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않기 위한 발걸음
구매한 지 이주밖에 되지 않은 아이폰에서 발열이 느껴졌다.
마침 이전 기종과의 크기 차이로 불편함과 고민을 느끼던 터라 일단 서비스 센터를 예약하고 방문했다.
크게 시스템이나 하드웨어 방면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몇 번 이런 이슈들로 애플이 나를 번거롭게 했던 전적이 있었던지라 귀찮음을 이기고 부지런하게 바로 센터를 방문했다.
그날 나를 응대한 직원은 총 3명이었다.
나는 예약시간보다 아주 일찍 도착을 했고 그래서 예약시간 전에 서비스 상담을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그때 나를 응대한 직원 한 분과
상담 대기를 하며 필요했던 에어팟을 구매하였고 내가 기존에 사용하던 에어팟과 그 이후 새롭게 출시된 에어팟을 비교하고 이런저런 궁금한 점들을 묻고 답해주던 직원이 한 분 있었다.
그리고 기술 상담을 해준, 내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시스템 점검을 담당해 준 마지막 한 분이 있었다.
나는 이 셋 중 누구에게 시선을 빼앗겼을까.
상담을 받으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대화가 왜 이렇게 즐겁지? 나는 왜 이렇게 웃으며 기쁘게 말하고 있지?
상대와 내가 나누는 대화는 오직 기술적인 문제와 해결방안, 평소 애플 제품을 사용하면서 들었던 고민이나 궁금함 뿐인데 시간이 얼마가 흘렀는지 모르게 느껴질 만큼 대화의 온도와 분위기가 산뜻하고 유쾌했다.
그래서 한 번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보았다.
도무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 시선을 돌려 눈을 정확히 마주칠 때처럼 나는 그렇게 그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대화를 하면서, 평소 사람을 잘 기억하고 마주하면서, 이상하게 내가 지금 대화하고 있는 상대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는데 머릿속에 기억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 제대로 보지 않았던가 아니면 눈을 들어 보았으나 순식간에 기억에서 사라졌던 건가.
그 사람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상황, 실루엣, 인상들이 기억나는데 이상하게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지 그 찰나에 기억나지 않았다. 실은 처음에 나와 비슷한 또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 다시 보았다. 나이는 나보다 많은 것 같은데 그래도 많아야 5살일 것 같았다.
약간 나이가 가늠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는 몇 가지 결정해야 할 사항과 지켜보며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애플 스토어를 나왔다.
밥을 먹으러 걸어가는 내내 이상하게 들떴다. 계속 직전의 대화의 잔상들이 기분 좋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았다. 내가 왜 기분이 좋은건지, 방실 들뜨는지, 에어팟을 새로 사서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꼼꼼하고 친절하게 응대를 해줘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그 친절과 밝은 에너지를 뚫고 내가 이성적 호감을 느껴서였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당장 다시 스토어로 가 그 사람을 마주할 정도의 확신은 없었고 자신도 없었다.
확신이 없기에 지금 바로 가서 그 확신을 확인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나는 아직은 부끄러움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아니, 섣불리 이 감정을 다루기에 사랑 앞에서 너무 진심이고 진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주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그가 계속 생각나면 가서 내 마음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 내내 그 사람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 살피다 보니 되려 생각이 더 많이 나는 나날이었다.
일주일이 지났고 실은 나는 이미 그전부터 날짜를 꼽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도저히 스토어에 방문해서 그 사람을 찾고 그 엄청난 쪽지를 건네주고 올 자신이 없어 계속 계속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 어느새 사랑 앞에서 무력하게 용기를 내고 있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처럼,
해내야만 하는 어떤 사명이 주어진 것처럼,
나는 그렇게 다시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었다.
이번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지난번의 후회가 있어서다.
작년 여름, 토요일 아침 9시 56분, 강남역 버스정류장
그곳에 내리는 그 사람을 따라 내리지 못한 게 두고두고 미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때가 내가 누군가를 보고 처음으로 마음을 설레고 이유 없는 호의 감정을 감각하기 시작한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마 다시는 그렇게 완전한 나의 스타일은 만나지 못하지 않을까.
병원을 가는 길이라 나는 많이 초췌했고,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고, 버스 뒷문 바로 옆자리에 앉아
출발하면 곧 머지않아 정차하는 이 버스가 언제쯤 시원하게 사거리를 통과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버스기사님 바로 뒷좌석에 앉아있다 부드럽게 일어나 뒷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 사람을 보고
그 걸음의 보폭과 수에 따라 점점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그 사람의 속도만큼 내 마음에도 쿵, 쿵, 하고 울림이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뒷문으로 걸어올수록 첫눈에 그를 보고, 걸어오는 그를 마주하고, 내 자리에 앉아서 그의 다가옴을 느끼는 그 모든 찰나의 순간에 성. 큼. 성. 큼
그 발자국에 맞춰 그가 더, 더 선명히 보이던 또렷해지는 윤곽의 찰나가 있었다.
‘따라 내려! 따라 내려!’ 마음속에 외치는 목소리와 동시에 지금 내 모습이 느껴지고, 이런 마음이 처음이라 ‘진짜 따라 내려?’하는 혼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에 버스는 출발했다. 그때 생각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생각나면 그 시간에 다시 이 자리에 오자고. 조금 일찍 와 버스 정류장에서 그를 기다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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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는 계속 내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했다. 어떤 이유를 들어도 결국 가지 않은 것이 되겠지만. 그때 알았다.
한 순간을 놓치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다시 되돌릴 수 없이 빠르게 통과해가는 지금 당장의 기회란 게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유실된 기회가 내내 나를 그 순간으로 데리고 가 그때의 행동을, 다른 가능성을 곱씹게 만든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줄곧 회상과 상기와 다른 가능성을 점치며 내 행동의 선택지들을 가늠하게 하고 그 선택지로 인해 파생될 어쩌면 오늘이 되었을 저편의 현실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래서 이번에는 다르고 싶었다. 달라야 했다. 아니 이미 달라져 있었다.
나는 후회가 남을 선택 같은 건 남겨두지 않는 사람이었고, 미련이 될 만한 것들은 애초에 소거하려는 사람이며 후회와 미련이 된 경험을 두고 다시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애플 스토어에 갔다. 8일 만에.
시간이 너무 지나면 안 되는데,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아 초조해하면서,
너무 긴장된 마음으로 그 크고 투명하고 번쩍이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쪽지를 건넸을까.
쪽지에는 어떤 말이 담겨 있었을까.
이번에는 정말 쪽지를 건네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