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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Aug 02. 2020

님아, 어서 그 강을 먼저 건너시오!

니들도 싸우는구나 - 여름 입맛 잡는 오이지 썰다가

 지난 설 이후 본격적으로 창궐한 코로나 19 감염증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고 경로당이 폐쇄되었다. 마을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아침 10시에 출근, 점심 공동 급식 후 저녁 5시에 집으로 퇴근이시다. 경로당은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한 시골 가장 핫플레이스다.

  

 나처럼 어르신들을 최소 시간에 최대로 많이 만나기엔 경로당 만한 곳이 없다. 관할 경로당마다 찾아다니며 내 주 업무 중 하나인 이동 건강 부스를 운영하고 교육과 상담도 한다. 그러니 나는 뜻하지 않은 경로당 폐쇄가 당황스러웠고, 농한기를 보내는 촌로들 역시 빼앗긴 놀이터에 화가 난 채 시간이 흘렀다. 한 달이 그렇게 속절없이 흐르고 이러다가 내 사업 망하겠다 싶어 차선책으로 방문 대상 가구 외비 대상 가구도 포함하여 개별 가정 방문을 시작했다.


 부임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었고 관할 만성질환을 가진 독거노인, 거동불편자, 기초수급권자, 차상위 계층까지 대상자 파악도  안된 채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더듬어 시골집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쉽지 않다. '무슨무슨 로 몇 번길 몇에 몇'이라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검색하고 가도 목적지 인근에 도착했다면서 안내는 종료되지만  도무지 이 집인지 저 집인지 어느 집인지.... 심지어 전화로 미리 위치를 물어보아도 '사슴 농장 그 아래 이층 집 옆에 파란 지붕 집'이라고 하셨는데, 가보면 사슴 농장 아래는 길이 없고 그 아래 길 이층 집  파란 지붕 집이 네 채나 있는 식이다..... 집배원님들 대단하시단 생각을 늘 한다. 그렇게 시작된 가정방문이 어느덧 6개월을 접어들고 부락이며 집들은 끼고 있는 길들도 제법 파악이 되어 간다.


 관할 부락 중 가장 먼 마을 K 씨 아버님은 팔순이 넘으셨고 이제껏 경로당 프로그램에서는 한 번도 뵙지 못했던 분이었다. 거동이 불편하여 집 안에서만 생활하시고 심장병 외에 이런저런 병증으로 정기적으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으시니 진료 소장하고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방문 때 아버님은 영국 귀족 저택 벽에 걸린 초상화처럼 엄격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새로 온 진료소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인사했는데,

"나한테 부탁할 일이 뭐 있나"

라고 차갑게 대답하시니 뻘쭘..... 이 생활이 벌써 29년 차인데도 여전히 첫 대면은 쉽지 않군...


헌 데 이후 두서너 번 방문을 갈 때마다 데자뷔처럼 아버님은 항상 그 의자에 앉아 계셨고, 방문 대상자인 어머니는 늘 똑같이 집에 안 계시다. 매번 어머니를 찾아 집 안 팍으로 헤매야 했고 어떤 날은 결국 못 만나고 되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분명 아버님은 '저 밖에 있나?'라고 하셨지만, 그 어디 밖에도 어머니는 안 계시고 다른 집을 방문 가서 누군가에게 들어보면 '읍에 머리 지지러' 가셨다! 비밀 없는 시골이라  동네 사람 모두가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지만 당사자 남편만 아내의 행방을 모르고 있다.


 '그냥 가까스로 밥이나 해 먹는 지경'으로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 보호사가 하루 세 시간씩 와주어도 넓은 집 안팎은 마치 '나간 집'처럼 한결같이 어수선하다.  어머니는 오늘도 집에 안 계시다. 아버님의 '저 밖에 있나?' 하시니 속는 셈 치고 집 뒤로 나가 소리를 지른다. 다행히 대답과 함께 미어캣처럼 넓은 고추밭 사이에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에구~~ 저 몸으로 고추농사를 다 지으시는 거예요?"

놀라서 내가 물었다.

 "저 할머이는 되지도 않을 고추는 왜 심어 가지고 저렇게 집에 붙어 있질 않는지 원......"

처음 뵈었을 때 하도 표정도 말도 없으셔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아버님 인지검사였다. 결과는 정상이었지만 여전히 표정도 말도 없으신 분이 갑자기 말문이 트였다.

"저거 고추 농사 지을수록 손해야. 모종 값에 약 값에.... 기 쓰고 해 봤자 먹지도 못해. 죄다 병 들어서 보나 마나 고추도 못 따게 된다고..... 하지 말래도 내 말은 죽어라 안 들어."  

아까 나를 보시고  반색하며 그 밭고랑을 출발하셔서 한참 만에 도착하신 땀으로 젖은 어머니는, 꼬부라진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고개만 들어 나를 바라보시며 '시원한 거'라도 내온다고 또 거실을 나가신다.

"저거 봐, 저거 봐, 소장님이 왔는데 또 나가는 거 봐!"

"소장님 오셔서 시원한 거 대접하는 것도 잔소리야!"

아버님의 버럭에 매실음료 두 병을 들고 나오시는 어머니도 지지 않으신다.

"집에 붙어 있을 날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아버님 이마에 핏대가 서고 언성이 높아진다.

'탈출해야겠다'


 위기 경보다. 서둘러서 아버님의 혈압을 재고 혈당 체크를 하는 동안 할머니는 선풍기 앞에 앉아 혼자 들리지 않게 중얼대는데 분명 입 모양이 욕이다. 위기경보 2단계. 아버님 혈압이 훅 올라가 있다. 맥박도 많이 빠르다.

"혈압이 높으시네. 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셨군요."

내 말 한마디에 아버님이 금세 승기를 잡으신다.

"이거 봐요, 내 말이 틀렸나. 나는 당뇨가 있는 사람이야. 점심 12시에 먹고 나면 저놈의 할머이가 나가서는 7시, 8시가 돼야 들어와. 나는 6시에는 저녁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 시간까지 안 들어온다니까"

"그 시간까지 어딜 가시는 거예요?"

"저 김**네 가서 과부들끼리 모여서 노는 거지. 지가 과부도 아닌데 거긴 왜 가. 어떤 때는 밤에도 들어온다니까"

"그렇게 늦게까지 거기서 뭐 하고 노세요?"

"술 먹고 밥 먹고 화투 치고......"

아버님의 화산이 폭발을 하여 마그마가 쉬지 않고 솟아 나오는데 어머니는 선풍기 앞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계신다. 그야말로 눈 깜박도 안 하시는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혈압을 재려고 준비하는데 귀가 어두우신 아버님을 등지고 돌아 앉으며 나를 향해 작은 소리로 그러신다.

"저 놈의 영감, 왜 안 죽을까...... 남의 영감들진작 다 죽었는데 왜 저 영감만 이렇게 오래 살아....."

당황스럽다. 건강수첩에 체크를 하고 홍보물 몇 가지를 드린 후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데 나를 따라 나오시는 어머니. 우리는 그렇게 울타리 옆 엄나무 그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아니, 어머니의 신세 한탄을 듣는다.


 "나는 저 영감하고 일 분 일 초도 같이 있기가 싫어. 스무 살에 시집와서 이날 이때 매 맞고 욕먹은 생각을 하면 치가 떨려. 젊어서는 바람 나서 매일 나가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다리를 못 써서 저렇게 종일 앉아서 잔소리만 한 다이다. 평생 그랬으면서 내가 좀 나가서 돌아다니는 꼴을 못 봐요. 난 저 영감 하고 종일 같이 있기 싫어서, 애들이 밭도 못하게 하는 걸 억지로 하는 거야. 저거 고추 한 개도 못 따도 나는 괜찮아. 그거라도 농사짓는다고 하고 밖에 있어야 욕을 안 먹지. 그래서 내가 유모차를 밀고 다니면서도 환경지킴이 일도 나가는 거야. 그까짓 거 일당 얼마 안 되는데 저 영감 하고 같이 있는 거보다 나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어쩌고 저쩌고 떠들면 속이 좀 편하거든. 저 할아버이는 심장병도 있고 당뇨에 고지혈증도 있고 병이란 병은 죄다 있는데 왜 저렇게 오래 살까? 아주 지겨워 죽겠어. 나는 무슨 죄가 많아서 저런 영감 하고 이토록 오래 같이 살까...."

"어머니 이제는 백세 시대랍니다. 의학도 발달하고 이렇게 나라에서 건강관리도 해드려서 백세까지 충분히 사십니다."

"그러게.... 백세 인생이 지겨워... 저놈의 영감 다음부터 혈압 그런 거 재지 말아요....."

 

 에효..... 어찌하오리까.... 백년해로가 벌 받는 거라고 하시니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 삼아 묻는 말이 궁하다.

옛날에 결혼할 때 안 좋으셨어요?

좋긴... 부잣집이라고 해서 그냥 얼굴도 모르고 아무케 왔지. 와 보니까 부자는 무슨 부자. 그전에 이북 살 때 부자였다는데 도로 찾을 날만 기다리니 기가 막히지.

아들딸 낳고 이쁘고 좋으셨잖아요?

이쁜지 어떤지 삼 남매 낳고 저 영감이 읍에 마담하고 바람나서 나가 돌고 나 혼자 애들 기르느라 죽어라 고생했지

잘 생각해 보면 좋았던 시절이 진짜 없었어요?

없었다니까! 저놈의 영감 죽으면 내가 쪼끔은 좋은 날 살아볼 건지. 그것도 내가 먼저 죽으면 고만이지 뭐.....

그래도 아버님 먼저 돌아가면 서운하실 걸요?

무슨 복에.......

영재 이 건창 선생의 명미당 전집에 담긴 글을 읽으며 눈물 났던 글이다.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손수 지은 묘지명.

 "첫째는 남자가 잘해야 해요, 남자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다큐영화에서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K 씨 아버님 같은 세대가 여전히 주류인 이 시골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아끼는 것이 여자에게 쥐어 사는 흉 거리가 되는 일이다. 그런 세월을 참고 살았던 어머니들에게, 백 세를 바라보는 배우자는 원망의 대상이다. 입 밖에 내진 못하는 그 말이 하고 싶다.

'님아, 어서 그 강을 먼저 건너시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주는 좀 '쎈' 처방이 있다. 내가 목격한 고독사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이다. 고독사의 비참함은 죽은 지 여러 날 지나 발견되는 과정이나 상주와 연락이 안되는 장례절차뿐 아니다. 고독사 당한 이의 집에서 유품을 정리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비애와 고통이 있다! 겪어 본 바에 의하면, 그 센 처방은 대개 효과가 있고 마음을 되돌리는데 도움이 된다....

 

 또 한 가지,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홀몸이 된 어르신들이 생각보다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공연히 주눅 들고 죄스러워한다. 경로당에도 잘 못 나온다. 남들이 손가락질할 것 같다고 하신다. 그렇게 혼자 집에 틀어박혀 TV만 보다가 인지장애나 치매가 급성으로 오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배우자를 잃은 노인의 자녀들에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남은 부모 혼자 두지 말고 잘 지켜보라는 것이다.


 팔십 세를 넘게 사시는 이들에게 결혼 생활은 보통 50년을 넘는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을 때 중요한 것은 '나'임을 그분들을 보며 깨닫는다. 누구도 강요한 사람은 없다. 진짜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원망이 오롯이 배우자에게만 향하는 것은 냉정히 생각하면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저 남자들이 눈치가 없는 것이 다행일 뿐이다.

오래 앓던 남편이 가고 홀로 겨우 1년을 살다가 치매가 와서 딸이 모셔 가 빈집이 된 지 오래다. 근심은 청어를 부두까지 살려 가져가기 위해 일부러 함께 넣는 바다메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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