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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13. 2022

내 어머니의 백세 인생

 팔순을 맞으신 엄마도 운 적이 있었을까

 


 딸아이가 미대 재학 시절 그린 내 어머니의 초상화다.  35년을 매일 햇빛에 내놓고 다닌 얼굴은 흑백사진처럼 검게 탔고 그 얼굴에 가득한 잡티 하나하나 그리고 세월이 담긴 주름살까지 섬세하게 그린 내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구겨진 먹지 같은 어머니의 얼굴은 사진을 찍는 손녀를 바라보며 진심 가득한 사랑과 기쁨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누가 봐도 거친 세월을 살아온, 평탄하지 않았던 길을 쉬지 않고 걸어온 광야 위에 선 나그네 같은 낯선 모습의 내 어머니. 내 어머니가 곧 팔순을 맞으신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팬션을 빌려 스물한 명 가족 잔치를 할 계획이고 축하 동영상과 축가, 편지 낭독의 순서도 있다.


 

 백세 인생

사십 세에 저 세상에 날 데리러 오거든

우유배달 바빠서 못 간다고 전해라


오십 세에 저 세상에 날 데리러 오거든

일 년마다 자식 결혼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육십 세에 저 세상에 날 데리러 오거든

손주 손녀 키우며 우유 배달하랴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 날  데리러 오거든

치매 남편 수발드느라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 세상에 날 데리러 오거든

이제야 자식 덕 좀 보고 더 있다간다 전해라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백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또 넘어간다.


  어머니께

 아버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하던 대로 퇴근길에 아버지 계시는 요양원에 들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는 아버지는 조용히 누워 창 밖으로 보이는 성당의 예수 십자가 상을 응시하고 계시곤 했지요. 눈을 감고 있으면 영락없이 시체처럼 보이던 아버지를 보며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구나, 싶어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빠, 아빠는 인생에 후회가 있을까?"

"나는 인생에 후회는 없지..... 난 나 하고픈대로 다하고 살았으니까"

"그러면 엄마는?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은 없어?"

"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 나 때문에 고생만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딱한 마음이 드는 것은, 평생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들을 진작 엄마께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말로라도 미안하다고,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했다면, 그걸로 죽기 전에 두 분이 화해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지금까지 우리 중 누구도 엄마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접으시라고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자식인 우리들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도 꽤나 오래 사라지지 않았었으니까요.


 비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새벽 우유 배달을 나갔다가 속옷까지 몽땅 젖은 채 추위에 떨며 들어온 엄마를 보자마자 아버지의 첫마디. 안방 벽에 느긋하게 기대어 TV를 보던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고 어머니를 보며 그러셨다고 했지요.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밥 줘. 얼른 밥 먹고 가게 나가봐야지...."

그 사건 하나로 아버지는 그야말로 우리 가족의 공공의 적,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남자의 절정을 보여주셨어요. 공무원으로 퇴직하신 아버지는 작은 수리점을 열고 소일하고 계셨고 가게는 술친구 밥친구들 뿐이었다고 했지요. 그래도 타고난 성정이 고지식하셔서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의 루틴을 평생 고수하셨던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부단히도 힘겨워하셨었어요. 돌이켜 보니 아버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도 잘 모른 채 돌아가셨어요.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퇴근길에 보러 가서 아버지가 평생 엄마에게 잘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면, 잘 기억을 못 하거나 그게 왜 잘못인지 이해를 못 하셨더랬어요.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홀가분해하셨지요. '해방된 민족'이라는 엄마의 표현이 참 웃기고도 슬펐어요. 엄마는 자식들에게 짐 지우지 않으려고 치매가 걸린 아버지와 4년이나 함께 지내면서 말로 다 못할 고초도 겪었지요. 지남력이 없어진 아버지는 새벽에도 엄마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들어올 때 담배를 사 오라고 하시거나 새벽에 냉장고를 열고 반찬을 꺼내놓고 밥을 잡숫고 앉아 계셨다고도 했지요. 사실 우리들도 엄마와 함께 당연히 고통 분담을 해야 마땅했지만 십 년 전 그땐 아이들도 한창 중고등학생들이어서 직장으로 집으로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의 고통을 외면했었어요. 엄마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70대였던 엄마 혼자 전적으로 짊어지기에, 그 생활고며 치매 남편 부양은 너무나 큰 짐이었지만 알면서도 우리는 외면했습니다. 엄마께서 '니들 힘들게 하기 싫고 아직은 내가 다 알아서 할 만하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면죄부처럼 여겨졌고 합리화의 수단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병든 남편 부양의 짐에서 해방된 지 겨우 일 년 남짓, 엄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을 세 번이나 들락거릴 때 진작 오토바이 우유배달을 그만두었어야 했다고 가슴에 사무치게 후회를 했습니다. 엄마가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시면 우리는 매일 울면서 다닐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엄마의 척추는 무너져 뭉개지고 무릎은 녹아내려 걸음을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 거기에 천식을 오래 앓던 폐는 사고로 다쳐 그마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숨이 차게 되었을 때, 엄마가 오랜 병상 생활로 근무력증이 와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한 채 앰뷸런스에 실려 대구로 내려갔을 때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는지요. 이제 좀 홀가분하게 살아보려는 것조차 허락이 안 되는 엄마의 삶이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인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살아온 거칠고 궁색하고 막다른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밝은 얼굴에 환하게 웃으며 신바람 나게 오토바이를 부릉부릉 시동을 켜고 나가시는 어머니의 든든했던 뒷모습, 어린 아기들 양식을 배달한다는 소박한 사명감, 수금 계산서를 전할 때 사비로 요구르트를 다섯 병 한 세트씩 넣어드리며 감사하는 마음,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기꺼이 말하는 희생, 값이 저렴하지만 영양가 있는 식사를 준비하시던 지혜, 자녀들에게 본보여 주시던 그 모든 예절과 겸손.... 그 모든 덕을 겸비하신 미스코리아 진선미 어머니.


 어머니, 오 남매를 위해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으셨지만 어머니 덕분에 '지금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이 웃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배워 깨닫습니다. 나 아닌 타인, 남편, 자식들을 위한 희생이 어머니 지금의 시간에는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시겠지만 부디 하느님 앞에 가는 그날 '잘했다, 착한 종아, 나와 함께 잔치에 들자'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부디 그 어떤 날까지 신망애를 잃지 말고 간직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한다고 백 번 말해도 부족한 나의 어머니, 온갖 고생과 무수한 오토바이 사고로 몸은 엉망이 되었지만 오 남매에게는 엄마의 영혼은 여전히 아름다운 백화와도 같습니다. 어머니가 늘 즐겨 부르던 그 노래를 기억해 보며 마치겠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우유배달 삼십 년 세월~ 우리 자식 오 남매들 다시 만나서 못다 한 정 나누는데 어머니~ 덕디 아주머이~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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