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 투어'를 위해 이동 차량에 탑승하는데 '그 남자'가 필요 없는 백팩을 메고 나왔다.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투어용 승합차에 맡기기로 했다. 투어 장소에 도착하여 차를 내리며 보니 현지인 가이드가 그 핑크색 백팩을 메고 있었다. '왜 이걸 네가 메고 있느냐' 물으니 당황하는 가이드가 머뭇거린다. '그 남자'가 의기양양 말했다. '내가 keeping! 했더니 지가 메데? 이차는 우리 내려주고 가나보지?'라고 한다. 나 역시 당황하였지만 미소를 지으며, 'Please leave the bag in your car?'라고 물었다. 그가 단번에 활짝 웃으며 재빠르게 백팩을 차에 넣어 실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영어를 잘한다고 했다. 자신이 '송프란시스탄' 일명 '송탄 샌프란시스코' 출신이라고 했다.
여행을 좋아한다.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편이다. 패키지로 가는 여행은 마치 학창 시절 수학여행 같기만 하고 내겐 너무 고되기 때문이다. 4월 미자막 주에 팬데믹 이후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이런 날을 4 년이나 기다려야 할 줄은 몰랐으니 감격스럽기도 했다. 여행지는 코타키나발루로 정했고 나의 남편과 나의 절친 부부, 넷이서 함께 하기로 하여 2 개월 전에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몹시 설레고 기대가 컸다. 친구와 한 번, 남편과 한 번,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고 느긋하게 편히 쉴 수 있는 휴양지인 코타키나발루를 남편도 나도 좋아한다. 바쁜 시간 속을 떠나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느리게 여유롭게. 그것이 언제나 나의 해외여행 주목적이다.
바쁜 가운데 이런저런 블로그의 글들을 참고하여 일정을 짜고 인터넷으로 현지 업체에 투어를 예약하고 Grab(그랩) 앱을 다운로드하고 트레블 페이 카드까지 발급을 받으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어느 나라를 가든 현지 음식을 잘 먹는 편이지만 약간의 즉석밥과 라면, 소주, 김치와 김 정도는 꼭 가지고 가는 편이다. 짐을 싸는 기술도 제법 갖춘 편이어서 크게 어렵지 않게 가방을 꾸려서 저녁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출발했다. 출발 직전까지도 흥겨웠다. 돌아오는 날 도착 시간이 새벽 5시 10분이었는데 고마운 동생이 있어서 데리러 오기로 약속까지 되어 있어 준비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한 살 위, 친구와 그의 남편 나, 우리 셋은 동갑이다. 같은 아파트의 주민이고 같은 또래가 지닌 비슷한 환경과 같은 성장 경험을 공유하며 자주 만나 밥도 먹고 술도 한 잔씩 나누며 십 년을 함께 했다. 국내 여행도 적잖게 함께 하였으니 마음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대망의 첫 동반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이국의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웬만하면 걷고 걸으면서 구경하고 마음 내키면 머물며 즐기는 것은 해외에 가서 로컬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과 함께 그 나라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 남편인 '그 남자'는 30분 정도 거리여도 무조건 차를 타야 했다. 첫날부터 그를 배려하여 우리는 이동하려면 무조건 그랩을 불러야 했다. 다행히 1링깃이 300원 정도의 환율이어서 걸어서 30분 거리를 이동하는 그랩 요금은 6링깃 정도였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서도 그는 시원한 곳에 앉아 있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느라 사라져 우리를 애태우기도 했으니 여행의 시작에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우는 느낌이었다.
나는 해외여행을 가서는 가볍게 와인 한 잔 또는 맥주 한두 잔 정도로 과음은 피하는 편이다. 낯선 곳에서의 숙면에도 방해가 되고 다음 날 일정에 지장도 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허리는 아프지만 입이 아픈 것은 아니니 조식당에 갈 때도 이슬을 생수병에 넣어 가지고 갈 정도로 술을 과하게 즐겼다. 아니, 음식보다 술을 더 많이 먹었다. 무슬림 국가는 주로 술이 비싸다. 워터프런트 같은 멋진 곳에서 유명 맛집인 '마이야이 타이 오키드 레스토랑'에서 타이 음식을 즐기며 타이거 맥주 한 잔을 놓고 이런저런 느긋한 대화를 하는 낭만 따위는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서둘러 음식을 먹고는 '나는 끝'이라면서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가 버리거나 우리의 수다를 종식시키고 싶었는지 그 비싼? 맥주를 석 잔이나 마셔대는 자신의 남편을 보는 친구의 표정이 즐겁지 않아 보였다.
세계 3대 석양 중 하나라는 코타키나발루에서 선셋을 감상하는 명소로 손꼽히는 원터프런트는 한 낮이라 한가했다.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 이곳은 발 디딜 틈도 없다.
'마이야이 타이 오키드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다른 곳에서 돈을 덜 쓰더라도 여기는 꼭 와봐야 한다. 맛은 물론 분위기가 일단 한몫이다.
예약한 숙소는 주방이 딸린 빌라였기 때문에 한 끼 정도는 숙소에서 한식으로 조리를 할 생각이었다. 허리가 아파 오만상인 '그 남자'를 배려하여 마트에서 그저 약간의 물과 맥주를 사고 재래시장에서 망고를 산 후 다시 그랩을 불렀다. 대부분의 그랩은 우리나라 모닝 정도의 소형차가 많은데 운이 좋아 SUV 정도의 큰 차여서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 들러 짐을 찾고 시내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예약된 숙소로 가기로 했다. 비록 '브로큰 잉글리시'여도 네 명 중 영어 가능한 사람은 나뿐이어서 조수석에 내가 탔고 젊은 청년인 그랩 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국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았던 탓으로 대부분의 시스템이 영국식이고 자동차도 오른쪽이 운전석이어서 헷갈린다는 이야기며, 그곳의 휘발유가 리터당 약 600원(2링깃)이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길이 몹시 막혔다. 기사에게 사탕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놀라 물으니 '라마단'기간이어서 금식 중이라고 했다. 일상이 수행인 무슬림들의 율법에 대한 경외심에 존경을 표하며 막히는 도로가 공연히 미안하여 이런저런 유머를 곁들여 기사를 웃게 해 주었다. 1시간 40분이 걸려 도착한 숙소에서 우리를 내려주며 그는 '86링깃이지만 70링깃만 내라'라고 했다. 놀라서 왜 그러냐 물으니, '유 쏘 나이스'라고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기사에게 80링깃을 건넸다. 그도 나도 나이스다.
차들이 그냥 서 있다. 수요일부터 학교는 방학이고 그날은 목요일이었는데 금요일이 큰 명절이고 그날부터 휴일이 시작되어 대부분 무슬림들이 귀향길에 오른다는 설명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겨 준 세계 3대 석양.
'그 남자'는 놀라울 정도로 내내 개별 행동을 했다. 멋대로 없어지고 국립공원 게이트 앞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워 무는 정도로 배짱도 좋았다. 역시 여행은 목적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해야 행복하다는 당연한 말을 실감했다. '그 남자'의 아내는, 다신 남편과는 해외여행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함께 여행하자고 한다면 선택을 미룰 것이다. 현지 문화와 현지인들에 대한 존중, 시간 엄수, 개별 행동 금지, 지나친 음주와 흡연, 현지 음식에 대한 진지한 태도, 동반자들에 대한 배려와 희생 등이 갖추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내 귀한 시간과 돈을 나누기 싫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