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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Apr 09. 2021

은퇴한 남편, 세상에서 가장 극한 직업

남편들은 몇 살까지 혼나야 하나요?

 "할머니, 남편들은 몇 살까지 혼나야 하나요?"

"뭘 몇 살까지야?! 죽을! 때까지 혼나야지!"

 

 몇 년 전 계절 독감 접종을 할 때 일이다. 각 면 별로 접종을 시작하면 첫날과 첫 주에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린다. 하필 독감은 매년 10월 초에 접종을 시작하고 농촌은 추수를 시작하는 시기라 바쁜 시간을 피해 아침 일찍 접종을 받으려는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 '줄 서세요!' 하면 줄이 열 줄이 되기도 하는 그런 날은 면사무소 소속 공익근무요원들의 협조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바쁘다. 의사의 예진을 받은 후 내게 오면 나는 접종을 해주는 역할인데 부부가 함께 접종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도 적잖다. 그 해는 접종을 하던 중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부부가 나란히 동반 접종을 받는 경우 대부분의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혼나는 것이다. 아내는 핀잔을 주고 남편은 그저 묵묵히 그걸 받아낸다. 혼나는 내용은 주로 이렇다.

"내가 아침에 갈아입으라고 꺼내 준 옷을 왜 갈아입지 않았어욧??!!"


 접종은 상완 삼각근에 근육주사를 하니 어깨가 나와야 한다. 아내들은 접종이 편하도록 앞부분에 단추가 달린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남편에게 미리 옷을 꺼내 주지만 남편들은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입던 옷 그대로 무심하게 오곤 한다. 막상 접종 대기 줄이 밖으로까지 길게 나 있는 상황에서 옷을 죄다 벗느라 허둥대는 남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아내들의 그 독수리 같은 눈빛이 관전 포인트다. 그렇게 60대 부부도, 70대 부부도 비슷한 이유로 비슷하게 아내들에게 혼이 나는데 마침 90에 가까운 80대 노부부가 내 앞에 나란히 오셨다. 10월 초지만 할아버지는 벌써 삼중 보온메리 위에 터틀넥 니트까지 입고 계셨다. 어깨를 내놓으려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다가 결국 옷을 벗으실 수밖에 없었고 나무늘보처럼 아주 천천히 옷을 벗으시는 할아버지를 향한 할머니의 눈초리와 중얼거림은 분명 온갖 비난과 욕설이 섞여 따가웠다. '뒤로 줄 서 있는 걸 봐라, 내가 아침에 갈아입으라고 준 옷은 왜 안 입고 왔냐'며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린 채 '왜 안 죽냐'고도하셨다. 나는 괜찮다는 눈짓을 하며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할머니,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몇 살까지 혼나야 하나요?"

오시는 모든 세대별 남편들이 죄다 혼나는 것을 본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할머니는 지체 없이 단호하게 외치셨다.

"죽을! 때까지 혼나야지 뭘!"

나뿐만 아니라 근처에 줄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단 한 사람 할아버지만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집중하며 옷을 벗고 계셨다. 그날 내가 남편에게 그 일화를 들려주었고 그 이후로 남편은, '여보 남자들은 몇 살까지 혼나야 해?'라고 물으면 '죽을 때까지'라고 자동응답을 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나의 남편이 이 글을 본다면 분명 비웃으며 자신도 똑같이 순위를 매길 궁리를 하겠지만, 대충 아내들의 바람을 기준으로 내 맘대로 남편 순위를 나누어 본다면 이렇다. 즉, '최하-저상-중중-중상-상상-최상'으로 나누어 보겠다. '최하'는 거론의 가치가 없는 양*치이니 빼고, '최상'도 존재하지 않는 꿈속의 남편상이니 빼자. 보통은 이혼하기엔 또 딱히 법적 사유는 없는 '저상'과 잘하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지만 출근 잘하고 최소한 시키는 것 정도는 마지못해 하는 현실 남편을 '중중'이라 하고 그들에게는 평생 기회를 주어 본다. 대신 그들은 아내들에게 늘 혼난다. '상상'이라면 그저 방송에서 보이는 최수종 씨 정도일까? 하희라 씨에게 직접 물어보진 못했다. 나의 남편은 '중상'이다. 조금 야박할 수 있으나 냉철한 기준을 적용하였다. 내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전생에 나라를 구한 여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남편의 나를 향한 한결같이 변함없는 우정과 신뢰 때문이다. 나에게 최대한 맞춰 주려는 자세를 가진 남자라야 '중상'은 받는다.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니 자극받지는 말지어다.     

 

 생각해 보면 '중상'정도 순위인 나의 남편도 내게 적잖게 혼난다. 혼난다는 표현이 좀 죄송하지만 잘 나가다가 한 번씩 혼날 짓을 한다. 분유를 먹고 트림을 하다가 토하는 아기를 두 손에 든 채 시선은 야구 중계에 고정되어 있다거나, 39도 고열이 나고 아파 못 일어나는 아내와 기어 다니는 아기를 두고 후배 결혼식에 간다고 양복을 차려 입고 나서려고 하는 등의 일로 혼나며 나이 들었다. 그렇게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혼나는 주원인 중 하나는 '눈치가 없어서'다. 내 남편을 포함하여 대부분 남자들이 눈치가 없는 편이다. 절에 가서 새우젓을 얻어먹긴커녕 절에 새우젓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편이다.  


남자들이 아내에게 혼나는 두 번째 이유는 '자기 아내보다 남의 아내를 아끼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만나는 촌부들이 진료소에 와서 분통을 터뜨리며 낵  자기 남편을 고발하곤 한다. '감자 심게 관리기로 밭을 갈고 고랑을 쳐 달라'거나 '고추밭에 같이 비닐 씌우게 오늘 어디 나가지 마라'는 아내의 지시사항을 무시하고 나가서 겨우 이웃집 아주머니 밭을 갈아주거나 이웃집 고추밭에 비닐 씌우는데 그걸 잡아주고 있다. '자네는 혼자서도 잘하잖아?' 하는 말로 아내들을 더 화나게 하는 남편들은 그래서 늘 혼난다. 제 아내보다 직장 동료나 친구들에게 우선이며 헌신적이다.


  세 번째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시어머니 편을 들기 때문'이다. 남편 본인에게 모든 편의시설을 제공하고 끼니와 생계를 잇게 해주는 존재가 누구인지 늘 인식한다면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지혜롭게 판단하고 공정하게 처신해야 하는데 남편들은 그게 잘 안돼서 혼난다. 떡국에 만두를 넣었다고 '나는 떡국 다오'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나도 떡국 줘'하는 만두를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는 남편은 당연히 혼날 수밖에 없다. 대충 짚어 본 이런저런 이유들은 남편들이 평생 동안 고치려고도 하지 않고 고쳐지기도 어려운 그래서 '죽을 때까지 혼나야 하는 이유'이다. 그냥 웃어야 한다.


 직업 군인이었던 남편은 짧게는 일 년, 길게는 6년 간 집에서 떨어진 복무지에서 주말 가족을 감수하며 30년 군 생활을 명예퇴직으로 마쳤다. 직업군인과 결혼한 나 역시 긴 군 생활과 주말 가족생활이 고달팠겠지만 반면에 시의적절한 주말 가족생활 덕분에 결혼생활의 권태기는 대충 있는 듯 없는 듯 잘 넘어갔다. 남편은 경상도 사람이면서 막내면서 군 간부 출신이었다. 어머니가 주선하셨던 여성과 맞선이 성사되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텐데 라는 안타까운 상상을 가끔 한다. 큰 시숙이나 둘째 시숙처럼 아내에게, '야야, 자야, 니는~'이라고 불러도 되고, '물 가와라'해도 되고, 퇴근과 동시에 '밥 도!'라고 말해도 되었을 텐데. '니는 쫌 가마이 쒀!'라고 호통을 쳐도, '고마 해!' 하면 얼른 입을 다무는 아내가 있었다면 '어데 여자가 남편을 혼을 내노? 부엌에는 마 들어가지 않게 해래이'하시는 시어머님의 뜻을 받들고 살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남편은 하필 수도권의 전문 직업여성이며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게다가 글 쓰는 '말발이 보통 이상'인 여자와 결혼을 하는 바람에 참 많이도 혼나며 살아왔다. 가끔 그런 류의 이야기가 나오면 막내답게 '내가 마 서러버서'하며 훌쩍거려 좌중을 웃음 터지게 만든다.


 지금은 은퇴한 지 6년이 되어 가는 남편의 사연은 이러하다.  명예퇴직 신청이 받아들여져 제대를 결정했을 때, 계획은 그랬다. 유급 휴가 3개월 간 탑차를 캠핑카로 개조한 뒤 1년 간 전국의 가톨릭 성지를 순례하며 사진도 찍고 기록도 하고 유람도 하겠다고 했다. 나는 물론 30년 군 생활의 특별한 선물이니 당연히 하고 싶은 거 다 하셔도 된다고 했고 30년 이상 복무하고 전역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헬기 타고 울릉도 2박 3일 여행하는 특별 휴가 날을 받아 놓고 친정 엄마의 교통사고로 여행은 취소, 그렇게 병원을 드나들며 2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친정엄마가 중환자실을 세 번이나 들어가시는 바람에 단 한순간도 소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2개월을 보내고 본당 신부님께서 갑자기 생각 지도 않은 추천을 하시는 바람에 더 뭘 할 궁리도 해보지 못하고 인근 성당의 사무장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그렇게 집에서 빈 둥 거리지 않기, 수입과 상관없이 딸아이들 결혼할 때까지는 옷 차려입고 출근하는 직장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조건을 맞추는 것으로 남편의 은퇴 생활은 시작되었다. 남들은 연금 수급자이면서 사무장으로 재취업에도 성공하고, 취미로 배우던 원목가구 공방에서 정식으로 일을 맡아 돈도 버니 얼마나 좋으냐고 부러워한다. 은퇴를 앞둔 우리 또래의 주변인들에게 성공 사례이자 자극제 역할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만족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본인의 계획이 뜻대로 가지 못할 변수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변수는 바로 아내이다. '나' 말이다. 갱년기를 맞아 나잇값 하느라 변덕스럽고 체력이 달려 쩔쩔매며 선별 진료소 검채업무가 보태져 하루하루가 고단한 나는 결국 결혼 25주년 기념일이던 이태 전 그날 아침에 울면서 출근했다.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나는 실은 내 문제에 몰두하느라 남편도 힘들고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25년 동안 최선을 다해 당신 맘 상하지 않게 하고 싶었던 나는, 결국 시어머니를 포한한 남편의 가족들을 더 이상 좋은 마음으로 대할 자신이 없다고 두 손을 들고 선언했다. 당연히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으니 남자도 겪는다는 갱년기가 남편에게도 왔다. 집에 오면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어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고, 출근하면 녹록지 않은 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해야지, 원목가구 만드는 공방에서 종일 붙어 있는 공방장은 거의 일간베스트 수준이지..... 참아내기 버거운 세상의 모든 관계들은, 상하가 확실하고 명령에 의해 칼 같이 움직이는 군 생활에서는 겪을 일 없었던 새롭고 힘든 문제들이었다. 그렇게 남편의 은퇴 생활은 빛을 바라가고 그는 점점 말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피해자인 나만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런 내게 남편은 본의 아니게 가해자 중 하나였으므로 그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두어 해 전 갑자기 남편이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시어머니 생신이었고 다른 일로 피치 못해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했더니 그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시어머니는 내게 많이 노여워하셨지만 남편이 내 편을 들어주니 어머니의 '일 년에 한 번뿐인 시에미 생일인데 안 오마 되나 안 되나, 되나 안 되나 말해 봐라! 주변을 돌아보래이, 나 같은 시에미 없대이'하는 공격이 힘을 잃었다. 더 이상 내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못한 채 넘어갔다. 그렇게 나는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연가를 내고 시댁에 가거나, 명절에 가서도 어머니 집이 아닌 모텔에 가서 남편과 자고 다음 날 새벽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역정을 내셨지만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대답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안 내려가면 좌불안석 불편하던 것이, 내키지 않으면 안 가고 안 보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남편은 은퇴 3년 만에 달라졌다. 군대 시간을 기준으로 삼시 세 끼를 반드시 먹어야 하던 남편은 출근하는 아내를 위해 간편식을 스스로 챙겨 먹기 시작했고, 저녁에 퇴근한 아내가 약 삼십 분 정도 휴식을 가질 수 있도록 작업실에서 한 시간 정도를 일하다고 들어온다. 군대 시간에 밥을 먹지 않으면 몹시 예민해지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청소와 분리 배출을 포함한 가사들을 분담하는 기준은 남자 할 일, 여자 할 일이 아니라 더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음식은 내가  잘하고 청소는 남편이 잘한다.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던 그가 친구의 텃밭 한편을 얻어 중고 컨테이너에 작업실을 꾸며 마련하는 것을 통해 공방장과의 시간을 최소화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서히 아내인 나의 마음이 평정을 찾게 되자 남편도 덩달아 안정되어 갔다. 그런 어느 날 친구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자신이 겪었던 지난 그 힘겨웠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도무지 노답이라, 잠이 안 오더라고. 집에 오면 아내는 맨날 우울하고 있지, 출근하면 갑질이지, 공방 가면 일베가 하는 헛소리 하루 종일 들어야지, 미치겠더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결국은 시간당 십만 원 하는 심리 상담을 받았지."

놀랐다. 남편이 그 정도로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었구나. 나는 미처 그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도 못할 정도로 스스로의 고통과 연민으로 마음이 바늘 끝 같이 뾰족하기만 했었구나.....

"상담해주신 교수님께서 처음엔 내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시더라고, 그러더니 다음에는 집 사람에 대해 묻더라고. 다음엔 처가 부모님이랑 처 가족들에 대해서 물으시더니 하신다는 말이, '아내분 많이 힘드셨겠네요, 아내분에게 잘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데 황당하더라고. 나는 내 문제 때문에 힘들어서 상담을 하는 건데 아내에게 잘하라니,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아내에게는 나름 잘하는 편인데 뭘 더 잘해야 하느냐고. 그랬더니 교수님 왈, '아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라'는 거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더라고......"


 그랬다. 그는 스스로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문가에게 묻고 그 전문가가 이르는 대로 실천을 했다. 긴 세월 내가 해결하지 못했던 나의 문제를 풀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남편 자신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남편은 그렇게도 눈치가 없다. 하지만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고 해결 방법을 조언받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내 남편은 '중상'은 된다. 남편은 '모든 가정 문제의 70%는 남자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그는 '눈치 박치'인 대신 혼날 때 '알겠어, 내가 성찰해 볼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현직에서 사회와 조직 생활을 잘 해내기 위해 대부분의 에너지를 집중해야 했을 때는 아내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내 가족보다는 사회와 조직에서 만나는 동료와 타인을 배려해야 하는 피치 못할 경우가 많았다. 그 긴 세월, 그렇게 길들여진 남편은 은퇴와 함께 새로운 입장에 적응해야 하는 자연인의 자세를 배우느라 많이 혼나야 했다. 그런 남편의 진심이 느껴졌던 어느 날 내가 그랬다.

"남자들은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해. 혼나도 그저 묵묵히 입 다물고 혼나는 거 보면."

남편이 대답했다.

"남자들이 혼날 때 왜 할 말이 없겠냐? 그저 말해봐야 더 화만 돋우고 그러면 잔소리가 더 길어지니까 그냥 입 다물고 마는 거지. 여자들은 뭐 혼날 거 없는 줄 알아? 그래도 왜 남자들이 입 다무는지 아니? 여자들은 말로 푼다며? 여자한테는 말발이 달리는 걸 어쩌냐?"

 남편이라는 그 극한 직업을 낙오 없이 잘할 수 있는 비결이 그저 입 다물고 지나가기 바라고 있는 거라고? 그냥 같이 웃어야겠다.


 어쨌든 나의 은퇴한 남편은 출근하는 아내 대신 택배도 받고 쓰레기도 버리고 깜박하고 놓고 온 휴대폰도 가져다주거나 곰국을 끓이다가 불을 끄지 않은 나 대신 재빨리 달려가서 가스 불을 끄는 모든 일을 날쌘돌이처럼 해내면서 세상 가장 극한 직업, 은퇴한 남편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 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고단하지만 내색 않는 나의 남편에게 지난 연말에 '감사패'를 만들어 드렸다. 비록 종이 한 장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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