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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Jul 05. 2021

(삭제된 섬 맞은편) 저장된 섬

내가 분만을 도왔던 꼭지가 한 달 전에 시집을 갔다는군!

  "꼭지? 꼭지는 한 달 전에 시집갔어!!"

"에엥~?? 진짜?"

"그러고 보니 결혼식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장은 꼭 청첩을 했어야 했는데!"

"와..... 내가 받은 아기가 시집을 가다니.. 나 늙었어....."

거의 일 년도 넘게 못 만난 교동 언니 집에서 언니가 만들어 준 콩국수를 먹으며 쌓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발령지 교동도에서 3년을 넘게 근무하는 동안 함께 울고 웃으며 가족이 된 P언니는, 그때 그 시절 농번기엔 세 살짜리 막내딸을 아침 일찍 내가 근무하던 진료소로 업고 왔다. 모내기를 하는 일주일 내내 나는 그 아기를  50CC짜리 오토바이 앞에 태우고 가정방문도 다니고 아기 엄마라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한 시간 간격으로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20분씩 가던 교동도를 잇는 다리가 놓인 것도 벌써 7년 전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풍경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부쩍 많아진 교동도라지만 마을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내가 첫 발령을 받아 들어갔던 섬 교동도는 섬이면서 농촌인 그 시절 교동도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 중 중요한 것은 날씨였다. 섬이 육안으로 뻔히 보이는 가까운 거리지만 물살이 세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물이 빠지만 밀물이 들어올 때까지 세상없어도 운항이 정지되어 서너 시간은 속수무책 기다려야 하는 곳. 게다가 민통선 지역이라 여차하여 물살에 잘못 휩쓸리면 북방한계선을 넘어가기 쉬운 곳이니 군사적으로도 민감한 것이다. 그러니 야간 응급 환자를 육지로 후송하려면 절차가 보통 이상으로 복잡했다. 군청 상황실, 면사무소 당직자, 해병대, 경찰.... 모든 기관에 보고하고 그들의 상부에서 허가가 내려와야 행정선이 뜰 수 있었다. '골든 타임'은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거기에 더해 교동도에서 일 년에 수확하는 쌀은 가평군민이 일 년을 먹을 정도로 수확량이 많다. 농지가 많아 웬만한 직장인 연봉이 나오는 정도이니 농사가 전업인 젊은 인구도 많은 곳이다. 당연히 노인 인국 다수인 곳에 비해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응급실 근무가 힘겨워 그만두었는데 한 술 더 떠 교동도에서는 새벽 2시 전엔 정식으로 불 끄고 자 본 일이 없었고 찢어진 상처를 봉합 처치해야 하는 일은 매일 한두 건 이상 '루틴'이었다. 그러니 행정선을 띄워야 할 일은 또 얼마나 빈번했겠는가.   그 섬에서는 날씨에 따라 모든 일상의 일정도 정해지고 날씨에 의해 배가 뜨고 멈추니 날씨가 나쁘면 거의 모든 일상이 멈추곤 하는 섬이었다. 볼일이 생겨 읍내에라도 나가려면 날씨부터 챙겨봐야 했다. 바다에 안개가 짙거나 폭풍 주의보가 내려지면 사람이 죽어 나간대도 배를 띄울 수 없었고, 배를 띄우지 못할 정도의 날씨면 헬기도 뜰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섬마을 보건진료소에 근무하던 나 역시 어부나 농군처럼 날씨에 민감했다. 파도가 잠자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무리하게 띄운 행정선이 되돌아가고 내 눈앞에서 응급환자가 죽어갔던 뼈아픈 기억도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찐득한 안개와 해무가 겹쳐 코 앞도 보이지 않게 세상은 잠겨 버렸다. 안개가 너무 심해 모두가 집 밖으로 나올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안개와 밤의 어둠이 촘촘히 마블링되었던 그 밤에 전화가 왔다. 셋째를 임신 중인 J님이 진통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셋째라서 좀 일찍 나올 것을 예상하고 예정일보다 일주일 먼저 미리 인천에 나간다고 했었는데, 성질 급한 녀석이 열흘이나 먼저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고 일단 진료소로 오시라고 했지만 겁이 덜컥 났었다. 물론 직무 교육생 시절 세브란스에서 산부인과에서 진료 교육과 분만실 실습도 받았고 심지어 실습을 받았던 지역 모자보건센터에서 조산사의 입회 하에 분만도 받았지만 혼자서 분만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아기를 받아야 했다....'


 두려웠다. 나는 겨우 스물다섯 살 미혼의 진료소장이었다. 갓 교육을 마치고 첫 발령받아 겨우 일 년 근무했을 뿐이었다. 최대한 분만을 혼자서 받는 사태는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해병대에도, 군청 상황실에도 비상을 걸어놓고 행정선과 헬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산모에게 '힘주지 말고 하~ 하고 계시라'라고 했다. 전화는 쉬지 않고 오고 산모의 가족들과 몇 분의 마을 사람들이 대기실에 가득 앉아 초조하게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혹시 몰라 분만세트를 준비하고 분만 후 사용할 주사제를 꺼내놓고 물도 끓였다. 소독포를 산모의 몸 아래 까는 순간 갑자기 산모가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자궁 경부가 완전히 열려 아기 머리가 꽉 차는 '크라우닝' 상태가 되면 저절로 힘이 주어지게 마련이다. 내가 장갑을 끼자마자 아기가 나왔다. 그때의 그 순간 내 기억으로는 아기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뭘 어쩔 사이도 없이 나는 마치 노련한 조산사처럼 분만 실습의 기억을 되살려 두 개의 기구로 탯줄을 잡고 자른 후 아기의 코와 입에 가득한 양수를 스포이드로 빨아내고 얼굴을 닦은 후 소독포에 싸서 산모의 시어머니에게 씻기라고 넘겨주고 나서 산모에게 자궁 수축제를 주사하고 저절로 떨어져 나오는 태반을 살폈다. 다행히 셋째 아기여도 태반 상태도 양호했다.

"정말 다행히도 아기랑 태반이랑 아주 무사히 깨끗하고 건강하게 나왔어요!"

내가 감격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는데 산모는 팔을 얼굴에 얹고 소리 죽여 울고 있다.

"우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또 딸인가 봐......."

아기의 첫 울음소리만으로도 딸인 것을  알아챈 것은 산모만이 아니었다. 동네에서도 유별나기로 소문난 아기의 할머니도 아기를 건네받으면서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울음소리만으로 또 딸이라는 걸 아셨다고 했다. 온 동네가 이번엔 아들이기를 바랐지만 셋째 딸로 태어난 아기에게는 '꼭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산모의 집이 추웠고 날이 험악해 아기와 산모는 진료소 당직실인 내실에 입원 아닌 입원을 시키고 거의 밤을 지새운 탓에 다음 날 하루 온종일 피곤했던 기억도 났다. 다음 날 아침 아기의 할머니가 오셔서 분만비를 계산하시겠다고 했다. 두둑한 지갑을 들고 오셨다. 나도 처음이어서 건강보험공단에서 나온 수가 산정 지침서를 찾아보니 보건진료소에서의 분만비가 '1,650원'이었다. 지금은 본인 부담금이 900원이지만 당시 본인 부담금은 5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아기의 할머니가 몹시 화를 내셨다.

"우리 새끼를 받아 준 값이 겨우 그거라고!!??"

꼭지 할머니가 그렇게 화를 내셨을 때 나는 안도했었다. 소년 과부로 외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오신 꼬장꼬장한 할머니는 분만비가 1,650원이라고, '우리 아기가 그렇게 값어치 없냐'라고 화를 내시니 자손을 귀히 여기는 할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고 감사했다.

 그 해 가을 추수가 끝나고 꼭지네 할머니가 내게 쌀을 한 가마 주셨다. '귀한 우리 새끼를 무사히 받아 준 보답이니 절대 사양하면 안 된다'라고 하셨다. 만약 거절하면 '우리 아기를 천하게 여기는 걸로 알겠다'고도하셨다. 지금 같으면 '김영란 법'에 저촉되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지만 사양 끝에 그 쌀 한 가마는 우리 엄마에게 싣고 나갔다. 엄마는 딸이 100점 성적표를 받아 온 것만큼이나 기뻐하셨었다. 오랜 기억에 남은 꼭지는 참 잘 자라고 있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유난히 할머니를 닮아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나 역시 내 손으로 받은 아기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자라는 것이 얼마나 기특하고 감사했었는지. 그런 꼭지가 한 달 전에 시집을 갔다니...

섬에 들어갈 땐 길고 지루하지만 그들을 만나고 나오는 길은 여전히 아쉽고 금방이다. 들어갈 땐 울고 들어갔다가 나올 땐 웃는다는 섬. 교동은 현재 진행형으로 내게 저장된 섬이다.

    교동 언니와 짧은 시간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고 뜨거운 볕에 눈도 못 뜬 채 나서는 내게 언니는 또 마늘이며 양파, 호박, 오이를 차에 실어준다. 그때도 그랬다. 봄에 병아리를 사서 키운 닭을 구멍 뚫린 상자에 잡아넣고 집에 가져가 부모님과 같이 고아 먹으라고 꾸려주거나 온갖 밭에서 거둔 것들과 추수를 마치면 쌀도 꾸려 주었다. 삼 년을 넘게 근무하면서 참 많이 사랑받았던 마을이었고 지금도 전화를 하면 할 말이 많은 사이다. 내 결혼식에도 다들 와주었었고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부고를 안 주었다고 몹시 화를 내며 서운해한 사람들이다. 이북 사투리가 섞인 거칠고 무뚝뚝한 말투와 호전적인 겉보기 때문에 처음엔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들이지만 일 년도 안되어 먼저 마음을 열고 깃든 사람들에게 정을 나누어 주는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본도로 발령을 받아 나올 때 송별식만 일주일 내내 했을 정도로 헤어지기 아쉽고 서운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그곳에서 그때처럼 살아가고 있다. '또 오라고, 자주 오라'고 마당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교동 언니의 변함없는 우정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처음 발령받아 두렵고 설레던 그 첫 마음을 다시 초기화해주는 교동의 짧은 반나절로 나는 기운을 얻는다. 언니가 내게 맡겼던 남선이도, 첫 배를 타고 둘째를 낳으러 가느라 세 살배기 기환이를 내게 맡겼던 E언니도 여전히 싱그러운 교동도는 현재 진행형으로 내 마음 가운데쯤에 저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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