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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07. 2022

말이라도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이유

치유의 명약,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초의 코로나 선별 진료소 근무가 있던 날.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순서가 돌아오지만 선별 진료소 업무는 여전히 힘겹다. 더위 탓에 열어 놓은 검체 채취실 문 너머로 이글이글 타는 태양의 열기에 정면으로 마주 서서 하루 이백 여명을 응대하여 불편하기 짝이 없는 커다란 장갑 위에 다시 일회용 장갑을 매 번 갈아 끼우는 일부터 쉽지 않다. 영락없이 마치 마비된 두 손을 놀려 아주 섬세한 작업을 해야 하는 극한 작업자의 기분이다. 다행히 나이 드신 어르신들까지도 이제는 인식이 되어 일명 '진상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아서 초창기보다 감정은 덜 소모되지만 온종일 땡볕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허리가 아프도록 서서 손 안이 축축해질 정도로 고무장갑을 끼고 검체 채취를 하는 일은 여전히 힘겹다.

 

 그날도 선별 진료소가 문을 열기도 전에 이미 줄을 늘어선 사람들을 보며 마음을 단단히 동여 매고 검체 채취를 하는 가운데 낯익은 어르신이 불쑥 들어섰다.

'이분은......... 아! S님이닷!'

순간 마음이 얼어붙어 혹시 나를 알아보면 어쩌나, 하였지만, S님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하고 유리벽 너머에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예의 바르고 협조적으로 검체 채취에 임했다. 공손하고 선한 눈빛으로 순순히 내게 코와 목을 열어 주고 '감사하다'라고 하셨으며 '수고하라'고까지 말하고 검체 채취실을 나가는 S님을 보며 눈을 의심했다. '감사'와 '수고'라는 단어를 사용할 줄 아는 분이셨다니. 저분에게 지난 십 년 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혹시 내가 나였다는 걸 알았다면 어떤 태도로 대하셨을지도 궁금하긴 했다.


 첫 근무지였던 교동도 근무 3년 만에 드디어 육지로 발령이 난 마을로 갔을 때, S님은 그 마을에서 갓 선출된 이장이었다. 나의 전임자가 알코올 중독자에게 스토킹을 심하게 당하여 퇴직을 한 후임이 또 미혼인 진료소장이었으니 이장님을 비롯한 몇몇 마을 분들은 매일 해가 떨어지면 진료소로 오셔서 두어 시간씩 함께 앉아 불침번을 서주실 정도로 정답고 따뜻한 마을이어서 나름 즐거운 마음으로 근무에 빨리 적응하였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이장인 S님과 잘못된 만남은 그 마을에서 근무하던 대부분의 시간 내내 나를 괴롭게 했었다. 우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그곳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던 어느 대낮에 얼굴이 불콰한 이장이 면 사무소 남자 직원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이장은 마치 주인인양 소파에 두 팔을 척, 걸치며 앉더니 내게 '김양, 커피 좀 타 와봐'라고 했다. 그는 쉬지 않고 일면식 없는 우리 친정아버지를 칭하며 '김 기사 그 양반'이라고 했고,직업군인인  남편의 계급을 언급하며 거들먹거렸다. 분명 낮술에 얼굴이 붉었지만 취하지는 않은 상태였고 '여기는 진료를 받는 공공기관이고 커피를 드시려면 다방에 가셔야 한다'라고 대답하는 나를, 이장은 매섭게 노려보았고, 쩔쩔매며 '이장님, 나가시죠, 제가 가서 커피 대접하겠습니다.' 하던 면직원에게 이끌려 나가면서 웅얼웅얼 욕설을 내뱉었다.


 그날로부터 그가 이장 일을 맡아보던 6년 간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그 문제 하나만 빼면 6개 마을의 주민들 모두가 나를 아껴주고 존중해 주고 서로 감사와 정을 나누었다. 그래서 이장인 S님의 패악질에도 나는 그 마을을 떠나기 어려웠다. '소장님, 우덜 죽을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라고 하시는 어르신들을 차마 버리고 떠나기 어려웠다. S이장은 끊임없이 '애 낳으러 가서 오지도 않는다' '반바지를 입는다' '자리를 매일 비운다' 등등으로 민원을 넣곤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온갖 짓을 다하며 나를 '자르겠다'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는 결국 나를 자르지 못했고 그의 6년 이장 임기는 끝이 났다. 이후 십 년을 더 그 마을에서 근무하다가 섬으로 발령이 나서 떠난 나를 일 년 만에 다시 그 마을로 불러들인 것 역시 민원이었다. 내가 떠난 그 마을의 '꼬부랑 할머니들' 서너 명이 면장님을 찾아가 '어디다 얘기해야 하는지 몰라서 여길 왔다'라고 하며 '먼저 있던 진료소장으로 다시 해달라'라고 떼를 쓰셨다는 이야기는 거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S님은 언제나 나를 미워했고 내 욕을 하며 이를 갈았다. 나 역시 그에 대해서는 좋은 마음을 갖기 힘들었고 마음속으로 '당신 딸도 이다음에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아기를 낳겠지,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저주와 원망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의외의 반전은 늘 생각지 못할 때 나오는 법이라고 했던가. 고추를 반으로 갈라 햇볕에 말리는 가을 어느 날 S님이 고추 가르는 기계에 고추를 넣다가 손을 다쳤다. 낮술을 한 잔 걸쳤고 손을 다쳤으니 운전을 할 수 없었고, 어쩔 수없이 다친 손을 수건으로 둘둘 감고 진료소로 달려왔다. 소독을 위해 다친 손을 살폈다. 손가락 등 쪽 네 개가 나란히 기계에 찢어졌는데 안쪽 깊은 부위를 살펴보니 인대가 손상된 것처럼 보였다. '그냥 약이나 발라달라'는 그를 내 차에 태워 병원 응급실로 갔다. 늦은 오후였고 마침 응급실을 지나 퇴근하던 병원장과 마주쳤다. 이미 친분이 있어서 반갑게 인사하는 내게 병원장이 '어쩐 일'이냐고 물었고 다친 S님의 손을 살펴보더니 '야, 인대 나갔다, 당장 수술실로 올려라'라고 말했다. 그 외과의였던 병원장은 인대 복구 수술을 해주며, 상태를 잘 파악하고 빨리 후송을 한 나를 칭찬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S님은 내게 큰 은혜를 입었다며 나를 대하는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고 이후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 험악했던 지난 시간들이 없었던 일인 양 행동했다.


 그분이 아무리 내게 친하게 굴고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농사지은 것들을 올 때마다 손에 들고 오고 다른 이들에게 내 칭찬을 하고 돌아다녀도 그를 대하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겉으로는 잘 대하지만 꼬깃꼬깃 좁아진 마음의 주름이 좀처럼 펴지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고백건대 검체 채취실에 들어서는 S님의 늙고 초라하고 비굴해 보이기도 한 현재의 모습을 보며 부끄럽게도 속이 시원했다. (내 본성은 얼마나 얇고도 얇으며 부족하고도 부족한지.....)


  몇 년 전 조카의 결혼식을 위해 시댁에 내려갔던 날, 큰 시숙께서 내게 그러셨다.

"재수 씨, 예전에 재수 씨가 명절에 상주에 못 내려온다고 하면 잔소리도 하고 싫은 소리도 하고 했던 거 미안합니다. 나는 그저 가족의 화합을 중요하게만 생각하고 그걸 깨는 일로 보이면 무조건 화를 내기만 했습니다. 제수씨 입장에서 생각을 몬했습니다. 옛날에 제가 그랬던 거 다 미안합니다."

나는 가슴이 뭉클했었다. 살면서 듣지 못할 줄 알았던 말이었다. 시어머님도 시댁 가족들도 내게 사과를 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큰 시숙이 하신 그 사과의 말이 내 가슴 깊이 덮어 두었던 상처에 마데카솔이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큰 시숙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사라지고 지금은 큰 시숙을 생각할 때 함께 떠오르곤 하던 상처는 없어졌다. 상처는 봉합되어도 흔적은 남는 법인데 그 상처는 단단하고 맨질맨질해져서 만지고 눌러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아.....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도, 세월호 희생자의 유가족들도 그렇게나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긴 시간을 싸우는구나....'

그깟 말로 하는 사과가 무엇이랴,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면 다냐?라고 하지만 진심으로 화해를 원한다면 대충 이심전심이라며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말이라도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사과해야 한다. 나이 드신 분들일수록 미안하다는 말을 잘 못한다. 들어 본 적이 별로 없고 해 본 적도 없어서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 어려우랴. '미안해요'라는 말은 마음 치유의 명약 중 명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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