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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Jun 24. 2021

딸이 퇴사를 했다.

딸의 퇴사가 부러운 직장 생활31년 차

 딸이 퇴사를 했다. 미술대학 졸업 직후 일 년의 취업 준비를 통해 광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작은 회사에 입사한 지 2년 만이다. 대기업이 아닌 회사로의 입사 이유처럼 퇴사의 이유도 나를 쉽게 납득시켰다. 무엇이든 스스로 모든 선택을 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도 진다는 걸 이미 아는 아이다. 탕비실에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회사가 싫을 수 있다. 열심히 야근을 하다 보니 문득 대표 한 명만 행복한 회사란 것도 빨리 알아챘으니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몇 달 쉬면서 직업병인 허리 통증을 극복하기 위해 PT도 받고 영어 공부도 하여 '워라밸'이 있는 회사를 찾아 재취업을 하겠단다. 그런 딸을 나는 열렬히 응원했다. '나는 우리 엄마 때문에 퇴사를 하기 어려웠던 때문이었다.......'


 나는 딸의 퇴사가 부럽다. 나는 우리 엄마 때문에 퇴사를 쉽게 결정할 수 없이 항상 퇴사를 생각하며 지난 31년 간 한 직장을 다니는 중이다. 아니, 퇴사를 한 번 하긴 했다. 물론 엄마가 반대했지만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사격 덕분에 과감하게 퇴사했었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종합병원 응급실이 첫 직장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 퇴사하기를 지금 생각해도 잘했다. 아무리 신입 간호사라도 한 달 내내 '나이트, 나이트, 이브닝, 데이, 나이트, 나이트, 오프, 데이.....' 이런 식으로 duty를 짜주니 입사 일 년 만에 그 직장에 신물이 났다. 제법 일을 빨리 배워 해낼 만 한데 일 년 만에 그만둔다고 하니 허구 헌 날 나를 '태우던' 수간호사의 표정이 난감했었다. '어찌나 고소하던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속이 타고 우울하며 안달을 하다가 막상 직장 생활이 시작되면 직장과의 허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퇴사를 생각하는 우리들. 직장인의 삶은 그렇게 항상 우리를 속이고 또 속인다. 청년이었던 나는 간호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마침 새로 개원한 서울 어떤 대학병원에 입사 시험을 보았다. 새로 개원하는 병원은 간호사를 많이 뽑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 그런데 엄마가 그랬다. '집으로 내려와라. ㅇㅇ 병원에 부탁해 놓았으니 다른 생각하지 말라'라고. '시집갈 때까지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며 직장 생활해라. 객지에서 쓰는 돈 생각하면 여기가 월급이 좀 적어도 그 돈이 그 돈이다.'라고도 하셨다. 고민이 많았다. 그게 또 뭐라고 울면서 잠 못 자고 고민을 했었다. 생각하니 어렸고 세상 물정을 모르니 엄마의 말씀을 어기기 어려웠던 나는 그렇게 서울 특별 시민이 될 수 있었던 최초이자 마지막 기회를 버렸다.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내가 입사할 당시의 그 병원은 인근에 큰 병원이 없었던 시절이어서 응급실이 미치도록 바빴다. 낮 근무 때는 외래 주사실 근무도 겸해야 했고 저녁 근무를 마치면 기숙사에서 눈을 붙이며 환자가 오면 나이트 콜을 받아야 하는 열악한 근무 조건이었고 명절이나 연휴에는 끼니는커녕 컵라면에 물을 부어 놓고도 퉁퉁 불어 먹지 못하게 되어도 바라만 보며 일해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들의 노고는 치하받지 못했고 사소한 실수에도 거의 한 시간 가량을 시쳇말로 '뭣'나게 타야 했다. 태움은 경위서로 이어지고 몇 날 며칠을 왕따를 당하거나 차가운 수간호사의 눈흘김과 욕설은 다반사, 심지어 정강이도 수없이 까였다. 그 병원에 근무하는 거의 일 년 가까이 나의 생활은 '근무와 잠'으로 이분되어 속절없이 지났다. 목욕탕을 가거나 미용실을 가면 '간호사'라는 것을 금방 들킬 정도로 내게선 소독약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퇴사를 생각할 수 없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이 발목을 붙들었다. 하지만 나를 더욱 옭아맨 것은 엄마였다.

"너도 아버질 닮아서 꾀가 많아서 큰일이다. 도대체 꾀가 많아서 어디 한 군데 진득하게 붙어 있질 못하고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엄마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항상 내게 그런 말을 하셨다. 싫증을 잘 내는 어린 내게 늘 '아빠 닮았다'라고 했고 그 말의 뜻은 마치 함량 미달 실패의 전조처럼 나를 단정 짓는 설명서같이 따라다녔다. 사실 나는 싫증이 잘 나는 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만큼 이미 익숙하게 알게 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아주 오랫동안 엄마에 의해 정의된 나는, '아빠를 닮아서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는다'거나 '싫증을 잘 내서 한 우물을 파긴 어렵다' 또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등의 말들이었다. 엄마는 본인을 닮은 언니를 늘 칭찬하고 본인과는 다른 나의 타고난 기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였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나도 이직을 많이 하다가 가난하게 살거나 안정된 삶에 정착하지 못할까 봐 두려우셨으리라. 우리 시대 엄마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병원 생활에 지쳐 젊음의 불꽃이 꺼져 가던 어느 날. 같은 응급실 입사 동기가 내게 물었다.

'여기서 제일 용한 무당 혹시 알고 있니?'

다른 지역 출신이었던 친구의 물음에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래 봬도 주일학교 출신인 내게 갑자기 용한 무당을 내놓으라니..... 친구를 위해 탐문을 해보니 내 중학교 동창이 막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곳 지리를 모르는 응급실 동기와 택시를 타고 중학교 동창인 무당의 집으로 갔다. 동기가 먼저 신당으로 들어갔고 한참 후에 나온 동창 무당이 내게 그랬다.

"들어와라"

그렇게 얼결에 할머니 신 앞에 앉게 되었다. 갑자기 내게 '들어 오라'고 하는 무당의 눈초리를 거부할 수 없었기도 하지만 호기심이 폭발한 탓이었다. 안방에 꾸며진 신당은 TV에서 보던 그런저런 신당과 똑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궁금하지만 부처님은 왜 거기서 그들과 협업하시는지? 역시 대자대비하시니 그런 모양이다.'

"뭐가 알고 싶어?"

오천 원을 내라고 하며 무당이 내게 물었다.

"나는 뭐 딱히....."

아무튼 딱히 고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집 주소를 물어보던 그녀가 갑자기 내게 다짜고짜 '혼인수 나오네?' 했다. 결혼을? 남자도 없이? 영문을 몰라하는 내게,

"직장에 관해서 궁금한 거 있지?"

했다.

"아........ 네......."

이상했다. 무당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일 초도 병원 근무가 하기 싫었다. 나는 퇴사를 할 수 있을 지도 궁금했다. 퇴사를 하면 어디 다시 취직은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 그 순간 깨닫게 된 것 한 가지는, 내 삶이 엄마에 의해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었다! 무당은 내게 '그만두려고 하면 붙잡는 사람이 있어서 부서를 옮겨 준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변화를 주어 좀 더 기다리면 더 좋은 자리가 나니 지금 그만두지 말라'라고 예언을 해주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무당은 내게 더 다니라고 조언했지만 나는 그 다음날 퇴사를 결심하고 수간호사에게 사직서를 냈다. 그렇게도 나를 태우던 그녀는 순한 양처럼 나를 붙들었다. 일 년 정도 응급실에서 '굴러 먹어서' 가장 일 시켜 먹기 좋은데 퇴사를 한다고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수간호사는 내게 원하는 병동으로 부서를 옮겨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달 후에 퇴사하는 것으로 결심을 굳혔다. 응급실이 내 적성에도 맞았고 제법 일도 잘하고 있었지만 이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잘하면, 운이 좋으면 간호부장. 아니면 결혼 후 퇴사. 아니면 그냥 간호사.... 이미 그 결말이 정해진 스토리는 읽기 싫은 뻔한 삼류 소설 같아 손이 가질 않았다.


 "하여튼 아빠 닮아서 꾀가 많아서 겨우 일 년 다니다가 그새 톡 그만둔다네....."

내가 퇴사를 이야기했을 때 엄마가 하신 말이었다.

'엄마 고생하는 생각을 하면 힘들어도 그게 고생이냐, 나 같으면 그런 고생은 얼마든지 하겠다, 먹고 그 일만 하는 건 얼마든지 하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엄마는 정해진 답처럼 내게 올가미를 씌웠다. 결정적으로 그 순간, 아버지가 '거룩하게' 입을 여셨다.(그 순간 나의 구세주는 아버지셨다.)  

"내가 저번에 외포항에서 급한 산모 받아서 후송할 때 분만실에 산모 올려 주고 혹시나 하고 응급실을 살짝 엿보았지. 우리 딸이 근무하는 날인가, 하고. 그런데 난리도 아니더라고. 의사랑 둘이서 이리저리 뛰는데 환자는 네 명이 침대에서 아우성이지. 세상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다 핑 돌더라고. 저 아이를 그만두게 해야겠다, 생각했었어. 잘 생각했다. 면허증 가지고 어디 가서 절대 밥은 굶지 않을 테니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거라."

당시 아버지는 보건소 앰뷸런스 기사로 근무하셨고 내가 모르는 사이 응급실에서 일하는 나를 엿보고 바빠 보이는 딸에게 인사도 없이 슬그머니 가버리셨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응급실을 엿보았던 그날은, 차와 차가 정면충돌을 하여 차량 탑승자 네 명이 동시에 실려 들어왔고 네 명 모두 뇌 증상이 있어서 시간을 다투어 후송 준비를 하느라 인턴 의사와 둘이서 이리저리 뛰던 상황이었다. 응급실에서야 빈번하게 있는 일이었지만 하필 그날은 담당 간호사가 나 혼자 뿐이었다. 다행히 그날은 어쩐 일로 인턴 의사와 내가 손발이 잘 맞아 빠른 시간 처치를 완료하여 후송을 보냈던 기억이 있어서 크게 힘들었던 기억은 아니었는데 문 밖에서 보던 아버지의 눈엔 기가 막혔던 모양이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근무여건이었지만 그 시절엔 흔히 그랬다....


 엄마의 원망스러운 눈초리와 걱정을 안고 퇴사를 했던 나는 지금의 이 직업에 다시 입문하였다. 그러나 새파란 잔디밭인 줄 알았던 이 일도 보통 이상의 고충이 있었다. '아뿔싸! 이게 아니네....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일은 설립 초기의 억지스러운 제도에서 발전되지 못한 채 누구도 돌보지 않는 잡초 무성한 황성 옛터 같은 낡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첫 부임지인 섬 마을이 한창 젊은 내겐 갑갑한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차마 퇴사할 수 없었다. 엄마가 분명 또 그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빠 닮아서 끈기가 없다.....' 우리 오 남매에게 아빠를 닮았다는 엄마의 판정은 마치 '나는 네가 싫다'라는 표현의 다름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자식이었던 내겐 두려움과 불안과 고독을 뜻했었다.  


 [지금의 나로 말하면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멋지다. 나이 들수록 점점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 훈수 두던 엄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콤플렉스로 여겨지던 아버지까지 끌어안고 나니 나는 나이를 먹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 직장에 몸을 담아 온갖 종합 세트 같은 직장인의 애환을 겪었다. 모든 직장의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다 내가 겪었던 적 있는 직장인들의 고충이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이 하찮다는 뜻은 아니다. 젠더 감수성의 부족 시대도 겪었고, 차별과 폭력, 고용 불안, 열악한 근무 환경, 임신과 출산에 따르는 서러움, 육아의 고충, 그리고 이제는 시대의 변화를 숨차게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는 시니어의 고충까지 모두를 겪어내는 중이다. '그만두려면 진작 10년 전에 그만뒀어야 한다'에서 '이젠 못 그만두지... 너무 멀리 왔어요'로 바뀌고, '그만두긴 뭘 그만둬, 얼마 안 남았는데 끝까지 해야지'까지 와버렸다. 함께 근무할 기회가 없었던 후배들과 코로나19 예방 접종 센터에서 함께 근무를 하며 접종센터 '개그 담당'인 내가 근무하는 날인 화요일과 목요일이 기다려진다는 후배들의 예쁘고 고마운 말이나, 동갑에 동창인 전종 센터 담당 과장인 친구가 '정년까지 함께 가자, 절대 중간에 그만두지 말라'는 말도 내겐 에너지를 주었다.


 딸은 겨우 두어 달을 쉬고는 다시 재취업을 했다. 들어가고 싶어 하던 바로 그 회사에 입사한 딸이 또 부럽다. '금요일에 퇴근하면서 토요일이지만 내일도 출근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던, 들어간 회사에 대한 딸의 행복한 후기를 들으며 아주 많이 부럽다. 놀랍게도 딸은 그런 나를 부러워한다. '어떻게 같은 직장을 30년 넘게 다닐 수 있으셨어요?' '응~ 나는 뭐 딱히 신념도 열정도 대의도 없었어.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엄마가 되라는 대로 되었지. 아마도 그냥 못 그만두어서? 다음에는 그만 둘 타이밍을 못 잡아서? 그러다가 지금은 그만두긴 뭘 그만두냐, 곧 그만 다닐 날이 오는데...' 이렇게 나는 오늘도 출근을 했다. 감자 캤다고 무거운 감자를 전동차에 싣고 오신 어르신의 그 감자 맛을 대신할 어떤 것을 아직 찾지 못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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