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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Dec 29. 2021

자식이 죽는다면 엄마는 살 수 없다.

가족을 잃는 일

 수의사가 내게 바가지를 씌웠다고 생각했다. 지난 추석 무렵 이틀 입원하고 검사 몇 가지 했는데 50만 원이 넘게 결재를 하고 나니 아픈 강아지가 딱하면서도 속은 쓰렸다. '투석'이라는 말이 나오니 결심이 굳어졌다. 그냥 집에 데리고 가서 편안하게 보내주기로 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강아지를 안고 울면서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의식불명에서 사흘 만에 깨어나셨을 때도 그랬다. 다행히 의식은 차리셨지만 대소변 감각을 잃어 가리지 못하게 되셨다. 쓰러지셨다가 의식을 되찾으신 아버지를 요양 병동에 입원시키고 제일 먼저 한 것이 노인 장기 요양급여 신청이었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을 모으지 못한 아버지를 위해 선뜻 기약 없는 요양 비용을 부담할 정도로 넉넉한 자식이 없었다. 오 남매 모두 제 밥벌이 정도는 하지만 한창 공부를 해야 하는 자식들을 거느린 탓에,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버지는 우선순위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 남매가 한 달에 이십 만원씩 부담을 해야 하는 요양원으로 모시면서 다들 울었다.  

     


 당연히 이별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강아지는 3주 정도 혼자 묵묵히 앓더니 서서히 식욕도 돌아왔고 살도 올랐다. 우리는 아주 빠르게 일상으로 되돌아갔고 동물병원에서 나올 때의 마음과 달리 이별 준비라고 할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시간이 두어 달 흘렀다. 그러나 사실 강아지의 신부전은 그냥 검사 수치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3주 전부터 갑자기 토혈을 하고 혈변을 보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음식을 딱 끊고 물만 겨우 마시면서 계속 혈변을 보는 강아지를 지켜보는데 애가 탔다. 마음 같아서는 서둘러 안고 동물병원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애써 꾹 눌러 참았다. 강아지는 차가운 욕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홀로 고독하게 고통의 시간을 참아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달라고 내게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안아 들면 곧바로 내 품을 벗어나 다시 욕실로 돌아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요양원에 입소하신 아버지는 약간의 치매 증상을 보였지만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 외엔 큰 문제없이 지내셨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는 동안 간간히 주말에 아버지를 보러 다른 자매들과 함께 가곤 했다. 원장 수녀님께서 치매 증상 확인을 위해, '베드로 할아버지, 지금 무슨 계절이에요?'라고 물으시면 '스프링 해즈 컴'이라고 대답하실 정도로 유머 감각도 유지하셨다. 그런데 6월이 되자마자 이상고온이 시작되고 원래 더위를 가장 싫어하시던 아버지는 견디지 못하고 하루하루 시들어 가기 시작했다. 식사를 못하시니 수액치료를 위해 병원에 실려가는 날이 많아지고 병원비가 번번이 추가 결재되니 자매들 중에서는 더러 지금보다 저렴한 요양병원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나오고 그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다. 그와 상관없이 아버지는 혼자 묵묵히 추운 겨울 건조한 바람에 시달리는 시래기처럼 빛바랜 식물이 되어 말갛게 야위어 가고 있었다.

   


 강아지가 음식을 끊고 혈변을 계속 보는 가운데 성탄절 전날이 되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성탄 성야 미사를 가지 않았다. 나의 신앙생활에서 성탄 성야 미사를 가지 않았던 것은 대학 졸업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잠시 친구 집에 가서 저녁을 얻어먹으면서도 마음은 온통 강아지에게 가 있었고 그렇게 성탄절이 지난 다음 날부터는 혈변 증상이 없어졌다. '좋아지려니' 기대하였지만, 여전히 밥을 먹지 않아 강아지는 뼈와 가죽만 남아 솜뭉치처럼 가벼워졌다. 거의 누워 있었고 잠을 자거나 물만 조금 마셨다. 기운이 없어서 눈도 뜨지 못하는 강아지에게 밥물을 받아 주사기로 입에 넣어 주니 받아먹긴 하였다. 밥물이 들어가면 잠시 눈을 뜨는 강아지를 보며 눈물이 솟았다. 분명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강아지를 보면서 사람의 과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놀랐다. 



 아버지가 식사를 잘 못 드시기 시작하면서 나는 매일 퇴근길에 요양원에 들러 아버지와 한 시간씩 함께 앉아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나누었다. 치매로 당신의 아들이 낳은 손자는 기억을 못 했지만 옛날이야기를 하면 대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금세 피곤해하시면서 내게 어서 집에 가라고 하시고 '가는 길에 나 좀 집에 태워다 달라'라고 했다. 

"너는 내가 얼마나 살 것 같으냐?"

아버지가 그렇게 물으셨을 때, '나는 아버지가 나보다 더 오래 사실 것 같아서 걱정이야'라고 대답했지만 가슴이 미어지고 목이 메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이미 당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셨던 것 같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로 앞이 가려져 운전을 할 수 없어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얼마나 울었던가. 그날부터 아버지는 억지로 한 숟갈을 받아 드시는 외엔 곡기를 끊으셨다. 안 넘어간다고 하셨다. 뭘 해서 갖다 드려도 딱 한 숟갈을 받아 드시곤 그만이었다. 다른 자매가 아버지를 저렴한 요양병원으로 옮기자고 했을 때, 나는 '그래 봐야 한두 달이니 돈을 더 내야 하면 내가 내겠다'라고 울며 말했다. 눈을 감으면 시체 같아 보였다. '아빠 눈 감지 마요!'라고 윽박지르듯 말할 뿐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해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 가슴 아파 돌아오는 길에 매일 울었다.


  바로 어제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나 거실 강아지가 즐겨 눕거나 앉는 쿠션 위에 늘어져 누워 있는 강아지를 보았다. 동공도 반쯤 열렸고 코에서 계속 물이 흘렀다. 늘어진 강아지의 열린 항문으로 숙변이 비져 나오고 있었다. 두려웠다. 사람의 임종 증상과 똑같은 강아지의 임종을 목격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두부야.... 사랑해. 너 때문에 행복했어...."

내 목소리에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강아지는 그때부터 줄곧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아주 느리게 숨을 쉬는 중이었다. 다행히 휴가를 내 출근을 하지 않고 있던 남편이 운전을 해주어 강아지를 담요에 싸서 품에 안고 함께 출근했다. 30분 정도 소요되는 출근길에서 강아지는 내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료소에 도착하기 전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관사 내실에 강아지를 눕히고 반쯤 뜬 눈을 감겨 주었다. 잠든 것 같이 곱게 누운 강아지 옆에 앉아 나는 울었다. 가슴이 아프고 복받쳐서 남편에게 기대어 소리 내어 울었다. 영원히 잠든 강아지 옆에 앉아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을 되새겼다. 지난 10년 간 우리 가족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었던 강아지를 마음에 담으며 자꾸만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자식이 이렇게 되었다면 아마도 나는 미치거나 정신을 잃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다시 병원으로 실려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셨고 3주를 병원에서 홀로 갈 길을 떠날 채비를 하셨다. 나는 당시 고3이던 큰 딸아이와 함께 매일 아침 출근길에 병원에 들러 아버지 옆에 앉아 기도를 하고 주무시기만 하는 아버지 귀에 '다녀오겠습니다. 기다리세요'라고 속삭였다. 아버지는 간혹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으로 경련을 일으키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손을 잡고 귀에 대고 소리 내어 기도를 하면 스르르 안정이 되곤 했다. 대구에 사는 딸이 오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아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불러 올렸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매일 아버지 귀에 대고, '아버지, 오늘 화요일이야, 토요일에 올 거야'라며 아버지를 붙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대구에서 올라온 딸을 만나고 그다음 날 자식들이 둘러 선 가운데 우리와 이별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 것이 감사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우리들은 이별의 과정을 다 함께 서로에게 의지하며 겪어 내었다. 함께가 아니었다면 그 얼마나 힘겨운 시간이었을까.

      


 강아지와 이별하는 시간에 남편이 함께 해 주어서 감사했다. 혼자서 겪어내야 했다면 그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는 강아지를 집안에서 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강아지가 늙고 병들어 퇴행되니 매우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아내를 위해 묵묵히 인내해주었다. 결국 싫어했던 이가 죽은 강아지를 위해 땅을 파고 묻어주는 아이러니라니.... 땅이 얼어서 삽으로는 팔 수 없었고 이웃 어머니에게 곡괭이를 빌려와 남편이 땅을 파야 했다. 혼자였다면 그 어떤 것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이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한꺼번에 소모되는 힘겨운 일이다. 예전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신부님을 조문한 일이 있었다. 평소 온화하고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던 분이었는데 그 순간만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외로워 보였다. 기대고 사랑하던 대상을 잃은 자들은 그렇게 외롭고 약해 보인다. 이별을 겪는 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이들이 위로를 주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별은 그 어떤 존재와 하는 이별일지라도 그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상실감의 종류는 똑같다. 그러니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 그 누구도 왈가왈부해서는 안된다. 그냥 말없이 곁에 있어 주거나 묻고 따지지 말고 위로의 말을 건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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