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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Sep 27. 2022

뭐라고요? 제5 공화국이요?

동상이몽이어도 좋으니 부디 꿈은 꾸며 살길 바랍니다.

  보건진료소에 근무할 새로운 신규 보건진료소장 후배 5명이 배치를 받았다. 신규 진료소장님들은 모두 종합병원 이상 경력의 간호사로 길고 긴 6개월의 트레이닝을 받았고 모두들 젊고 활기차고 스마트한 능력자들이다.  나보다 나은 후배들이 들어와 내 마음도 그 어느 때보다 기쁘다. IMF 이후 공무원 인력 구조조정 이후 거의 20년 간 막내였던 내게 후배들의 존재는 참으로 소중하다. 그중 한 명이 내가 임시로 파견 근무를 다니던 교동도에 배치되어 환영의 의미로 점심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보건지소의 한의사, 치과의사, 일반의 등 공중보건의사가 세 명이고 보건지소 건강증진 업무 담당자와 진료업무 담당자가 두 명, 그리고 내 바로 위의 선배 진료소장과 신규 진료소장까지 모두 8명이 함께 식사를 하니 야외 테이블이 있는 식당을 예약했다. 서쪽 끝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한여름 더위를 식혀 주며 세대 간 차이는 있어도 한 직장의 동료라는 것 하나만으로 기분 좋은 식사가 이어졌다. 


 "보건진료소의 처음 시작은, 제5 공화국이 출범되던 1980년도에...."

선배의 말에 나를 뺀 6명이 일제히 놀랐다. '제5 공화국이라고요? 그때 우린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교과서에서 본 적 있어요...' '소장님은 도대체 몇 살이신 거예요?' 등등 반응도 다양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이 시골에 배치되는 근거 법안인 '농어촌 등 보건의료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자세하게 아는 이들도 관심을 가졌던 이들도 없었다. 

"하아....... 내가 굉장히 늙었긴 했나 봐요. 허긴 내가 한 달 후에 정년퇴직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선배의 말씀에 모두들 당황하며 손사래를 친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나 역시 아직은 아니지만 정년이 그리 멀지 않은 사람이고 심지어 제5 공화국 시절에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 자리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제5 공화국은 역사 교과서와 오래된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루던 주제일 뿐이니 제5 공화국을 겪은 사람과 함께 밥을 먹어주는 이 MZ 세대에게 나와 선배는 마치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처럼 신기하기도 하겠다. 


 제5 공화국은 '삼청교육대'를 만들에 국민을 억압하는 채찍과 한편으로는 '보건지소와 보건진료소'를 만들어 무의촌인 농어촌을 위해 '특별조치법'을 제정하는 당근도 함께 사용했다. 사실 보건진료소에 간호사가 아닌 의사를 파견하려고 했지만 의사들은 거부했고 대한간호협회에서는 간호사를 별도로 훈련시켜 파견하자는데 동의했다. 예나 지금이나 간호사들은 그 희생과 책임감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급히 법을 만들고 급히 연구를 하고 미국의 '보건의료 거점 제도'를 도입하긴 했지만 현실은 기반 조성이 되어 있지 않았고 1980년에 파견된 대선배들은 시골 마을에서 무상으로 내놓은 방 한 칸을 얻어 직접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아궁이에 불을 때 가며 정부에서 급히 조달해 준 약품 몇 가지를 가지고 진료소 업무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온다. 지금이야 정규직 공무원이지만 내가 처음 입사했던 때 역시 민간인으로 자치단체장의 위촉을 받은 신분이었고 '공무원에 준한 급여' 조건이었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66만 원의 급여를 받다가 처음 진료소장으로 받은 급여가 33만 원이었다. 참고로 4년제 대학 나와서 삼성물산에 다니는 대기업 사원이 100만 원을 받는다고 '와아~부럽다!'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조건으로 그 일에 투신한 사람들은 소외된 지역의 국민들에게 보건과 의료의 혜택을 받게 하겠다는 희생과 헌신이었지만 지금의 세대들에게 '그냥 바보'로 여겨질 것이다. '그땐 그랬어....'라고 하면 내 딸들도 '헐, 왜?'라고 반응하니 말이다. 


 지난주쯤 보건지소장 대표와 만나 이런저런 현안을 나눈 적이 있었다. 전문의 출신 공중보건의 사라 그런지 제법 생각의 스케일과 깊이가 남다르긴 하지만 그 역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이 특별한 직업에 대해 이해하거나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조급함이 든다. 누구도 '라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도 굳이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아버지가 6.25 당시 피난하는 길에 먹을 것이 없어서 사나흘에 한 번 죽을 먹었다고 하면 '라면이나 햇반'을 이야기하는 세대에게 도무지 납득시킬 자신은 없어도 누군가는 반드시 기록해야 할 잊히고 있는 역사라는 조급함이 몰려왔다. 엽전을 왜 엽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만큼이나 궁금하지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는 내 직업의 역사지만 생각해 보면, 의료와 교통의 발달로 곧 없어질 직업이라고 여겨졌던 보건진료소와 보건진료소장의 기능이, 인구의 급격한 노령화로 인해 다시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리 생각하였고 통폐합을 고민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현실은 실버카가 아니면 집 밖을 나설 수 없고, 누가 데려가 주지 않으면 혼자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가서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것에 자신 없어하는 어르신이 가득하다. 이십 년을 한결같이 아직도 보건진료소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안타깝게도 민간 의료기관 원장님들, 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해가 얽혀 있는 이들, 가장 안타깝게도 농촌의 현실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 보건진료소의 순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답답한 소리를 한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말들로 가득한 고지서나 안내문을 받았다면 멀리 사는 자녀들에게 전화를 하느니 진료소장에게 달려온다. 진료소장인 나도 뭔 말일인지 모르는 경우엔 최소한 발송처에 문의를 해줄 수는 있으니까. 휴대폰이 갑자기 안되어도 진료소장에게 달려오면 이렇게 저렇게 해결을 해 드린다. 특히 자신이 큰 병원의 어떤 과로 진료를 가야 하는지 모르니 가까운 진료소장에게 상담을 청하는 분들도 많다. 동네에 애들이 바글바글하고 방과 후 수업이란 것이 없던 시절엔 모내기 벼베기로 바쁜 철에 애들이 학교가 끝나면 열댓 명씩 진료소로 달려왔다. 진료소 마당에서 저희끼리 놀면 진료소장인 나는 잘 노는지 살피며 부침개도 부쳐주고 다 함께 유부 초밥 만들기도 했었다. 지금은 너무 춥거나 더울 때 버스를 기다리느라 진료소로 들어오신다. 그분들을 상대하며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일상이다. 시골 동네 그 어떤 이정표도 없는 이 마을에서 초행길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공공기관이라는 존재는, 진료소 이용률이 낮으니 차라리 건물과 부지를 매입해 세외 수입을 늘리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앉아서 예산 낭비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본인 부담금이 무료인 진료소가 소득이 없는 노인들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건강보험 청구로 공과금과 의약품을 구매할 정도 이상의 수익을 내는 진료소는 워낙 옛날부터 있어 왔기에 마을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있는 것'이라 여기지만, 막상 이것이 없어진다면 노인들이 느낄 불편과 박탈감은 숫자로 세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비록 보건진료소 제도가 이제는 역사책에 나오는 '5 공화국'의 유산이지만, 온갖 국민을 억압하던 그 모든 제도들은 폐지되고 개정을 거듭하도록, 마을을 방문하여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들여다보아주고 혈압과 혈당과 콜레스테롤을 관리해주며 자식 대신 푸념을 들어주고 건강을 살펴 제때에 병원에 갈 수 있도록 미리 예방을 해주는 곳이기에 80년대 이후로 내내 긴 세월 이 제도가 유지되었으리라. 인구 절벽으로 5, 60대가 드문 이 농촌에서 어르신들을 돌보고 챙기는 일들을 국가가 해드린다는 자부심으로 오늘도 나는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나의 뒤를 따라 이 길에 들어선 후배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물론 나와는 다른 꿈이겠지만, 동상이몽이어도 좋으니 부디 이것이 그저 밥벌이의 수단만이 아닌 가치 있는 꿈을 꾸고 그 가치를 이루는 수단도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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