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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18. 2021

드디어 솥과 말이 정년퇴직했다.

복수는 세월에게 맡기고 내 상처와는 스스로 이별하자.

  5~6년 전, 그녀가 넘어져서 무릎이 박살 났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잠깐이지만 놀랍고 두려웠다. 절대로 그러지 않았는데, 찰나지만 내가 그녀에게 복수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직장 동료로, 인생 선배로 K선배와 함께 한 세월이 길었지만 우리는 서로 개인적인 근황을 주고받지 않은 채 거의 십 년 가까이 '소 닭 보듯'하며 데면데면 지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병가로 나는 졸지에 그녀의 근무처에 주 2회 파견을 명령받았다. 당시 나의 근무처와 그녀의 근무처가 가장 가깝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파견 근무 첫날 그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병원에 입원한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다. 실은 관사로 들어가는 문 옆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실내등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가 아니었다면 전화를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업무용 책상 맨 아랫 서랍에 있는 개인용 USB를 봉투에 넣어서 병문안 올 때 가지고 와달라'는 그녀에게, '나 병문안 가야 해요? 나 안 갈 건데요'라고 말했다. 그녀도 나도 깜짝 놀랐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당연히 병문안을 올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심부름을 시키는 그녀가 순간 뻔뻔스럽다고 느꼈었다. '저 작년에 장딴지 파열돼서 OO병원에 3주나 입원해 있을 때 선배는 병문안 오지 않았으면서, 나는 선배 병문안 가야 해요?'라는 나의 말에, '그래, 알았어....'라고 대답하는 선배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놀라거나 화나지 않은 듯 평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곧바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한 남자가 이웃집 사나이에게 말했다.  

"솥을 좀 빌려주세요."  

그러나 사나이는 안 된다면서 거절했다.  

얼마 후 거절했던 사나이가 찾아와 말했다.  

"말을 좀 빌려주시오."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솥을 빌려주지 않았으니 나도  말을 빌려줄 수 없소."  

이것은 복수이다.  


 한 남자가 상대방 사나이에게 말했다.  

"솥을 빌려주세요."  

사나이는 안 된다며 거절했다.

얼마 후  거절했던 사나이가 찾아와 말했다.  

"말을 좀 빌려주시오."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솥을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말을 빌려 주겠소."  

이것은 미움이다.]


 그 후회의 순간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탈무드의 저 구절이 전광석화와도 같이 내 뺨을 세차게 후려치고 지나갔다. 얼얼했다. 나의 저급한 복수가 말도 할 수 없게 부끄러웠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던 초등학교 어린 시절, 정확히 4학년 어린이였던 내가 학교 도서실에서 읽은 '탈무드' 중의 내용이다. 어렸던 나는 저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긴 시간 골똘히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열한 살 어린이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가끔 '복수'나 '미움' 같은 단어를 접할 때마다 저 구절이 생각나면 한참을 깊이 곱씹곤 했지만 여전히 정확히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병문안하지 않은 사람을 똑같이 병문안하지 않는 것은, 솥을 빌려주지 않은 이에게 똑같이 말을 빌려주지 않은 유치한 복수였다. 탈무드의 저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한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 그날 밤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사실 K선배는 오래전 내게 잊히지 않을 나쁜 짓을 했었다. 그것은 진짜 나쁜 짓이었다. 나는 십 년 넘게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내가 겪었던 직장에서의 따돌림은 모르긴 해도 청소년들의 그것보다 더 가혹했다. 그들은 고상하고 세련되게 그리고 고급스럽고 교묘하게 나를 따돌렸다. 그 앞장에 K선배가 있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이던 나는 바보처럼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그들 언저리에 서성이며 내가 그들과 같은 그룹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K선배가 '총대'를 매었던 어떤 연수에서 그녀는 나를 앉혀 놓고 질타를 쏟아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나는, '기회주의자'이고 '아첨꾼'이며 재수 없는 '이중인격자'인 인간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내게, '너 천주교회 다닌다며? 천주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래도 되는 거야?'라고 했다. 부지불식 간에 당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중년의 나이에 들어야 하는 소리치곤 꽤나 치명적이었다. 뭐라고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냥 울기만 했던 나는 이 사람들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다른 선배가 그랬다. '그들과 같이 다니면서 그들과 결이 다르다. 너는 결정적으로 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혹시 그것이 이유라면 나는 그들과 함께 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친밀해야 하는 동료들에게 외면 당하여 운둔하는 시간이 내게는 힘겨운 수련과도 같았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자식들과 이웃과 신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애썼고, 한결같이 일관성 있는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마음으로 살았다. 기회주의자와 이중인격자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내가 그래 보였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아주 한참 동안 괴로웠다. 이미 왕따였던 나는 그날 이후 진짜 왕따가 되었고 거의 몇 년 동안 혼자였다. 다행히 K선배가 속한 동료 다섯 명 외의 직원들과는 한결같이 잘 지내고 인정받았다. 따돌림이 고통스러운 것은, 뭘 잘해도 뭘 못해도 언제나 반응은 싸늘하다는 것이었다. 무시와 험담과 냉대를 참으면서, '언젠가는 나라는 인간이 실은 그런 사람은 아니란 것을 그들이 알게 되는 날이 오길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그들에게 나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을 기회는 없었다. 그들의 오해는 생각보다 깊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났을 때 이웃 자치단체에서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고 그 탓으로 우리 자치단체에도 중앙 정부의 감사원에서 감사가 실시되었다. 지나간 3년 동안의 회계 감사가 이루어졌고 사소하고 미미한 것이 단 한 건도 적발이 되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감사관은 내게 '선생님 같이 정직하게 일하는 성실한 공무원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기쁘고 보람이 되었다. 그리고 K선배와 늘 함께 하던 동료 중 세 명이 감사 결과에 따라 처벌을 받았을 때 나는 '절대로' 고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더욱 다잡기는 하였었다. 그 해 직무교육에서 만난 K선배는 내게 사과했다. 고마웠고 속이 후련했다. 나에 대해 오해했다는 K선배의 사과에 마음속으로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 몇 년의 시간이 내게 준 고독과 상처와 모멸감의 상흔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쓰리고 아팠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무릎을 다쳐 큰 수술을 한 탓에 건강이 별로였던 K선배는 코로나 선별 진료소 근무를 힘겨워하며 그래도 달릴 길을 다 달리고 정년을 맞았다. 공무원 정년퇴직이란 것이 그저 조용히 정리를 하는 시간 외에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는 않다. 동료들과 주변과 사람들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내일부터 출근을 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긴 시간 군민과 조직을 위해 봉사했던 선배의 노고는 치하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어 방역 수칙을 지키며 작은 시간을 마련한 것은 나였다. 다행히 후배들은 기꺼이 함께 해주었고 꽃다발과 작은 선물을 마련하였다. 그가 몸 담았던 이곳을 기억해 주길 바라며 내가 고른 선물은 하루에도 세 번 이상 사용하는 '유기 수저' 한벌이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얇은 종이 상자에 담아 주는 것이 어쩐지 성의 없어 보여 퀼트가 취미인 내 친구에게 수저집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K선배는 예쁜 수저집에 든 유기수저를 받아 열어보며 '너무나 맘에 든다'라고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걸 보는 나도 행복했다. 비록 내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지만 나는 그에게 소소하지만 보람과 기쁨 그리고 행복한 마지막 기억을 남기게 해주고 싶었다. '솥을 빌려주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빌려주는 것은 미움'이라지만 긴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가 내게 주었던 상흔은 흐려져 다시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게 단단해졌으니 내가 미움을 품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 시간을 그녀가 잊고 있거나 여전히 돌이키면 불편할지 그것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나 시간은 나를 성장시키고 덕분에 내 상처는 단단해졌으며 그녀가 나의 삶에 다시 개입할 일은 더 이상 없다.


 비록 내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나 내 마음에도 드는 예쁜 핸드메이드 수저집에 수저를 넣어 포장을 하며 오래된 물건에 낀 푸르스름한 녹 같았던 지난 시간의 불편했던 마음을 스스로 긁어냈다. '솥'보다 더 비싸고 중요한 것은 '말'이다. 스스로 기꺼이 말을 빌려주는 나의 마음이 '미움'은 절대 아니다. 탈무드는 모른다. 솥을 빌려주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빌려주는 것은 온유이며 화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수저집을 선물함과 동시에 나 스스로 미움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는 방법으로 화해와 치유를 나 스스로에게 선물했다. 그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홀가분하고 기분 좋았다. 누구라도 사용해 본다면 알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순간에도 '달릴 길을 다 달리고' 느긋하게 집에서 쉬고 있을 K선배가 부럽고 그녀의 두 번째 인생이 근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화살기도를 쏘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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