다녀온 하계 농촌봉사활동 이야기를, 자신의 종교관, 자라온 배경, 농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 그 교회에 나가자마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타고난 자질, 농활에서의 활약과 심지어 다친 사람을 구하여 부상자의 보호자로 병원에 가서 벌어진 이야기까지 풀스토리를 날짜순으로 정리하여 2시간째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돈가스를 먹는 내내 다시 역류하는 음식을 가까스로 삼키고 있는데, 카페 TV에서  역대급 집중호우와 댐 수문 방류로 갑자기 불어난 물에 남한강? 한탄강? 에서 물놀이하던 많은 이들이 익사했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어머! 우리 언니도 지금 저기로 놀러 가 는데!! 죄송해요,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담에 연락 주세요!!"

나는 더 있다간 그 남자에게 '적당히 하고 그만 좀 닥치라'라고 하게 될까 봐 그런 말도 안 되는 호들갑을 떨며 벌떡 일어나 그 길로 한 달 만에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갔다.


 사실 우리 언니는 그때 강원도 정선의 고한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거긴 학교가 해발 2,000미터에 있었다. 혹 추락사는 있어도 익사는 절대 없을 곳에 있는 우리 언니가 갑자기 소환되었던 그날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오고 인명피해가 났었다. 주말에 이어 오늘까지 연일 홍수 피해에 관한 걱정되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는 이상하게도 장마가 길다. 걱정스럽다. 오늘 아침엔 북한강 수계 댐 방류 소식도 나왔다. 그래서 문득 잊고 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나 보다. 


 지난해까지 이맘때 8월 초엔 숨 막히는 뜨거운 햇빛과 폭염의 피해가 속출하고 나는 방문 대상자들에 대해 매일 '폭염 관리 일일 보고'를 내는 때인데 말이다. 노인들은 감각이 둔해 아침부터 밭에 나가 김을 매다 보면 한낮에 기온이 올라가는 줄 모르고 쉬지 않고 일을 하다가 열사병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돌아가시는 경우가 있어서, 기온이 30도가 넘어가는 날에는 전화로 안부를 묻고, 전화 통화가 안되면 방문을 통해 관리를 해야 하는 것도 우리 업무이다. 올핸 아직 일일보고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걱정거리가 될 줄 몰랐다!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이다. 아침 뉴스가 전한 홍수 희생자들의 딱한 소식에 멀쩡한 언니를 위험한 물놀이 보내 놓은 소개팅 자리를 박차고 나와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왔던 기억의 소환은, 아마도 오늘이 아버지 기일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날 시외버스를 타고 돌아온 시간은 정오가 지난 무더운 한 낮이었고 집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서 뭘 하느라 집을 비웠는지 기억에 없다.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 았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국경일이었으니 출근은 하지 않으셨고 라면 먹은 그릇을 치우는 내게, '너 아빠랑 낚시 갈래?' 하셨다. 약간 당황스러웠던 생각이 난다. 단 한 번도 아버지랑 낚시를 가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낚시를 워낙 좋아하셨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낚시는 별로다. 달리 할 일도 없었으니 '좋다'라고 했다. 사실 낚시는 별로였지만 아버지가 내게 낚시를 가자고 하신 뜻을 생각했던 것 같다. '낚시가 가고 싶고 누군가와 함께 가고 싶은데 딱히 같이 갈 사람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다른 형제자매들에 비해 아버지와는 좀 각별한 사이긴 했다. 아버진 서양화를 그리시는 취미가 있으셔서 공모전에 입상도 여러 번 하셨다. 기타도 좀 치시고, 사교댄스도 좀 추시고, 직장 연말 행사에 사회도 보실 정도로 유머와 위트도 남다르셨다. 그런데 엄마로 말하자면 아버지가 용돈을 모아 마련한 고가의 화집과 내가 용돈을 아껴 사모으던 LP판을 의논도 없이 고물장수에게 빨랫비누를 받고 넘기는 정도로 낭만은 1도 없으신 분이었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아내보다는, 그림도 잘 그리고 감수성 풍부한 나를  당신 닮았다고 귀여워하셨다. 내게 색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거나 원근법 따위의 그림 기법도 설명해 주시면서 '너는 내 수제자'라고 기뻐하시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다 큰 아가씨인 내게 난생처음 낚시를 같이 가자고 하는 것에는 거절할 수 없는 묘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걸 그때의 나는, 아버지와 나만 통하는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게 낚시 가방을 메게 하시고 '88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 옥개 방죽으로 갔다. 하필 최근 월북한 청년이 이용한 경로로 뉴스에 나와 유명해진 '연미정' 수로가 바로 그 옥개 방죽 근처이다. 지금은 낚시가 불법이지만 그때 그 시절엔 오염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고 들어가 멱을 감을 정도로 청정했었다. 어린 시절 겨울 방학이면 옥개 방죽 보 안쪽에 물을 가득 실어 놓은 농 수지에서 지칠 때까지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이 가득한 그곳. 낚싯대를 펴는 아버지는 정말로 행복해 보이셨다. 내게도 지렁이 끼우는 법과 찌 보는 법을 가르쳐 주시며 아버지와 난 낚시 의자에 나란히 앉아 길어지는 오후 한낮의 햇빛을 등에 받으며 아주 한참 동안 말없이 수로를 유유히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였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모르는 아버지의 과거, 월사금을 못 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못 받은 일,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홀어머니는 기술이나 배우라고 친척의 세탁소에 취직시키신 일 같은 아버지의 어두운 과거를 그 붕어 낚시하면서 들었다.....


 아버지와 나는 붕어를 각각 몇 마리씩 잡았다. 폭우로 수량이 많아져서 고기가 잘 잡혔는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걸 집에 가져가서 마당 수돗가에서 아버지가 닦달을 하셨고 엄마는 '모처럼 집에 온 다 큰 딸을 데리고 낚시를 간 것과 귀찮게 붕어를 잡아 온 것'에 대해 투덜대시면서 감자를 깔고 붕어조림을 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그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 입에도 대지 않았다. 다만 지금도 사진처럼 선명한 그날의 '베스트' 기억은, 손바닥에 올려놓은 은빛 붕어였다. 내 손바닥에 누워 그저 거만하게  번씩만 파닥거리던, 햇빛에 빛나던 붕어의 고급스러운 은빛 말이다.


 아버진 돌아가시던 해 마지막 8개월을 노인 요양원에서 지내 셨다. 치매를 앓으신 지는 4년이 되셨었고 때문에 기저 질환이 관리가 안 되어 어느 날 의식을 잃으신 지 3일 만에 깨어나셨을 때 대소변 감각을 모르게 되셨다. 이미 4년을 수발하시던 엄마는 지치셨고 우리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그 요양원은 당시 내가 근무하던 직장에서 10분 거리에 있어서 나는 저녁 미사가 있는 날 외엔 거의 매일 퇴근길에 들러 한 시간 정도 함께 앉아 아버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오곤 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타고난 성정이 불같이 급하고 예민하셨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단 0.5초도 못 참으셨다. 서울 큰 댁에 제사를 보러 가셔도 단 하룻밤을 당신 형님과 같이 못 자고 막차라도 타고 부득이 내려오시던 아버지셨다. 엄마도 자식들도 모두 아버지를 불편해했다. 나이 드시면서 더 괴팍해진 아버지의 그 별난 성격을 평생 다 받아 주시느라 심신이 지친 엄마는 아버지의 요양원 면회를 단 한 번도 가지 않으셨다. 


 요양원에 입소한 아버지의 룸메이트는 항상 화가 나 있는 말기암 환자였는데 요양원에 남은 자리는 그 자리 하나뿐이었다. 그 룸메이트는 꽤 오래 그 방에 계셨는데 누구도 그분과 잘 지내지 못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우리 아버진 그분과 다투지 않으셨다. 자존심 강하고 까칠 예민하신 분이라 남과 다투니 평생을 절친 하나 없이 사신 분이셨는데 혼수상태 사흘 이후 다른 사람이 되시기라도 했는지, 어쨌든 아버지와 룸메이트는 다투지도 친하지도 않은 채 잘 지내시니 신기했다. 예컨대, 간식으로 나눠준 룸메이트의 떡을 우리 아버지가 아무 거리낌 없이 드시더란다. 룸메이트가 '왜 남의 떡을 허락 없이 먹느냐!'라고 불같이 화를 내면, '그래요? 몰랐어요, 미안해요'하며 상대방의 화를 반사하는 것이 아니고 흡수해 버리시니 싸움이 되질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순한 양이 된 아버지는 내가 갈 때마다 '고맙다'라고 하셨고, '나 때문에 네가 귀찮다'며 '미안하니 매일 오지 말라'고도하셨다. '뭐 줄게 없다'면서 룸메이트의 옷장 위에 얹어 놓은 '진라면'박스를 앙상한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며 갈 때마다 '너 저 라면 가져가서 끓여 먹을래? 나는 여기서 밥을 주니 저거 저렇게 두면 뭐하냐'라고 하셨다.  라면 상자는 룸메이트의 짐을 넣어 온 빈 상자였지만 평생 누구에게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모르는 분이,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으신 분, 좋은 것, 먹을 것이 있으면 우선 내 몫을 먼저 챙기는 것이 당연한 분이 내게 라면을 상자째 가져가라시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상대의 나쁜 감정을 반사하지 않고 흡수해 버리시고, 탈색이 되고 때가 벗겨지고 맑아지고 순수해져서 어린아이처럼 되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그 날이 점점 가까워 온다는 것을 깨달은 그날부터 나는 매일 울면서 다녔었다.....

아버진 능소화를 좋아하셨다. 여름꽃 능소화는 좋아하시면서 여름은 질색을 하시던 아버진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먼길을 떠나셨다. 능소하를 보면 아버지 생각이 간절하다.

 작년보다 한 살 더 먹은 나는 그 먹은 나이만큼씩 아버지를 점점 더 이해해 나가는 중이다. 친정 오 남매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기억하고 매 년 기일이 되면 각자의 추억을 내놓곤 한다. 가톨릭 가정 제례 예식 중 '가장의 말씀' 순서가 있는데 해마다 돌아가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미처 알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긍정적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언니는 작년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화해했고 나름대로의 상처에 대해 용서하고 용서를 구했다. 우리는 또 모여서 '너 저 라면 가져가서 끓여 먹을래?' 하며 함께 박장대소할 것이다.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모여 우리가 가족임을 확인하고 아버지를 기억하는 기일은, 우리의 삶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서로에게 검사받는 날이기도 하다.

 

서양화를 그리는 취미가 있으셨던 화가 아버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나는 해마다 아버지 취향을 존중하여 기일에 아버지 앞에 화려한 꽃으로 장식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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