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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Apr 06. 2021

슬기로운 노인 생활

집에만 있고 싶고 밖에 나가기 싫으십니까?

  '저는 K 씨 아들입니다. 혹시 저희 어머니께 소장님이 치매 걸렸다고 하셨나요?'


 출장을 나가는 길이었다. 엊그제 오셔서 치매인지 선별검사를 받으셨던 K 씨 아들의 전화에 급하게 갓길에 차를 세웠다. 화가 잔뜩 깃든 음성에 일단 말문이 막혔지만 최대한 편안하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드님이시군요? 어머님께서 그렇게 전화를 하셔서 많이 놀라셨겠어요."

'네, 어제도 하시고 오늘도 또 하셨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글을 모르셔서 그렇지 치매는 아닐 텐데요!'


 K 씨는 문맹이다. 자신의 이름을 가까스로 그리는 정도이고 간단한 읽기와 쓰기가 어렵다. 믈론 K 씨는 치매가 아니다. 하지만 치매와 선별하기 위해 동시에 하는 노인 우울척도검사(SGDS-K)에서 상담이 필요한 심한 우울로 나왔다. 치매는 아닌데 우울증이 좀 있으신 모양이라고 했더니 '내가 그럴 일이 있다'며 이런저런 일상을 하소연하셨다. 군에서 운영 중인 정신건강센터에 의뢰해 다시 검사와 상담을 받게 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혹시 몰라 아들 전화번호를 받아 두었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간 K 씨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셨던 모양이다.


 K 씨 아들에게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느라 한참 통화를 하고 나니 출장길이 여간 고단하지 않다. 이런 비슷한 일로 민원도 많이 먹었다. 사실 유무를 확인하지 않고 부모님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노여운 자녀들이 민원을 제기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렇게 내게 직접 전화를 하시는 자녀들은 감사할 지경이다. 내 말도 좀 들어 보면 좋으련만 곧바로 군청이나 시청, 군 보건소로 전화를 해대는 분들이 허다하다. 봄 시새우는 바람이 쌩쌩 불어서 내 마음이 더욱 춥다.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며 왕소군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소군원'이라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양지바른 야산에는 벌써 진달래가 만개하고 거리마다 화사한 벚꽃이며 새파란 쑥도 냉이도 돋는데,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노인으로 가득한 이 시골의 봄바람에는 미처 떠나지 못한 겨울이 섞여 흐른다. 꽃이 피어도 새가 울어도 좋은 줄 모르고 그저 무심하게 당연한 것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로 가득한 메마른 곳이 시골이다.


 3월부터 지금까지 틈틈이 약 40명 넘게 치매인 지선별 검사를 했다. 검사를 하고 나면 '국가 치매 안심 통합 시스템'에 등록을 하는 것까지가 내가 할 일이다. 하루 서너 명 씩 검사를 하고 퇴근 직 전 사이트에 입력을 하며 그날 검사를 받던 어르신들에 대해 되감기를 한다. 40명 중 인지저하가 열 명이 넘는다. 노인 우울척도 검사를 하면 '자신이 헛되이 살고 있다'라고 응답하시는 분들이 절반 이상이다. 테스트 문항을 이해 못해 어렵다며 '소장님이 알아서 그냥 쓰라고' 화를 내시는 분도 있다. 물론 고령자에 단순한 생활을 하시는 분 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지만 평소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생활하시는 분 중에도 초기 치매이신 분이 있다. '귀찮아서 안 쓴다'면서 진료소에 오실 때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오시던 노인회장님이 사실은 초기 치매였다는 것은 새삼 놀랄 일이었다. 대나무밭에 땅을 파고 혼자 속삭여야 하는 말이지만, 시골 마을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비루하다. 그저 서너 명의 60대들이 농사를 짓느라 트랙터를 몰며 다닐 뿐 그나마 60대 여성들은 요양보호사가 되어 집에 없고, 텃밭에 엎드려 비닐을 씌우고 감자를 심고 마늘밭을 매는 사람들은 80이 넘은 꼬부랑 할머니들 뿐이다.    


 단순하고 무료한 시골의 노인 생활은 그리 신경을 쓰고 생각을 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가능하다. 골치 아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상당수가 은퇴하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시골에 내려가 예쁜 집을 마련하여 텃밭 일구고 유유자적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소원한다. 80살이 넘어서 공기 좋은 시골로 이사를 오신 어르신들은 예쁜 집을 제대로 관리 조차 하지 못하고 병원이 멀어서 건강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한 달에 한 번 내려오는 자녀들이 타오는 약에만 의존하며 병고에 힘겨워한다. 우울검사 문항에 있는 '현재 살아있다는 것이 즐겁게 생각'되기에는 생활이 지루하고 활동량과 의욕이 나지 않는 생활이 이어진다.


 놓지 못한 욕심과 버리지 못한 분노와 미움에 매달려 꽃이 피어도 밖에 나가기 싫고 집안에 앉아 텔레비전만 응시하는 멍한 노인들을 많이 본다. 버스 한 번 타려면 한 시간 이상씩 기다려야 하고 왜 버스는 우리 집 앞에서 서지 않느냐면서 화를 내는 귀촌인을 본다. 실은 복잡하고 빠르게 흐르는 도시의 시간에 질려 느리게 살겠다고 시골에 내려온 본래의 마음은 잃어버렸다.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다고 무시하는 거냐며 화를 내시는 분을 본다. 무거웠던 도시에서의 부담스러운 일상을 모두 내던지고 자연인으로 살기 위해 시골로 내려와 땅의 정직함에 보람을 갖겠다고 했었지 않을까. 본인이 전직 고위 공직자 출신이건 전문 직업인 출신이건 나이가 80세가 넘으면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 심지어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귀촌 5년 만에 스트레스로 바뀌었다는 분들도 있다.


 60살까지는 아무렇게나 막 바쁘게 열심히 살고 60살 넘어 은퇴를 하고 나면 우아하게 유유자적하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 많다. 그러나 20대에 우아하고 30대에 우아하고 40대에 우아하고 50대에 우아하지 않으면 60대에도 우아하지 못한다. 20대에 공정과 정의, 선의와 배려, 희생과 공동선들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그 길을 온전히 걷기 쉽다. 그런 이들은 거친 길 걷는 것이 수월하다. 마음에 그런 씨앗을 품은 사람들은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서 싹을 틔우고 줄기를 굵히고 잎을 무성히 내어 커다란 나무로 자라 우아한 삶의 정착지에 깊이 뿌리내린다. 그리고 그 나무에 슬기의 열매가 달리는 60대에 이를 수 있다면 시골 아닌 무인도에서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 나날들이 만족과 희망과 삶의 기쁨으로 매일 빛나게 될 것이리라.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입찬소리를 하는 그 얄미운 90세 할머니는 생명의 소중함도 감사함도 잊은 지 오래다. 온갖 약이란 약은 다 요구하시고 아주 소소한 증상도 참지 않으시고 당장 내게 전화를 하시거나, '바깥에 나가기 싫고 집에만 있고 싶냐'는 물음에 펄쩍 뛰며 갑갑해서 집에 한 시도 있기 싫다고 대답하시는 한 절대 죽지는 않으실 텐데 말이다.


 슬기로운 노인 생활은 60세에 은퇴와 함께 시작하지 않는다. 삶의 목표와 삶의 이유가 이기적인 '나'에 있지 않고 '우리'에 있는 슬기로운 생활은, 어머니 무릎에서 젖을 먹는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어야 한다. 세상이 나를 위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배달원은 공부를 못해서 갖는 직업이 절대 아니라거나  아프리카 남수단의 소년이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부터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배워 깨달아 크는 슬기로운 어린이가, 한 달 이만 원의 후원을 하고 배달원들을  위해 시원한 물을 현관에 준비해 놓는 어른으로 자란다면. 또는 늙었지만 시간이 남아도니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고 양보를 하거나 긍정의 덕담으로 젊은이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노인이 될 수 있다면 슬기로운 사람은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즐겁고 비록 몸이 불편하고 아픈 데도 여기저기 있지만 괴롭고 화나지만 나이 들면 의례 오는 노화의 현상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대처하며 남의 처지와 비교하지 말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노인이 사는 삶. 슬기로운 노인 생활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런 비슷한 분 있다. 우리 친정집 안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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