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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Mar 22. 2021

그들은 어부였다.

나도 어부였다.

 그들은 어부였다........(마태오 4,18)

 나는 가톨릭 신자이다. 신앙은 나에게 매일 스스로를 돌아볼 터를 내어 준다. 신앙은 나에게 세상을 사랑할 이유를 기억하게 해 준다. 신앙은 나에게 잃지 않는 희망을 보여준다. 어쨌든 오늘은 종교 이야기가 아니고 나 자신에 관한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꾸준한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비록 넘어지고 절뚝거릴 망정 이 길 위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채 남편 손도 잡고 딸아이들 손도 잡도 나란히 걸어가는 이 가톨릭 신앙이 나는 자랑스러웠다. 이십 년 넘게 이런저런 봉사를 마다하지 않고 하는 내게 '수녀 같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건 칭찬처럼 들렸다. 미사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를 영할 때 감격스럽고 행복했다. 늘 그랬다. 내 삶에서 신앙을 떼어내면 반쪽짜리 삶이었다.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제단에 꽃꽂이도 매주 했었고 미사를 위해 제대를 차리는 일을 이십 년 넘게 했고 미사 중 독서 봉독 봉사며 미사 해설도 오랫동안 했다. 사람이 없다는 단체에서 도움을 청하면 짱가처럼 어디든 달려갔다. 성인 예비신자를 위한 교리 봉사도 하고 있다. '성당 생활'의 경력이 퍽이나 화려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어부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무지렁이였다. 아무 재산이나 가진 것도 없이 어렵게 사는 어리숭한 사람이었다.


 새벽 미사를 위해 집 근처 수도원으로 한 겨울 어두운 길을 달려가는 중이었다. 겨울 해는 게으르고 차가워서 5시 반의 시골길은 눈으로 보며 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길을 감으로 가는 정도이다. 그 날은 한 치 앞에 누가 불이라도 피우는 듯 무럭무럭 피어 떠도는 안개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을 아주 느리게 가고 있었다. 두려움을 이기려고 노래를 부르며 고갯길을 올라서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불쑥 나타난 차 때문에 거의 기절이라도 할 듯 놀랐다. 누가 누구의 차선을 침범했는지 가리지도 못한 채 서로가 놀라 후다닥 비켜 가까스로 사고를 모면하며 심장이 터질 듯 뛰어 아픔 가슴을 부여잡았다.

'죽을 뻔했네........'

가까스로 운전대를 움켜 잡고 더듬거리며 수도원 마당에 도착한 나는 온몸이 바짝 긴장한 채로 후둘거리는 다리로 공중을 걷듯 황새 걸음으로 경당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이 왈칵 솟았다.

누가 내게 멋지다고 말해주고 무엇을 하든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는가. 내가 부리는 재주가 원래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부였다.
그냥 어부여서 물고기를 욕심껏 잡지 못하는 나는 늘 화가 나 있는 어부였다. 나에게서는 사 철 비린내가 나고 손은 불어 터졌고 얼굴엔 무뚝뚝한 골이 잔뜩 나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이 부르셨다. 그날은 오늘처럼 위험한 길 위도 아니었는데 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이전의 나는 죽었고 새로운 내가 태어났었다. 그분은 말씀 한 마디 만으로 내 영혼에 화관을 씌워 주셨고 반지를 끼워 주시고 금빛 옷으로 치장해 주시며 당신의 뒤를 따라오라 하셨다.

  그러니,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원래 어부였다. 그걸 잊고 함부로 입을 놀리고 함부로 판단한다. 눈물 나게 뼈저리게 나의 교만이, 나의 쾌락이 부끄럽다.


 죽을 뻔했던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원래 어부였단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 지금 지나고 있는 사십일 간의 기다림 끝에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있고 죽음이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고갯길에서 겪었던 소름 끼치는 두려운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넘는 법을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배운다. 나처럼 그냥 어부였어도 아주 쉽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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