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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20. 2020

민원 먹은 날의 저녁노을은 아름답기도 하구나

민원은 먹을 때마다 새롭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월요일이었다. 긴 연휴 끝이라 묵직해진 몸으로 출근을 했는데 오후 첫 내소자로 M님이 찾아오셨다. 이곳에 발령받아 업무를 시작한 첫날 오셔서 자신을 거창하게 소개하셨던 분이다. 딱히 명확히 밝히지 않으셔서 불분명한 직책의 공직 출신이고 IMF 시절 보건진료소 폐지에 대해 투쟁으로 이곳을 지켜낸 유공 자시라고도 했다. 매번 오시면 '과음으로 인한 속 쓰림' 증상을 호소하며 몇 년째 지속적으로 약을 받아다 드시는 분. 어쨌든 첫인상도 상당히 권위적이셨던 분이 몹시 딱딱한 표정으로 들어오셨다. '손 소독을 권하고 코로나 19 관련 문진표 작성'을 부탁드렸다. 어쩐지 화가 나 있는 듯하여 공연히 나 역시 긴장이 되었다.

"우리 아버님 왔다 가셨죠? 기억나세요?"

"아, 네. 추석 연휴 시작 직전 날 오셨었어요. 어머님은 괜찮으시죠?"

"설사를 좀 하셨는데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소장님은 언제 다른 데로 발령 나시죠?"

"네?(급 당황) 저는 작년 8월에 왔으니 한 이삼 년은 더 있겠죠? 왜요?"

"그날 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진료소장 다른 데로 갈려 갈 때까지 진료소 안 다니신다고 하세요."

"어머나....."

"내가 군 보건소로 전화하려다가 직접 온 겁니다."


 8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할멈이 아침부터 갑자기 설사를 했다. 집에 상비약으로 있던 스멕*를 먹었더니 설사는 어느 정도 멎었는데 내일부터 추석 연휴라 불안하다. 진료소라도 가서 상비약으로 설사 멎는 약을 좀 지어다 놓을 생각으로 찾아갔다.

'아버님 마스크 하고 들어오세요. 거기 입구에서 손 소독 먼저 하시고'

다짜고짜 불친절하다. 그러고 보니 진료소장이 바뀐 것 같다.

'진료소장님 바뀌었어요?'

'마스크를 해서 몰라 보시나 보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여기 코로나 19 문진표 먼저 작성해 주세요.'

정신이 없다. 오랜만에 왔더니 바뀐 게 너무 많다. 빨리 읍내에 가야 하는데 뭘 하라는 것이 많기도 하다. 문진표 작성도 오래 걸렸다. 일단 할멈 설사약을 달라고 했더니 할멈을 모시고 오란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 할멈 처지를 알면 저러지 않을 텐데 아무래도 진료소장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모양이다. 결국 대리 처방은 안된다면서 뭔 서류를 면사무소 가서 떼어 오라는데 그깟 설사약 그냥 주면 되는데 복잡한 걸 하라니 결국 불쾌하기만 한 채 그냥 읍내 볼일 보러 간 김에 스멕*를 몇 개 사 왔다. 감히 나한테 함부로 하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날이라 바빴는데 오후의 첫 내소자로 M님의 부친께서 오셨다. 마스크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들어 오시면서 첫마디가 '나 알죠?'였다. 긴가민가하고 생각이 나질 않아 당황하면서 그래도 친절하게 웃으며  마스크 착용하시라고 안내한 후 손 소독을 부탁드렸다. 안으로 들어오신 아버님께 코로나 19 문진표 작성을 안내했더니 잠시 나를 노려 보신다.

"진료소장 바뀌었어요?"

"아뇨. 마스크 쓰셔서 잘 못 알아보시나 봐요."

"우리 할멈이 H예요. 치매 걸린 지 8년째 집에 내가 집에서 돌보고 있어요. 알죠?"

그제야 딱 생각난다. 기록부를 보니 지난 2월 초에 다녀가신 기록이 있다.

"네, 네, 알죠, 오랜만에 오셨네요."

"우리 할멈이 오늘 새벽부터 갑자기 설사를 해서 설사약 좀 지으러 왔어요."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집에"

"에고.... 아버님 올 2월부터 대리 처방이 금지가 되었어요. 어머니 모시고 오셔야 진료가 가능해요."

"우리 마누라가 동국대학교 병원에 다니면서 치매약을 먹는데 거기서도 그렇게 얘기하던데 여기는 대학병원도 아닌데 똑같이 말하네?"

"여기도 의료기관이라 똑같습니다."

"나 지금 읍에 가야 해서 시간이 없는데 그냥 좀 지어 줘요. 지금은 스멕* 먹여서 설사는 멎었는데 추석 연휴 동안 혹시 몰라서 상비약으로 지어다 놓으려고 그러는데."

"설사가 멎으셨으면 괜찮으실 겁니다. 소화 잘되는 음식으로 잘 조절하시고 따뜻한 물이나 이온음료를 드시게 하시면 됩니다. 혹시 꼭 상비로 준비하고 싶으시다면 읍내 약국에서 스멕*를 몇 개 사다 놓으세요. 대리 처방은 안돼서요. 대신 다음부터 대리로 가능하실 수 있도록 확인서 작성을 도와드릴까요? 면사무소에서 가족관계 증명서 한 부 떼 오시고 어머니 주민등록증하고 아버님 주민등록증 사본 첨부해서 비치하면 됩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가야지 뭐...."

그러시고는 그냥 조용히 나가셨다.


 M님은 다시 잔뜩 긴장한 얼굴로 딱딱한 표정을 지은 채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낯빛도 창백해졌다. 입술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순간 스치는 생각. 착한 사람들이 남에게 모진 말을 하려면 본인이 먼저 저렇게 잔뜩 분노의 레벨을 올리려고 할 때의 얼굴이다. 그래서 내가 얼른 먼저 입을 열었다.

" 아버님께서 그렇게 불쾌하셨다면 제가 충분히 납득을 시키지 못한 탓이니 제가 죄송합니다. 아버님께서 많이 노여워하시니 제가 직접 찾아뵙고 사과를 드려야겠지만 괜찮으시다면 대신 잘 말씀 좀 드려 주세요. 다음번에 한 번 나오시면 제가 딸처럼 상냥하게 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잖아도 마을에서 여론도 안 좋아요. 왜 전임자들은 파스도 다 주고 진료소에서 살림하고 살아서 아무 때나 오면 진료받았는데 지금 소장님은 아주 맘에 안 든다는 여론이 많아요. 그리고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운다고 불만도 많던데 말이야."

"그러셨군요.... 파스 문제는 저도 참 딱합니다. 대상자가 지정되어 나오는 것이라 제 맘대로 드리기 어려워요. 그리고 전임 소장님들은 본가가 지방이라서 당직실에서 신세를 지셨지만 저는 집이 가깝잖아요. 그리고 코로나 19 탓에 제가 선별 진료소도 근무를 나가야 하고 요양시설 점검도 매일 나가니 아마도 헛걸음을 많이 하실 거라고 예상은 하지만 저도 최대한 열심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해야죠."

상대방은 잠시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얼른 덧붙였다.

"제가 여기 와보니 이 동네가 너무나 좋아요. 어르신들도 다들 점잖으시고 정 많으시고. 제가 여기서 정년퇴직하고 싶은데 안될까요?"

M님이 자신도 모르게 허허 웃는다.

"아버님 한 번 나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제가 차 한 잔 타드리고 정식으로 사과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시간 되시는 대로 대리처방 확인서를 작성해 두시면 아버님이 대신 오셔도 서로 낯 붉힐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가족관계 증명서만 한 부 떼어 오시면 됩니다. 제가 지금 또 요양병원 방역 점검도 나가고 가정 방문도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어쩌죠?"


 그렇게 M님을 보내고 서둘러 방문 가방을 꾸려서 출장을 이동하는 짬짬이 M님의 아버님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삼십 년 전에 이장 일을 보신 것이 큰 자랑거리시고 8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를 손수 돌보시는 어르신은 팔순이 훌쩍 넘으셨지만 4인승 트럭을 직접 운전하시는 것도 큰 자랑거리시다. 몹시 권위적이고 사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습관이 있으시다. 언제나 오시면 8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를 손수 돌보신다고 밝히신다.  처음 발령받아 왔던 작년 여름 치매 걸린 아내를 차에 태우고 와서 내게 인사를 시켰다. 건강 상태는 아주 좋아 보이셨고 얌전하고 예의 바른 예쁜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 남편이신 아버님은 웃거나 가벼운 농담조차 절대로 하지 않으시고 잘 부탁한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넌 무조건 나에게 잘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경고가 담겨 있다고 느꼈었다. 정신없이 4 가구를 방문하고 나오니 부쩍 짧아진 가을 햇살은 벌써 교동도 화개산 꼭대기에 베일을 드리우고 아름다운 빛을 자랑하는 중이었다.

저녁 노을은 매일 다른 모습 다른 빛깔 그리고 슬프도록 너무나 빠르게 알 수 없는 너머로 가라앉아 버린다.


  

추수가 한창인 벌판 너머로 화려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은 잠시 내게 멈추어 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차를 세웠다. 그 아름다운 붉은색(황금색이 섞인)의 향연은 나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한 듯 아주 천천히 깔때기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고 있었다. 공연히 마음이 묵직해진다. 눈시울도 살짝 뜨겁다. 저 노을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너그럽고 자애롭게 옷자락을 펼쳐 보인다.


 30년 공직 생활 동안 민원을 적잖게 먹었다.(민원은 왜 먹는다고 표현하는 걸까) 지금은 법이 바뀌었지만 십수 년 전까지는 진료소장들이 진료소 관사에서 거주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결혼 후 아기를 낳고 출산 휴가 중엔 '애 낳으러 가서 오지도 않는다.'라고 했고, 폭염 중 휴일에 쉬는 날엔 '반바지를 입었다.'라고, '갈 때마다 매 번 자릴 비우고 없다.'는 민원이 제일 많았다. 없는 날보다 있는 날이 더 많았지만 1인 사업소이니 출장을 나가면 아무도 없는 것이 가장 취약한 핸디캡이었다. 의료법에 어긋나는 영양 수액제를 사 오셔서 놓아 달라던가, 무턱대고 항생제를 처방해 달라는 분들은 '진료 거부를 한다'라고 민원을 넣었다. 섬에 근무할 땐 '매주 주말마다 집에 나간다'는 것이 불만이었고 오늘처럼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지 않으면 불친절하다고 민원이 들어갔다. 귀가 어두우시고 인지장애가 있는 어떤 어머니에게 '이 약 드시고 안 나으시면 여기 오지 마시고 병원 가서 검사해 보셔야 한다'라고 했다가 '나보고 진료소 오지 말고 병원으로 가라고 하니 나는 이제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하나'라고 아들에게 울면서 전화를 하셔서 그 아들이 '노인네에게 오지 말라고 큰소리로 악을 썼다'라고 민원을 넣은 적도 있었다.


 몇 년 전 콜센터 직원들에 대해 처음 '감정 노동자'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을 때 깊이 공감했었다. 직명이 소장님이면 뭐하겠노, 나 역시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무원의 의무와 책임을 숙지하고 있더라도 누군가에게 생각지도 않다가 근본없이 비난받으면서 뒤통수를 맞는다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게다가 그것이 오늘처럼 직접 찾아와서 따지면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보건소 행정팀으로부터 '민원이 들어 와서요~'하고 전화를 받으면 가슴이 콱 막힌다. 수치스럽다.

"난 진짜 억울하다고......"

저녁노을을 향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보니 기분 별로다. 속 없는 자처럼 너스레 떨며 아버님 한 번 오시면 커피도 타드리고 딸처럼 잘해 보겠다고 했지만 속내는 분했다. 내 생각이 맞는지 모르지만, 사람에게 가장 몹쓸 나쁜 감정은 '억울함'이라 여겨진다. 억울함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고 스스로에 대한 사랑도 타인에 대한 신뢰도 일순간 무너지게 만든다. 오죽하면 무속 신앙의 주된 레퍼토리가 억울함을 풀어주는 '한 풀이'이겠는가. 억울한 영혼은 구천을 떠돈다고 하니 말이다. 민원은 매 번 새롭다. 영혼에 스크래치를 내고 아물었던 지나간 상처는 더듬어 보면 단단은 해도 그 아픔의 기억은 그저 덮여 있을 뿐 용암처럼 조용히 그 아래에서 끓고 있다.....

빨리 복귀해서 퇴근 준비하고 쌩하니 집으로 가야겠다. 그리고 인생 동지 남편하고 집 앞 삼겹살 집에 가서 같이 소주잔을 부딪친 다음 M네 부자가 내게 저지른 행패를 고발해야지.

'잘했어, 잘 참았어. 그런 사람들은 말 해도 소용없어. 당신이 참아야지 어쩌겠어...'  

남편은 분명 그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윤리 선생님처럼 그렇게 말하는 남편이 내 편을 들어주고 함께 그들을 비난해 주길 바라면 화를 냈다. 그러면 그제야 '때려치워!!'라고 말해서 내 화를 더 돋우곤 했다. 분노가 몇 날을 이어졌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나의 억울함을 토로하느라 시간을 할애했다.


 공자 말씀대로 불혹을 지나 지천명을 맞으니 나의 태도가 전과 다르긴 하다. 사람이 남에게 모진 말 하기는 듣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M님이 내게 모진 말을 하려고 그렇게도 분노 게이지를 올리느라 긴장하여 온몸이 뻣뻣해지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전과 달리 측은하고 딱하다. 내 감정은 내 문제고 현실은 민원인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생각이 정리된다. 두렵거나 더러워서 피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상처를 준 것은 나이니까 그 부분은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맞다. 뭐, 남편과 함께 소주 안주를 삼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만. 이런 감정의 흔들림도 이젠 쉬 피로하니 그에게 먼저 평화를 준 후 내 평화를 챙기고 싶을 뿐이다. 그것은 신앙인으로도 자식 앞에 서서 걷는 부모로도 부끄럽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저녁노을이 깊게 가라앉고 사위가 어둑해지도록 그곳에 서 있다가 복귀하였다. 오늘도 부끄럽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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