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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09. 2020

삭제된 섬

장날 만난 오토바이 아줌마

 사람 보고 가슴 철렁해 보긴 처음이다. 장날이었고 주말이었다. 가을걷이가 시작된 시골의 장날은, 건고추며 속노랑 고구마가 벌써 나와 쌓였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답답하기도 했고 사람도 가득하니 장 구경을 할 시간도 마음도 없이 미리 전화로 주문한 활어회를 찾아들고 주차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유난히 생선회를 좋아하는 아이가 물회가 먹고 싶다고 했다. 차 위치를 막 발견한 찰나,

"소장님 아냐?? "

귀에 익은 목소리에 놀라 멈추고 돌아보았다. 처음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내게 빠르게 다가오는 이라면 분명 잘 아는 사인데 통 생각나질 않았다. 짧은 몇 초간 내가 근무했던 마을들의 사람들을 순식간에 주욱 훑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인사는 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최대한 밝게,

"아~ 네~ 장날이라 나오셨나 보다. 무탈하셨어요?"

이 얼마나 무난한 인사말인가!

"오늘 아침 배로 나와서 고추 팔고 장 봐가지고 어서 가야지. 뱃 시간 늦으면 큰일이니까. 지금 어디 근무하셔?"

아침 배로 나왔다가 서둘러 배 타러 가야 하면..... 그 섬이구나. 그래! 생각났다. '오토바이 아줌마!' 그래, 그 말투, 속도, 여전히 오토바이 모양 빠르다! 이름은 영 생각나지 않고 하도 달변에 빠른 말투 때문에 별명이 '오토바이'였다는 것은 기억났다.

"거긴 다 별 일 없으시죠?"

"그렇지 뭐.... K는 죽었어. 아시나?"

"어머! 왜요?"

"술을 하도 많이 먹어서 죽었지 뭐."

K는 그 섬의 유일한 노총각이었고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알코올 중독자로 나를 꽤나 괴롭혔었지.... K는 내가 그 섬에서 업무를 개시하던 첫날 첫 손님으로 찾아왔다. 오전 9시였는데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아, 소장님은 뭘 잘못해서 여기로 발령이 났시꺄?"

그는 대놓고 염장을 질러 첫인상부터 내게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그는 이후로 매일 밤낮으로 상담 전화를 했고 아침이면 여기저기 아프다며 진료를 받으러 왔는데 아마도 개똥을 밟고 한 달 동안 씻지 않았는지 악취가 고약한 발로 민원실 바닥에 뭉툭한 발자국을 남기고 돌아가곤 했었다. 하루 다섯 번 이상 전화를 했고 세 번 이상 찾아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침 그 섬에 진입로 공사를 맡아 들어와 있던 건설사 사장인 친한 동생 S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 남자가 일도 없이 하루 세 번 이상 찾아오는 것도 싫고, 전화 다섯 번 이상 고 싶질 않네. 진료받을 일이 있을 때만 진료소에 왔으면 좋겠어.'라고 했고 그 주말이 지난 월요일에 거짓말처럼 K는 내게 90도로 인사하며 술 먹고 했던 실수를 사과했다. 그 K가 죽었네.... 마을에서 제일 어린 청년이었는데.  

"아, 그러셨구나..... 이장님은 여전하시고요?"

"이장? 어느 이장? 소장님 나가고 이장도 하도 바뀌어서"

"그 머리 하얗고 J네 아버지라고 했던..."

"아~J아버지~똑같지 뭐. 욕 잘하고 술 먹고. 아유~ 거긴 다 똑같아."

J아버지라는 이장님은 그 섬에 발령받아 갔던 첫날 인사를 간 내게 엄청이나 화를 내며 '알아서 하라, 이장이 뭐 할 거 있느냐'며 쏘아댔다. 당황해서 이유를 알아보니 빈 손으로 들어간 탓이었다. 삼겹살과 소주 한 박스를 사서 엉뚱한 사람, 즉 이장과 적대 관계인 전임 이장에게 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돌문어 두 마리와 소주 한 박스로 가까스로 화해했던 그 이장님은 말의 시작과 끝, 그리고 추임새가 욕이었다. 그래도 내게 밥 먹으러 오라고 초대한 단 두 집 중 한 집. 나를 먹여 살린 또 한 집은 ㄱㅂ호 선주네 집.

"ㄱㅂ호 Y네는 잘 있죠?"

"거긴 아들 잘 둬서 아주 돈 마이 벌었지. 아들이 군대 갔다 와서 지 아버지 뒤를 이어서 배 타잖아. 아들이 맡고 나서부터 젓새우가 몇 번 터졌어. 걘 군대 제대하고 나오는 날 양 팔에 시커멓게 문신을 하고 욕을 지 아버지보다 더 잘해. 장가도 갔어.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계집애라는데 아주 싸가지야"

어안이 벙벙하다. 그 아들이라면 아이돌 가수처럼 예쁘장하게 생기고 당최 말수도 없고 착한 어린아이였는데 문신을 한 욕 잘하는 선장이 되었다니.....

"다들 잘 계신가 보네요"

"어디 가나~다들 똑같아. 고대루야. 소장님도 하나도 안 늙고 고대루네! 근데 출장소장님 사모님은 이사 갔다며?"

"아, 네.... 인천으로 아들하고 같이 산다고 이사하셨어요."

"한 번 놀러는 왔더랬는데, 신랑 죽으면 고만이지 뭐...."

그 섬의 진료소 바로 옆에 파출소 출장소가 있었다. 순경 하나와 그의 아내가 같이 들어와 있다고 했다. 내가 이사하던 날 인기척이 없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나와 보지 않았다는 걸 알고 또 적잖게 당황스러웠었다. 전직 공안 형사 출신으로 80년대 민주 투사들을 꽤나 잡아넣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소장님은 직장암 투병 중이었고 그의 아내는 전업주부였다. 전임 진료소장에게 뭔지 모를 배신을 느껴서 다신 진료소장들하고 친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지만 착한 사람들은 결국 마음을 터놓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동기간처럼 친해져 같이 웃고 같이 울며 일 년을 가족이 되어 지냈다. 결국 소장님은 내가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떠나고 언니는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분식집을 하다가 최근 이사를 갔다.  

"아유, 소장님 너무 반갑네... 꼭 한 번 놀러 와요. 가무락조개랑 상합 조개 캐서 냉동실에 얼려놨어. 난 어서 가야 해서. 3시 버스를 타야 막 배를 타지. 한 번 놀러 와요. 이제는 석모도까지 다리가 있어서 배 한 번만 타잖아. 얼마나 좋아졌는지 몰라"

"네, 그럼요~조심히 가시고 건강하세요~"

오토바이 아줌마는 늘 그렇듯 자기 말만 빠르게 늘어놓고 묵직해 보이는 배낭을 추스르고는 터미널 쪽으로 바삐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뭔가 강도에게 죄다 털린 사람처럼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천천히 주차장으로 향했다. 걸음걸이에 힘이 없는 이유가 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꿈에도 생각지 않고 살던 내 기억에서 삭제되었던 그 섬사람들의 안부가 내 입에서 술술 나오다니'

그랬다. 심지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미처 묻지 못한 사람들 안부까지 궁금해지면서, 폴폴 피어나는 기억의 조각들을, 마치 퍼즐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주섬주섬 찾아내고 있었다. 죄다 삭제한 줄 알았는데 실은 웹 상을 떠도는 나의 신상처럼, 또는 다신 꺼내 보지 않으려고 깊이 묻었었고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싹 다 꾸려서 멀리 내던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들. 막상 펼치고 보니 너무나 쉽게 불과 한 시간같이 여겨지는 1년의  하루가 365시간처럼 선명하고도 명확하게 떠오른다. 내게서 삭제되었다고 여겼던 일 년짜리 섬, 서검도.


 딱 10년 전. 오토바이 아줌마는 이제 막 이삿짐을 싣고 들어와 짐도 풀지 못하고 청소부터 하고 있는 진료소에 제일 먼저 찾아왔다. 짐을 이것저것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짐이 얼마 없네. 금방 나가실 건가 보다."

"네?"

당황한 내 되물음은 무시하고 민원실 소파에 앉아 브리핑을 시작했다.

"여기는 무서운 곳이야. 조심해야 될 걸 말해 줄라고 왔지. 여기서는 절대 근무 시간에 낚시하러 나가면 안 돼."

'근무시간에 낚시라니....'어이가 없다.

"낚시요? 저는 세상에서 낚시가 제일 싫어요."

"그래요? 그러면 다행이구만.  J소장님 알죠? 그이는 망둥이 낚시를 매일 나갔어. 망둥이를 잡아다가 진료소 옥상에 말려서 집에 한 포대씩 가지고 갔지. 근무 시간에 망둥이 낚시 다니다가 민원 먹었지. 허긴 여기선 뭐 빤히 보이는 곳에서 낚시를 하니 냅다 부르면 바로 들어올 수 있긴 한데 주민하고 잘 못 지내서. 별 사람 다 있잖아, 원래. 6시 넘으면 문 딱 닫고 진료를 안 봐줘서 앙심을 품고 벼르고 있다가 딱, 민원을 넣은 거지. K 소장님이라고 알죠? 지금 어디 근무하나? 그 소장님은 진료소 뒤에다 병아리 사다 놓고 길렀어요. 특히 영감님들한테 잘했지. 그래서 소장님 집에 나가서 없을 때 닭 모이도 서로 주고 그랬지."

"그분은 정년퇴직하셨어요. 완전 옛날 얘긴가 봐요."

 "아, 그래요? G소장님도 알죠? 그이 남편이 미국에 있다는데 이혼을 했지 싶더라고. 어떻게 한 번을 여길 안 와? 그러니까 딱 눈치챘지. 여기 사람들 눈치가 백 단이야. 그 소장님은 여기 근무하는 동안 주말에 집에 한 번도 안 나가고 그저 목욕 갔다가 바로 들어오고. 인기가 제일 많았지. 소장님은 집이 어디셔? 애들은? 딸 만 둘? 이그~ 아들이 하나 있어야지...."

빠른 속도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전임 근무자들에 대한 브리핑이 길게 이어졌지만 정작 이삿짐은 박스 하나도 옮겨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어정쩡하게 서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벌써 나는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강화도에 딸린 부속 섬 중 보건진료소가 있는 곳은 세 개의 섬에 여섯 곳이었는데 내가 발령 났던 서검도는 인구 65명, 35가구뿐인 작은 섬이었고 당시엔 배를 한 번 더 갈아타고 들어가는 섬이었다. 하는 일은 다 똑같았지만 단지 교통이 불편하였던 탓에 주로 초임 발령이거나 업무상 과실이 있는 이들이 발령이 나곤 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발령이었고, A를 B자리에 넣어주기 위해 C를 밀어내어 B를 C에 넣고  A가 원하는 B에 그를 넣어 주고 C인 나를 A에 발령 낸 상황이었다. 뭐가 이리 복잡하나 하지만 결국 나는 A를 위해 쓰리쿠션으로 밀려서 그 섬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어서 즐겁고 행복할 수 없었다. 거긴 민간인 통제선 지역이었고 오전 8시 40분에 한 번 오후 4시 30분에 한 번 뿐이어서 출퇴근이 불가능하여 주말에 한 번 집에 올 수 있었다.  


 발령을 받았을 때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이었다. 남편도 나도 퇴직을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냉정해지고 나니 무슨 애국지사라고 마음이 비장해지면서 그런 식으로 사표를 내긴 싫었다. 그건 뭔가 굴욕적인 항복 같았다. 그 자는 내게 공개석상에서, '나는 네가 잘난 체해서 싫어'라고 말했고 나도 지지 않고 '저는 잘난 체 한 적 없는데요. 저는 그냥 잘났어요. 저도 뭐 소장님이 그렇게 맘에 드는 줄 아세요?'라고 대놓고 말했었다. 밉다는 이유로, 인사권을 가졌다고 권력인양 마구 휘두르는 자가 바라는 대로 굴복하는 따위로 내 자서전에 굴욕의 페이지를 남기기 싫었다. 게다가 여고 동창의 남편이었던 주무 팀장이,

"그만두긴 왜 그만둬요? 한 일 년 푹 쉬다 오고 좋지 뭘 그래?"

라고 사직을 극구 말렸다.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내가 너보다 두 살 아래이니 내가 여기 너보다 더 오래 남을 거다. 네가 지금은 세상 꼭대기에 올라간 기분이겠지만 내가 너 퇴직하고 이 년동안이나 더 다니면서 후배들에게 너에 대해 차근차근 씹어 줄 거다.....'  

기분 상은 내가 그의 머리 위에 올라선 것 같았지만 현실은 비참했다. 진료소장이 이사를 하는데 단 한 명도 나와 보지도 않는 이런 마을은 처음이었다. 배에서 내려 진료소까지 가는 동안 짧은 해는 이미 넘어가고 늦가을의 을씨년스러운 살풍경과 살을 에이는 칼바람이 그 섬의 첫인상이었다.


 슬프고 외롭고, 그리고 억울했다....... 

이사를 도우려고 휴가를 내고 함께 들어간 남편과 대충 짐 정리를 하고 나니 짧은 햇발은 이미 저 바다 너머 중국으로 가버렸고, 라면을 끓여 먹으려는데 냄비도 젓가락도 그릇도 없다! 바로 옆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냄비를 빌리는 손이 너무나 부끄럽다. 그저 옷 몇 가지, 이불과 책, 노트북이 전부인 이삿짐 안에 조리기구는 넣지 않았다. 대부분의 섬 진료소들은 펜션처럼 관사에 전임자들이 기본적인 것은 남겨 두고 가는 배려가 있었다. 그걸 믿고 그냥 들어간 내가 정신이 없긴 했다. 그렇게 첫날밤을 칠흑 같은 섬의 망루에 홀로 누운 듯 뒤척이다가 남편은 다음 날 아침 배로 떨어지지 않는 길을 되짚어 나가고 홀로 남은 나는 얼마나 울고 또 울었던가. 사무실에 앉아서 넋 나간 채 창 너머를 보면 바다가 보이고 그 바다의 테두리엔 이 섬에서 건너가면 닿는 석모도 하리 선창만 눈에 닿았다. 엄마가 없어 서러울 내 아이들 생각에 숨도 제대로 못 쉬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35가구 65명의 인구와 해병대 소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그 섬은 어업에 종사하는 가구는 단 두 가구뿐, 나머지는 모두 농사가 주업이었고 불과 2,30년 전까지는 드넓은 농토가 다 염전이었단다. 아직도 타일이 촘촘히 깔린 바닥이 있고 소금창고와 수차가 남아 있다. 그래서 염전일을 따라 전국에서 흘러 들어온 염부 출신의 사내들이 인근 섬에서 얻어 온 색시들로 이렇게 저렇게 인척으로 얽혀 그렇다고 아주 남도 아닌 사람들. 그러나 거칠고 험한 성정에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상황이 되면 0.1초도 참지 않고 바로 격돌하여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들처럼 싸우고 다음날이면 다시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전해 들은 이야기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던 그들에게는 몸에 밴 생존을 위한 극성스러운 삶의 행태가 고스란했고 그것이 내게는 매일 충격으로 닿았다.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어머,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이고 대답은, '여긴 원래 그래'이다.

 

 진입로 공사 현장에 쌓아 놓은 시멘트 포대를 외발 수레에 실어 집으로 무단으로 가져오는 것은 능력이었고, 옛날에 아이들이 자는 단칸방으로 그나마 땅이 좀 있다는 마을의 영감이 찾아오면 지금은 할머니가 된 아내는 술상을 들여오고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남편은 슬쩍 집을 나가 밤이 늦도록 마을을 빙빙 돌았고 그다음 날이면 쌀 돼가 들어왔다는 이야기,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생선을 이고 배를 타고 건너 다니며 팔았다는 이야기 들이 수도 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법도 상식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장님께 마을 방송을 부탁하려면 아침 6시에 전화를 드려야 했다. 업무 시작 후 9시 이후에 하면 벌써 술에 취해 있었다. 가게도 식당도 없는 곳이어서 술은 보통 담금주 35도짜리 댓 병을 박스로 사다 쟁여 놓고 마셨다. 안주로는 닥치는 대로 삼았다. 죽은 고라니며 심지어 기르던 시츄도 안주가 되었다. 일주일 만에 완전히 질린 나는 혼자 외떨어지고 싶었다. 거긴 해가 떨어지고 나면 암흑이요 적막강산이었다. 사람이 죽어도 아무도 알지 못할 정도로 해가 떨어지면 강아지도 돌아다니질 않았다. 나는 슬펐고 아이들이 그리워서 그 섬사람들의 하루 일과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근무가 끝나면 바로 운동화를 신고 섬을 한 바퀴 걸었다. 크게 한 바퀴를 걸으면 40분이 걸렸다. 어떤 날은 마음의 분을 삭이려고 두 바퀴도 돌고 세 바퀴도 돌았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걷고 또 걸었다. 울면서. 가족이 그리워서, 아이들이 어려서 라고 했다. 아니라고 큰소리치고 있었지만 실은 뭔가 중심축으로부터 밀려났다는 두려움도 실은 있었다. 이대로 잊힐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뭔가 무고죄를 뒤집어쓴 듯 억울했다.


 딱 일주일 만에 직장 선배가 우체국 택배를 보내왔다. 참치캔, 마른오징어, 구운 김, 과자.... 뭐 그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얌전한 양반의 익숙한 필체로 쓴 편지가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기억이 다 나진 않지만 얼추 '국방부 시계만 거꾸로 매달아도 가는 것이 아니야, 복지부 시계도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 그런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지내다가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감동이었고 힘이 났다. '그 자'만빼고는 다들 내 편인 것 같았다. 그 힘으로 조금 일어날 수 있었다.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한 달 두 달.... 적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적응이 되어 가고 있었다.  


 또 신앙의 동지에게서 또 다른 택배가 욌다. 영적 독서를 위한 신앙 서적과 사순시기와 부활 시기에 하는 성무일도 책이 들어 있었다. 하루 환자 서너 명 보고 거동불편자 한 분 방문을 마치면 그날의 업무는 끝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성무일도를 시작했다. 독서기도, 아침 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끝기도...... 마치 수도자처럼 매일 시간경을 바치면서 나는 비로소 천천히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세우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울지도 않았다. 신께서 나에게 위로를 주셨기 때문이다. 섬의 사계절을 사진에 담고 책도 읽고 편지도 쓰고 글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일은 내 평생의 채무 같은 것이었다. 여고 시절 문학소녀의 장래는 작가일 거라고 전교생이 믿고 있었던 정도였다. 그러니 나는 무슨 사명처럼 글 쓰는 일을 하는 작가라는 꿈을 언젠가는 꼭 이루어야 했다. 공모전이 있었다. 삼군 사관학교와 월간 문학세계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이었다.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글을 써서 보냈다. 단편 소설이었고 대상을 탔다. 그리고 월간 문학세계에서 아직도 '소설가님'이라며 공지사항이 날아온다. 그즈음에 나의 몸은 그 섬에 정착해 있었다. 금요일 저녁 배로 집에 갔다가 월요일 첫 배로 들어가는 패턴도 익숙해졌다. 파출소 출장소 소장님 부인과 나와 동갑내기 ㄱㅂ호 여주인 이렇게 셋이서 거의 매일 밤이면 뭉쳤다. 배우 이덕화 씨가 자주 온다는 저수지 낚시터 관리인이 간헐적으로 운영하는 식당에 넘어가 맥주 한 잔씩 기울이며 살아온 이야기로 수다를 떨 수 있었고 매일 운동도 쉬지 않고 했고 운동하는 동안 음악을 듣던 내 손엔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겨울이 가고 봄 다음에 여름이 올 즈음에 신기하게도 나는 나를 그곳으로 발령 낸 그 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종로에서 뺌 맞고 한강에 가서 위로를 받았다.' 나에게 서검도는 예수님의 광야요, 모세의 떨기나무요, 히브리인들의 광야였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잃은 후 로마의 집정관 아리우스의 양자가 된 유다 벤허처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강화도의 서쪽 끝 이북과 한강 그리고 인천으로 드나드는 선박의 검문이 이루어지던 섬. 서검도. 그 섬의 65명 35가구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하단다. 다행이고 감사하다. 그들은 여전히 나 다음으로 들어간 진료소장들에게 내게 한 것처럼 J소장부터 G소장까지 그다음 나 K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겠지. 제일 짧게 있었고 성격은 어떻고, 이사 나갈 때 빈 병 하나 안 남겼다고. 나는 매주 집에 나올 때 한 주간의 쓰레기를 모두 싣고 나왔었다.  그들은 심지어 전임 진료소장 이사 나갈 때 무슨 쓰레기를 얼마나 남기고 나갔다는 이야기까지 했었다. 그 어떤 연연도 맺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망둥이 낚시도, 조개를 캐러 나가는 일도, 숭어 후리질도, 해변에 나는 나물을 뜯는 일이나 산에 가서 엄나무 순을 따는 일 따위는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공동 상수도 탱크의 물이 부족해서 주말에만 물을 주는 그 섬에 나는 매주 생수 두 팩씩 사들고 들어갔고, 최대한 그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토바이 아줌마에 의하면 나는 그곳에서 '행정선 제일 많이 띄운 소장'으로 기억된단다. 짧게 근무를 한 탓에 그것 말고 나를 기억할 딱히 이렇다 할 이야깃거리가 없단다. 섬에서는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군청에서 운영하는 행정선을 요청해야 한다. 내 기억에 거의 네 번 정도 행정선을 띄웠던 것 같다. 객선이 오는 시간이 아닌 때에 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전봇대에서 떨어진 환자에 대해 신속하고도 정확한 조치로 대학병원에서 고맙다는 답신도 받아 보고 혼자 흡족했던 생각도 덤으로 떠오른다.


  3주 전 10년 전의 나와 비슷한 경로로 섬으로 갑자기 발령이 낫 들어간 후배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마음이 몹시 딱하고 덩달아 복잡했던 10년 전의 감정들이 새삼 솟았다. 딱지를 뜯어낸 상처는 아니었고 그저 흔적만 남은 그 상처에 대한 아픔은 잊었지만 기억만은 그대로인 그 상처 말이다. 그래서 나도 그때 그 선배가 했던 것처럼, 이런저런 식품이며 간식을 꾸러미에 넣어 그 위에 편지 한 장을 얹어 우체국 택배를 보냈다.

'국방부 시계만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돌아가는 게 아니야. 복지부 시계도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돌아가. 자중자애하며 잘 먹고 건강하게 푹 쉬고 돌아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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