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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23. 2021

내가 요리를 잘하게 된 이유

여보, 1식 3찬은 너무 어려워요.

 남편과 내가 결혼할 당시 남편은 직업 군인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대학 때부터 시작한 자취가 6년 차였지만 딱히 할 줄 아는 음식은 없었다. 요즘은 세상의 모든 요리를 동영상으로 배울 수 있는 콘텐츠가 넘쳐나지만 그 시절엔 결혼을 앞둔 여성들은 요리학원에 다녀 요리를 배우거나, 혼수로 요리책 세트가 필수였다. 그도 저도 안 되는 나 같은 사람들은 친정엄마 찬스를 이용해서 부단히 반찬들을 날라다 먹었다. 나 역시 음식 잘하시는 친정 엄마 찬스를 애용하다 보니, 결혼 후에도 내가 할 줄 아는 음식이라야 카레라이스나 김치찌개가 전부였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첫 출근을 하던 날, 남편 아침을 먹여 출근시킬 걱정에 잠을 설치다가 새벽 6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준비한 아침이 고작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와 김 구이가 전부였다. 남편은 2시간 동안 차린 아침상을 받고 웃음을 터뜨렸고 '원래 군인은 1식 3 찬이라 반찬은 세 가지면 딱 좋다.'라고 나를 위로했다. 마음은 매일 12첩 반상을 차리고 싶었지만 그날 이후로도 거의 일 년 동안 딱히 뭔가 음식을 했던 기억이 없다. 가까운 친정에 가서 얻어먹거나 친구들과 외식을 하는 날이 많았고 남편도 잦은 당직으로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이 별로 없었다.

이제 재료만 있으면 반찬 정도는 어렵잖게 뚝딱 만들어 낸다.

 남편은 '절대 강화도 여자랑은 결혼 안 할 것'이라 결심한 적이 있다고 했다. 강화로 명령을 받아 복무를 하면서 읍내 이런저런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었지만 입에 맞는 곳이 없어서 '강화도는 음식이 맛없는 동네'라는 인식이 생겼다. 경상도 출신 남편은 새댁인 내게 '상주 집에 가서 우리 엄마한테 두 달만 음식을 배워갖고 왔으면 좋겠다.'라고 할 정도로 내가 하는 음식이 남편의 입맛엔 맞지 않았다. 미안했지만 나는 바빴고 육아와 직장을 모두 잘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고군분투하며 허덕이느라 음식을 배울 여유는 없었다. 다행히 친정 엄마는 음식을 잘하셨고, 진료소에 내소 하시는 어르신들마다 검정 비닐봉지에 이런저런 제철 식재료들을 가져오셨는데 나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친정 엄마에게 갖다 드리면 엄마는 그걸로 반찬을 만들어 주셨고 나는 그걸 먹고 어르신들께 '주신 호박이랑 가지로 만든 반찬이 엄청 맛있었다'라고 호들갑을 떨곤 했다.  

 

시간 없을 때 급하게 할 수 있는 대표 메뉴는 마파두부 덮밥이다.

 결혼기념일마다 가까운 순교 성지를 방문하는 짧은 하루 여행을 해보자고 약속했던 우리는, 결혼 1주년이 되었을 때 각자 하루 휴가를 내고 '천진암 성지'를 방문하는 짧은 가을 여행을 했다. 그리고 그 인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코스로 나오는 한정식을 태어나 처음 먹어보았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요리가 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곳이었고, 코스마다 나오는 그림 같은 음식들은 하나같이 다 맛있었다. 그날이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최초의 날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그곳에서 먹어 본 음식 중 한 가지를 떠올려 흉내를 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맛이 비슷했다. 내 기억으론 늙은 호박을 갈아서 달달하게 전을 부친 음식이었는데, 남편도 '맛있는 거 사 준 보람이 있다'며 칭찬을 했다. 남편의 칭찬에 춤추는 고래가 된 나는 그 길로 '요리책'을 샀다. 내 생애 첫 요리책은, 당시 유명 남자 배우가 낸 사계절 한식 요리 책이었는데 아마도 서울 출신 종가에서 귀한 도련님으로 자란 그 배우님은 고모님들에게서 요리를 배웠다고 했다. 나는 그 책에 나오는 요리를 계절별로 한 가지씩 차례차례 만들어 보면서 요리 입문을 하게 되었다.

술이 무엇이냐에 따라 만들어낼 수 있는 안주도 다양하다. 친구가 들고 온 중국 술의 안주로는 양고기 쯔란 볶음이 최고.

 책에 나오는 대로, 봄에는 상큼한 나물무침들과 된장국이나 맑은 찌개를 순서대로 만들어 보았고, 여름에는 제철 채소와 영양 별식들을,  가을 음식을 연습하느라 비린내를 참으며 생선도 만져 보았고 각종 반찬과 찌개, 겨울 곰국까지 요리책에 나오는 음식들을 하나씩 만들어 보면서 그렇게 사계절이 지나니 할 줄 아는 음식이 늘어났다. 그렇게 책으로 요리에 입문하여 식품이 가진 고유의 맛과 향을 살리는 조리법을 익히면서 음식을 만드는 것에 취미가 붙었다. 파스타를 배우고 싶다면 '샐러드와 파스타'라는 책을, 일식이 궁금하면 한국에 와서 사는 일본 주부가 낸 요리책을, 와인 선물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 요리 입문을 위해 '르 꼬르동 블루' 출신 프랑스 요리사가 쓴 책을 샀다. 그렇게 나는 이탈리안 요리, 일식 요리, 프랑스 요리를 흉내 낼 줄 알게 되었고 거기에 여행을 통해 맛 본 이런저런 음식들을 돌아와서 만들어 보면서 중식이며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디아 등등 이런저런 맛있는 요리들을 그럴듯하게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밀가루 좋아하시는 친정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만두를 이제는 내가 만들어서 갖다 드린다.

 친구는 '엥겔지수'가 많이 높겠다고 놀렸지만 뭐든 내가 한 음식을 맛있게 잘 먹어주는 남편과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어서 주말마다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집에 오는 두 딸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나는 에너지를 받는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외식은 잘하지 않고 특별한 날에도 집에서 내가 만든 음식으로 오붓한 시간을 갖곤 한다. 1인분에 십만 원을 부르는 양식 코스요리를 집에서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느긋하고 풍성하겠는가. 그렇게 가족을 먹이고 손님을 초대하여 만족한 요리를 낼 수 있게 되니 요리에 자신이 붙었다. 시골 어르신들이 들고 오는 온갖 식재료들을 엄마에게 갖다 드리는 대신 내가 직접 반찬으로 만들어 친정에 갖다 드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6년 전쯤 친정 엄마가 교통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그 해 처음으로 김장에 도전했다. 친정엄마를 우리 집에 모셔다 소파에 앉혀 놓고 엄마의 아바타가 되어 시키는 대로 양념을 치고 소를 버무려 엄마가 맛을 봐주시면서 친구의 도움과 남편의 서브로 김장을 완성했다.  

베트남 요리 중 쌀국수는 해장에 최고다.

 직접 해보니 김장의 핵심은 배추를 절이는 일과 소를 버무리는 간을 맞추는 것이 전부이다. 첫 해는 시골에 사는 친구의 집 마당에서 배추를 절였는데 '올 들어가장 추운' 날이었다. 밤새 절인 배추를 새벽 6시에 나가서 씻는 일도, 차로 우리 집에 실어오는 일도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김장 무식자여서 벌어진 일이었다. 친정 엄마가 해서 통에 담아 주시는 김장 김치를 가지고 오는 것이 나의 김장의 전부였던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어쨌든 그렇게 엄마를 모셔다 놓고 지시를 받아 완성한 김장 김치는 다행히 엄마가 해주시던 그 맛과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김장을 다섯 번 반복하다 보니, 친정엄마께서 '내가 한 거랑 맛이 똑같다'는 평가를 달아주신다.

마라상궈를 제대로 하려고 진짜 중국집에서 쓰는 웍도 샀지만 불이 세지 않으니 불맛을 내지는 못한다. 

 아이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 자취를 하면서 싸가지고 가는 엄마의 반찬보다 시간이 없어 대충 밀 키트를 배달시키거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줄 서서 먹는 맛집을 더 좋아하게 되었을 때 나는 조금 서운하긴 했다. 그러나 내 슬하를 떠난 아이들이 먹는 음식까지 일일이 체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피부가 뒤집어졌을 때,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 먹으라고 돈 주고 파는 음식'이 원인이라는 것에 동의한 후엔 아이들도 각자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특별히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You**를 참고하거나 검색만으로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아이들을 보며 이제는 아이들 걱정은 그만하기로 했다. 이제는 엄마를 위해 음식을 만들기도 하는 딸의 음식을 먹으며 내가 그런다. '내가 한 거랑 맛이 비슷하구나.'

제철에 나는 식재료가 쉬지 않고 시골 어르신들 손에 들린 검정 봉지에 담겨 내게 들어온다.

 이제는 차려진 밥상에 앉은 남편이,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군 출신이라 반찬이 세 가지 이상이 되면 힘들다.'라고 우스개 소리를 할 정도이다. 시골에선 감자를 캐면 감자만 잔뜩 들어오고, 가지며 오이며 호박들이 일제히 동시에 열리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들고 오는 검정 봉지 안엔 중복되는 식재료가 가득하다. 주변에 나누고 나서도 어쨌든 힘들게 농사를 지어 딴 귀한 것들을 허투루 버릴 수는 없기에 당연히 반찬 가짓수가 늘게 마련이다. 나는 이제 1식 3 찬이 어렵다. 조선시대 나라에 기근이 들면 왕은 상차림 가짓수를 줄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럴 때 수라간 상궁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김치도 최소 대여섯 가지는 되고 해다가 담그는 장아찌 종류만 해도 네댓 가지인데 말이다.   

남편 생일엔 맘먹고 몇 가지 요리를 해낸다.

 곧 김장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배추는 5년째 강원도 영월의 고랭지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절여서 판매하는 단골 농원에 예약을 했고, 백령도 까나리 액젓도 들여놓았고 전국 제일 강화도 새우젓도 샀다. 시골 어르신들이 김장하라고 해마다 주시는 무와 대파를 넣고 무채를 써는 남편의 땀방울이 들어가면 분명 우리 엄마가 하신 김치 맛이 날 것이다. 그러면 내 아이들은 올 때마다 엄마의 김치를 가져다 먹으면서 DNA에 그 맛이 아로새겨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음식의 맛과 전형이 전수되어 음식을 못하던 내가 음식을 잘하게 된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자신도 모르게 이 맛과 풍미를 재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어머니에게 가서 두 달만 음식을 배워왔으면 좋겠다던 남편은, 이제 엄마가 한 건 못 먹겠다고 한다. 식(食)은 습관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의 식습관이 어떻게 들지 생각만 해도 두렵다.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 남편의 격려와 친정엄마에게서 전수된 감각, 그리고 선선한 재료들이 나를 요리 잘하는 사람으로 키워 주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요리도 창작활동이기 때문에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재밌으면 하게 된다. 요리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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