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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Aug 05. 2021

그렇게 우아하게 나이 먹으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시골 어머니들이 우아하고 고상할 수 없는 이유

  그 장미나무는 진료소 마당에 있었고 키가 나보다 컸다. 그저 짐작으로도 최소 십 년은 더 되었을까. 굵고 단단한 나무에 겁나게 굵직한 큰 가시가 달려 있었다. 어느 겨울 아침, 장미꽃은 이미 11월 된서리에 고사되었고 그 나무는 잎을 떨군 지 오래라 맨몸을 드러낸 채 뿔 같은 큰 가시로 세상을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너보다 더 오래 이곳에 있었고 아주 아름다운 붉은 꽃을 많이 피워낸, 너보다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세상 모두가 내가 피워낸 크고 붉은 꽃들을 찬양했느니라!'

나도 분명 크고 화려한 붉은 꽃이었다.....

 꽃이라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 뜨거웠던 계절에는 분명 크고 아름답고 화려한 꽃이었겠다. 그러나 그 탐스러웠던 꽃은 이제 마른 종잇장처럼 차가운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지난 계절엔 꽃에 매료되어 꺾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잎새 안에 숨은 코뿔소의 뿔 같은 가시에 긁혀 피가 맺혔었다. 위협적인 저 나무의 가시에는 자비가 없다.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는 고집스럽고 단단한 저 가시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해 멀리 돌아서 가고 때로는 외면하며 더 이상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게 되었다. 춥고 긴 계절이 왔고 함께 광합성하며 창조를 이어가던 주변의 모든 것들은 사그라들어 침묵하게 된 겨울 땅에 외롭게 혼자 서 있는 늙은 나무여! 그는 '이제 나는 저주받았다'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 저주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걸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에 갇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과거를 붙들고 울고 있다. 곧 봄이 오고 새 순에서 새 가지가 나와 곱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사람에게도 귀소 본능이 있다고 하던가? 부쩍 행복했던 시간들이 망각의 수면 위로 물방울처럼 뽀글거리며 떠오른다. 친구는 내게 그게 바로 나이 먹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두어 달 전 갑자기 교동섬을 떠올려 기억을 더듬고 교동 언니를 찾아왔던 것은 행복했던 청춘의 그날들에 대한 추억이 오늘 나를 이곳 교동도 난정리로 부르려고 그랬을지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그냥 일상으로 여기기엔 이곳 교동도 난정리 파견은 남다른 시간을 내게 베풀고 있다. 6월 말 오랫동안 함께 했던 선배의 정년 퇴임은 코로나19로 시시하게 맞아야 했다. 교동도 난정리에서 4년 여, 그리고 나와 함께 강화도에서 26년을 함께 했던 선배는 그래도 밝게 웃으며 '속 시원하다'라고 소회를 밝혔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신규자를 다른 진료소로 발령을 내면서 이곳 난정리는 내가 주 2회 파견 근무를 하는 것으로 명령이 났다. 세상은 대부분 상식적이지 않지만 이런 일 역시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작용한 것 같은 모양새가 떨떠름하다. 코로나19 선별 진료소 근무며 코로나19 예방접종 센터 근무를 하면서 지금보다 더 힘들까, 생각하지만 이 역시 가장 힘든 시간은 아닌 모양이다. 위치 확인을 위해 마지막 남은 진료소장 선배 한 분을 따라왔던 난정리 보건진료소의 첫날은 꽤나 인상 깊었다.

진료소 현관에서 건너다 보이는 죽산포 앞바다가 나를 반겨 주는 오션뷰의 난정리 보건진료소입니다.

 30년 전에 교동도에 근무하던 시절 몇 번 와 본 기억은 있지만 그때의 내 기억 속 그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 난정리 보건진료소가 '오션뷰'라는 건 새삼 처음 알았다는 것도 생경하다. 교동도의 가장 안쪽에 있는 5개 마을을 관할하는 이곳은, 내가 사는 집에서 무려 40분이 걸리는 먼 곳이다. 그나마 배를 타고 건너 다녀야 하는 곳이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으며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은 일찌감치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폭염 중이었고 낯선 곳이었다. 청소까지 싹 마치고 나갔다지만 4년을 머물다 나간 사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오래된 물건들이 쓸모없이 널려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될지 모르지만 후임으로 발령받아 오는 사람이 서글프지 않게 막바로 일할 수 있도록 무려 닷새에 걸쳐서 정리를 했다. 올 때마다 자동차 트렁크에 버릴 것을 싣고 나가야 했다. 정년까지 일했던 이에겐 혹시 쓸지도 몰라서 쌓아두었던, 오래되어 익숙한 모든 것들을 치웠다. 심지어 약품 재고를 파악하기 위해 시작했던 약장 정리는 'before'를 사진으로 찍어둘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재고파악을 쉽게 하기 위한 정리는 필수다.

 그렇게 '초기화'를 마치고 나서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우선 방문 대상 어르신들께 일일이 전화를 드리기 시작했다. 폭염에 대한 관리도 동시에 하면서, '한낮엔 절대 밖에 나가지 마시고 30분에 한 잔씩 물 드시고 이상 증상이 있을 때는 반드시 전화하시라'라고 하면서 주 2회 파견을 오게 되었다는 말씀을 전달했다. '자식보다 낫다'시면서 고마워하시는 어르신들의 대답이 내게 보람을 주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나의 주 근무지로 전화가 걸려왔다. 난정리 보건진료소 현관문에 나의 인화리 보건진료소 전화번호를 안내해 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 난정린데!  화요일, 목요일 근무한다면서요!!??"

"네, 어르신, 화요일, 목요일 맞습니다."

"근데 오늘 왜 아직도 안 나왔어요! 이래 가지고 어디 노인네들 다 죽게 생겼지 뭐야! 일주일에 두 번도 심각한데 그나마 오늘 화요일인데 왜 아직도 안 왔냐고! 내가 지금 땀을 뻘뻘 흘르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까스로 여기 왔는데 문이 탁! 잠겼네!!!"

기차 화통을 삶아 드신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장군님의 환생일까? 목소리만으로도 외모가 그려지는 어머니시다.

"여기는 배는 이제 안타지만 그래도 너무너무 멀어서 거동도 못하는 노인네들이 잔뜩 있어! 그나마 진료소에서 약 타다 먹는데 이렇게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군청으로 전화할 거야!"

악다구니는 이어지고 아예 협박까지 시작된다.

"난정리에서 내 이름 대면 다 알아! 내가 보통 늙은이가 아냐! 니들 나한테 까불면 콱! 맞는 거야!"

어머니가 장군이시라면 나는 31년 차 진료소장이다. 31년 차 민원 응대의 역사는 내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졸지 않는 담대함을 열매로 주었다.

"어머니, 더운데 자전거 타고 진료소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어요? 그런데 어쩌죠? 오늘은 월요일이라 제가 인화리에서 근무하는 날인데요. 그늘에서 조금 쉬시고 오늘은 그냥 가셨다가 내일 오셔야겠네요. 내일 오시면 제가 꼭! 붙어 있다가 맞아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아.... 그래요? 오늘이 월요일인가? 나는 오늘이 화요일인 줄 알고. 알았어요."

전화가 뚝 끊어졌다. 에헤.... 고약한 어머니시다.....


 온종일 기분이 나빴다. 월요일을 화요일로 착각하신 것이야 그럴 수 있지만 다짜고짜 화를 내시고 윽박지르신 것은 사과를 하실 만도 한데 말이다. 그날 오후가 시작되는 한낮에 다시 전화가 왔다.

"나 난정리 사는 K라고 하는데 내일 난정리 오면 내 혈압 약하고 H 혈압 약하고 내 위장 약하고 관절 통증에 먹는 약하고 미리 좀 지어놨다가 우리 집으로 가지고 와요! 전임자는 매달 마을에 거동 못하는 노인들 집마다 방문을 했었어요."

"어머니, 많이 불편하시겠지만 일주일에 이틀만 진료를 해서 매일 환자가 많이 오십니다. 가정방문까지 할 시간 여유가 되지 않아서 어쩌죠?"

"아... 그건 그렇겠구먼. 알았어요. 그러면 내가 자전거 타고 갈 테니까 약을 미리 좀 지어놔요."

다시 전화는 일방적으로 뚝, 끊어졌다. 나무 관세음보살.......... 불자는 비록 아니지만 마음속으로 목탁을 두드리며 진정을 시킨다. 딱한 양반일세. 우아하고 고급지게 명령하는 방법을 익히지 않으신 분이다.... 하지만 생각해 본다.

'분명 험한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오신 분이 분명하다. 강퍅한 인생에 굴하지 않고 매일 숨 쉬는 일처럼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을 것이다. 분명 장군처럼 다부지고 단단한 몸집에 굵은 얼굴선을 지니고 눈매는 부리부리하거나 날카롭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와 단호한 만투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법을 알고 계신, 나이보다 열 살은 젊어 보이는 분일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넓어지니 어서 내일 가서 그 K라는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다. 분명 내가 생각했던 그런 어머니일 것 같아서 확인해 보고 싶다.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몸에 손발이 크고 두텁다. 얼굴도 모진 세월을 견디고 이겨낸 늙은 소나무 같다. 마스크 위로 날카로운 눈매가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예상과 달리 화려한 꽃무늬 위아래 세트를 입으시고 지역 채육대회에서 단체로 주었을 등산용 모자를 쓰고 끈도 턱 밑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흔들리는 귀걸이와 열 돈은 넘어 보이는 금 목걸이를 거신 어머니가 천둥같이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셨다.

"아이고 힘들어! 아이고 힘들어! 땡볕에 자전거 타고 오느라 죽을 뻔했네!"

숨까지 헉헉거리시며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으신다. 얼른 일어나 차가운 물 한 컵을 내드린다.

"그래, 물 좀 줘요! 아이고 숨 차!"

넘어갈 듯 거친 숨을 헐떡거리시면서 물을 받아 단숨에 들이켜시는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시선은 쉬지 않고 나를 보며 탐색 중이시다.

"어머니가 K어머니 시구나! 약을 미리 지어놓으라고 하시더니 지금 오후 3시가 넘었어요."

"응, 내가 강화 나갔다 지금 막 왔어."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거친 입담이며 천둥 같은 목소리에 비해 지극히 여성스러운 의상과 양 갈래로 묶은 머리를 보니 귀엽기까지 하신 분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 소개를 길게 하신다.

"나는 이북에서 피란 나왔어. 여길 왔는데 먹고 살길이 막막해. 남의 집 곁방 한 칸을 얻어놓고 남편이 손재주가 좋아서 나무로 뭘 깎아서 잘 만들어 팔았지. 한 날은 생선이라도 얻을까 하고 남산포 포구에 나갔는데 그때 생각에, 아! 저걸 떼어다 이고 다니면서 팔아야겠다, 하고 남편한테 리어카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그걸 끌고 물때 맞춰 나갔지. 근데 그날은 썰물 때라 배가 저 아래 댔길래 리어카를 끌고 내려가려는데 해양경찰이 허리에 손을 착, 얹고 서서 날 보고 나가지 말래. 들은 척도 안 하고 내려가는데 '나가지 말라니까!' 하면서 리어카를 발로 확, 차. 그러니까 리어카가 갯벌에 떨어져 나뒹굴었어. 그래서 내가 그 경찰 놈한테 가서 뺨을 냅다 후려쳤지. '야, 이놈아! 당장 리어카 건져와!' 했더니 고개를 덜렁덜렁 흔들고는 밑에 놈한테 리어카 건져오라고 시키더라고. 그날부터 그 경찰이 날보고 '떨렁 이'라고 부르는 게 내 별 멍이 되었어. 그런데 애나 어른이나 떨렁 이, 떨렁 이 하는데, 어느 날은 큰 아들이 중학생인데 '학교에서 아무개 날 보고 야, 너 떨렁 이 아들이냐?' 했다는 거야. 당장 그 집에 찾아가서 그 애 부모 보는 앞에서 '다시는 우리 아들한테 떨렁 이 아들이라고 부르지 말라'라고 하고서 뺨을 세 대를 때렸지. 그 애 부모도 암말도 못하더라고. 그렇게 억척같이 생선을 떼어다가 이고 다니면서 팔아서 애들 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고.... 영감이 일찍 죽어서 안됐지. 지금은 애들이 다 잘되어서 그렇게 나한테 잘하는데, 난 지금도 마을 청년회가 나한테 설설 기거든. 내가 군수한테도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야. 마을 해바라기 정원 사업도 몇몇 이서 추진하고 돈도 나눠 가지려고 하는 걸 내가 나서서 '다 가만두지 않는다'라고 혼쭐을 냈어.'늙었다고 무시하지 마라!'하고 말이야..."  


 약을 미리 지어놓으면 곧바로 가져가겠다고 하시더니 한 시간을 넘게 마주 앉았었다. 욕설과 거친 입담으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여장군도 팔십이 넘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공권력이 서슬 시퍼렇던 시절 해양경찰의 뺨을 갈기던 그 패기는 이제 세월에 묻혀 가는 중이다. 시골 어머니들은 다 그렇다. 사용하는 언어는 뉴욕 뒷골목 유색 인종 이민자들이나 쓸 것 같이 거칠고 천박하기 그지없다. 글씨를 가까스로 읽기만 할 뿐 이름 석 자 쓰는 것도 손이 벌벌 떨리는 시골 어머니들은, 그 살아온 세월과 삶이 우아하고 고급진 단어를 사용할 수 없도록 그들을 벼랑으로 내몰곤 했기에 이미 우아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이를 먹고 말았다. 상스럽고 거친 단어를 사용하고 화려한 꽃무늬 티셔츠에는 화려운 꽃무늬 바지보다는 단색의 바지가 더 낫다는 정도의 패션 기본기도 갖출 여유가 없었다. 그저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자식의 미래를 책임져야 했기에 오직 한 가지 생존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으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악다구니 쓰고 억지를 부리고 욕설을 서슴없이 내놓는 것 또한 어머니들의 생존 기술이다. 그렇지 않으면 밟히고 외면당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태어나면 아들도 없는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서 공부도 많이 하고 고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K어머니의 소망은, 시골 어머니들이 우아하려면 다시 태어나는 방법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여겨져 씁쓸했다. 새로 인연을 맺은 난정리에서의 주 2회가 언제까지 어이질 지 모르지만 최대한 시골 어머니들을 위로해 주다가 떠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교동도 난정리에서 매년 난정저수지 인근에 조성하는 해바라기 정원. 아직은 제 철은 아니어서 인터넷 이미지 검색을 해서 올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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