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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Apr 06. 2021

싫어하던 음식이 좋아지면 나이 드는 거다.

친정 엄마, 정월대보름, 그리고 오곡밥과 나물

 친정 엄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자꾸만 뒤로 미루고 있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조금씩 흘리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쓰지 못한 이유는 있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이다. 해마다 세계적으로 회자되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Time 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이 주목을 받곤 한다. 그러나 Time지가 해마다 빠뜨리는 1인이 있다. 바로 엄마다. 누구라도 인생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 엄마가 아닐까. 나도 그렇다. 바이든의 부통령 카말라 해리스가 누구 건 내 알 바 아니다. 타임지가 선정한 100은 사실 내 인생에서는 표도 안 나게 미미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엄마는 어디 그런가.


 지난 주일 모처럼 딸아이들과 함께 친정을 찾았다. 언제라도 기꺼이 어린 두 딸아이를 맡아주신 분이시다. 당연히 아이들도 그런 할머니에 대해 애정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 날은 유독 반기시며 '얘, 둘째야, 너 이리 와서 앉아 봐라'하시며 내게 당신의 옆자리를 내주신다. 

"내가 요즘 잠은 안 오고 누워서 니들 기르던 때 생각을 많이 하는데 둘째 네가 참 착하게 컸더라. 심부름 도맡아 하고 그저 혼나고 매 맞아도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는 건 너 하나였어. 네가 제일 똑똑하게 틀림없이 심부름을 잘하니 나는 항상 네 이름만 불렀다. 그래도 한 번 싫어요 소리 안 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다 했지. 생각해 보니 네가 참 착하게 컸더라....."

올해로 81 세지만 본인은 호적상 78세라고 굳이 우기시는 엄마는, 자신이 하는 말이 딸인 내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나를 곁에 앉혀 놓고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셨다. 당황한 나는 가슴이 벅차 먹먹하고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그랬지.... 중학생 언니가 있었어도 난이도에 상관없이 심부름은 모두 내 차지였다. 마음속으로 '엄마는 왜 맨날 나만 시켜....'라고 불만도 품긴 했었지만 호랑이 같은 엄마가 무서워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게다가 엄마는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느라 너무 힘들어 보였다. 아버지는 직장에 출근과 퇴근을 하시는 외에 깔끔하고 예민하셨으며 집에서 조금이라도 힘든 일을 하시고 나면 반드시 몸살이 나는 약골이었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는 여자가 하는 모든 일 외에도 남자가 하는 삽질, 지게를 지는 일, 닭장을 짓는 일, 마당에 시멘트를 바르는 일 등등까지 모두가 엄마가 하시는 일이었다. 엄마가 혼자서 너무나 많은 일을 하시니 집안일이나 심부름 정도 하는 것으로 불만을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 엄마에게 아버지는 항상 '무식하고 배짱만 좋은 여편네'라고 대놓고 자식들 앞에서 무시하셨고 그런 아버지에 대한 다섯 남매의 원망과 분노는 한겨울 눈처럼 시나브로 쌓인 위에 또 쌓여 세월과 함께 혐오의 빙산으로 단단하게 얼어 말년 아버지는 자식들의 외면과 냉담으로 참으로 고독하셨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심부름만이 아니었다. 엄마에게 나는 매도 많이 많았다. 유독 내가 많이 맞았다고 나는 기억한다. 다 같이 잘못을 저질러도 큰 애는 크다고 안 때리고 동생들은 어리다고 안 맞고 둘째인 나는 덕분에 5남매의 매 받이였다. 힘이 좋은 엄마의 매는 가혹하고 위력적이고 특히 사회적 수치를 동반했다. 비밀이 없는 시골 마을에서는 아이가 된통 매를 맞은 것이 동네 뉴스였기 때문에 매를 맞은 다음 날 학교에 가면 '너 어제 매 맞았지?'하고 친구가 놀리곤 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영리한 데다가 자존심이 강했던 나는 다리에 든 멍보다 친구들의 놀림이 더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지금 시대는 그랬다간 당장 경찰이 출동할 폭력 사건이지만, 그 시절은 자녀 교육=회초리였고 학교에 보내는 가정통신문에, '때려서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쓰던 시절이었다. 말 안 듣는 아이는 매로 다스리고 잘못을 저지른 아이는 매로 정신이 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정교육의 불문율이었다. 권위와 강제가 버젓이 횡행하고, 인권의 유린이 범죄로 인식되지 않던 시절에 나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 사회의 현상은 가정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니 돌이켜 보면 맷집이 좋아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고 정서적 장애를 갖지 않고 바로 자란 나 스스로가 장하다. 


 호랑이 사단장 친정어머니는 특히 오곡밥을 지금도 좋아하신다. 정월 대보름을 앞둔 일주일 전부터 이름도 알 수 없게 바짝 마른 나물들이 물을 채운 이 그릇 저 그릇에 담기고 전날 씻어서 불린, 그 또한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 잡곡들이 찹쌀과 섞여 면포를 깐 커다란 찜솥에 담긴다. 엄마는 추운 부엌에 온종일 머물며 소금물을 훌훌 뿌려가며 오곡밥을 쪄놓으신 후 그걸 두고두고 내내 몇 끼를 드셨다. 어릴 때는 왜 잡곡이 그렇게도 싫은지, 콩도 싫고 팥도 싫고 닭 모이 같은 좁쌀도 싫고 질척하고 찐득한 찰밥도 싫었다. 그걸 엄마는 우리들에게 강제로 먹게 했고 싫었지만 굶을 수는 없어서 그 찝찔한 오곡밥을 최소 두어 끼니는 먹어야 하는 것이  곤욕이었다. 게다가 쿰쿰한 나물 반찬은 더 싫었다. 도대체 마른 낙엽 같은 그걸 왜 먹는지 알 수 없었다. 대보름 날 아침엔 아직 눈도 못 뜨는 우리들을 억지로 깨우시면서 밤이며 호두를 깨물라고 주셨다. 그래야 일 년 내 부스럼에 안 걸린다고. 떨떠름한 밤과 호두의 속껍질 맛에 대한 기억 때문에 견과류를 아직도 즐길 수 없다. 그렇게 엄마의 슬하를 떠날 때까지 해마다 반복된 정월 대보름의 그 찝찔하고 찐득찐득한 오곡밥과 마른풀을 씹는 것 같은 쿰쿰한 나물의 기억이 내 뼈에 새겨진 줄 나는 몰랐다. 


 친정 엄마는 6년 전 아버지의 별세로 얻은 해방의 자유를 채 일 년도 누려 보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거동불편자가 되었다. 아니 실은 그전부터 가지고 있던 지병이 드러났다. 척추는 무너지고 연골은 닳아 흔적도 없었으며 터진 폐는 수술로 일부 복구되었지만 25%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할머니, 그동안 안 아프셨어요? 이 정도면 진짜 많이 아프셨을 텐데...."

엄마를 수술한 흉부외과 교수도, 엄마를 진료한 정형외과 교수도 고개를 갸웃거릴 엄마의 몸 상태를 우리 5남매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를 위해 긴 세월 온몸의 뼈와 살을 녹여내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호흡기에 치명적인 질병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느 날 문득 엄마의 심장이 멈춘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헌신과 희생 그걸 위해 여성성을 버린 엄마의 몸은 그렇게 어미 거미처럼 껍질만 남아 그네 타고 있었던 것이다. 


 친정엄마의 전에 없는 고해성사와도 같은 그 옛 일에 대한 화해의 한 마디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를 운전하면서 내내 울었다. 두 딸아이는 뭘 안다고 덩달아 나를 따라 눈물을 흘렸다. 81세 엄마의 성찰이 하나씩 하나씩 화해로 이어지고 이제 돌아가신 아버지와만 화해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나를 울게 만들었다. 사실 엄마에게로 향했던 아주 오래된 나의 원망과 분노 그리고 트라우마는 이미 내가 부모 되고 나서 충분히 이해하게 된 지나간 역사였다. 그 오래전 엄마가 했던 말과 행동들, 나에게 상처가 되어 가슴에 깊이 박혀 묻혔던 그 돌들은 꽃으로 피어나 나를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디딤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같은 여자 어른 엄마는 절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엄마와는 다른 엄마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였었다. 


 올해 초 정월 대보름이 생각났다. 설 명절에 다리를 살짝 다쳤었다. 참고 기다려도 도무지 나을 기미가 없어 결국 정형외과에 가서 x-레이를 찍고, MRI도 찍고, 물리치료도 받았다. 병원에 가면 멀쩡한 사람도 환자가 된다고 공연히 진짜 환자가 된 듯 더 아픈 것도 같고 맘도 꿀꿀한데, 아침을 걸러 허기진 배에 갑자기 오곡밥과  나물 생각이 간절했다. 알 수 없는 열망에 이끌려 병원에서 나오는 길, 차가 자동으로 마트로 향했고 결국 상자 가득 장을 봐다가 다리를 절뚝이며 찹쌀을 씻어 담그고 팥을 삶고 콩을 불리고 수수와 조를 씻어 담가 압력 밥솥에 앉혔다. 밥이 되는 동안 온종일 아픈 다리로 절뚝이며 이름을 몰랐던 온갖 나물을 볶아대는 나 자신이 영락없는 그 어린 때의 우리 엄마랑 똑같았다. 추운 부엌에서 온종일 서성이며 산더미 같은 오곡밥을 쪄내고 나물들을 볶아내던 엄마. 심지어 딸들도 남편도 싫어하는 오곡밥과 나물을 나 혼자 먹겠다고 온 동네 사람 다 먹일 정도로 많이 많이 하는 나는 우리 엄마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엄마였다.


 그렇게 그날의 첫 끼니를 오후 4시에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내가 했는데 내가 먹으면서 맛있었다. 싫어도 뼈에 새겨진 그 음식의 맛이 내 손에서 재현되다니.......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게 맛있게 먹고 나니 기운도 나고 기분도 났다. 

'이런 것을 바로 소울푸드라고 하는 모양이로구나. 몸과 마음에 힘을 주고 위로가 되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나 때문에 아이들도 남편도 억지로 한 그릇씩 먹어주었다. 심지어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부럼 깨물어야 한다고 자는 아이들을 깨울 궁리까지 하는 내가 영락없이 우리 엄마였다.


 엄마와는 다른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정하고 상냥하며 합리적이고 공정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다. 무조건 야단치고 윽박지르지 않고 대화로 납득시키는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우리 엄마 같은 엄마이다. 방법과 수단이야 다르지만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며 남편의 맘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혼자 감수하는 자세는 똑같다. 결국 나이가 들고 보니 싫어하던 오곡밥과 나물 반찬을 깜짝 놀라게 좋아하는 나를 발견한 후 나는 우리 엄마 닮았다고 그냥 말해 버린다. 딸이 그 엄마를 닮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싫어하던 음식이 좋아지면 어른 된 거라더니 싫어하여 닮지 않으려던 엄마의 식성까지 모두 내가 결국 닮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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