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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Jun 12. 2024

22만 원어치의 호감 고백

애플케어를 들어버리고 오다


 한 시간 반을 매장에 있으니 온 직원이 내 마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이 매대 저 매대를 옮겨 다니며 애플의 전 제품을 오늘 꼭 다 알아내고 말거야! 라는 굳센 의지와 포부가 담겨 있는 사람처럼 아이패드, 맥북, 아이폰, 케이스 온갖 기기와 기종들을 다 보면서 도통 나갈 생각을 안 하다가

어떤 특정 직원이 나오면 그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직원들과 특히 처음에 내가 그 사람을 찾아 물었던 직원이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흘끔거리고 쳐다보는 게 내가 자꾸 그 사람이 나오면 쫓아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보고는

'아 저 고객이 지금 제품을 보러 온 게 아니구나! 저 사람 때문에 왔구나!' 하고 알아챈 것 같아

나는 그만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작전변경.

눈치챘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는 사람한테 도움을 청하자.

나는 어차피 애플케어를 고민하고 있으니 애플케어를 물어보며 실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밝히는 계획을 세웠다.


애플케어를 들어놓고도 기한이 지났다고 착각해 서비스를 못 받고, 3주 전 울며 겨자 먹기로 기종을 바꾼 나는 애플케어를 들 필요와 당위성에 대해, 고민케 하는 지점에 대해 한참을 처음의 그 직원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도 애플케어를 드는 쪽으로 마음이 거의 기울었지만 그래도 기기값에 보험료까지 금액적 부담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던 터라 일단은 한 달의 유예기간 내에 나의 사용습관에 따른 미래의 파손 가능성을 점쳐보기로 했었다. 이후 일주일 사이에 휴대폰을 두 번이나 떨어뜨렸고 강화유리를 부착했음에도 모서리로 유리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리는 걸 보며 나는 애플케어를 드는 게 낫겠구나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상담 끝에 서비스 가입을 하고 나는 이만 가도 된다는 직원의 말에 또 0.3초 정도의 돌처럼 굳어버리는 마음을  감각하며, 그 긴장을 뚫고 아까 그 직원을 찾은 이유에 대해 주절주절 말하고 있었다.


그 직원분은 너무 놀라 하며 뒷걸음질 치셨다.

그리고 전. 혀. 몰.랐.다. 고 하셨다.

역시 내 마음을 내가 너무 잘 아니까 생겨나는,

남들도 다 내 마음을 알아버릴 것 같은,

사랑할 때면 생겨나는 순진하고 순박한 마음이

너무 웃기고 귀엽다.




 나는 실은 지난주에 기술서비스를 받으러 왔을 때 대화가 너무 즐겁고 그분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에너지가 너무 밝고 좋아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 방문했다고. 그런데 확인했더니 그래도 이 사람이 궁금해 쪽지를 건네고 싶다고.

여러 번 타이밍을 보고 말도 걸었는데 계속 순식간에 나왔다 들어가서 붙잡을 새가 없었다고.

이제 그만 전해주고 가고 싶다고.

이런 말들을 폭풍처럼 쏟아 내었다.

그러면서 이런 적이 제 인생에서 처음인데 너무 떨리고 긴장되고 녹아내릴 것 같아서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시냐고도 물어봤다.

아 너무 서툴고 순수한 나였다.


직원분은 본인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너무 알 것 같다고, 그 긴장을 너무 이해한다고, 그래서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자기한테 쪽지를 주면 대신 전해주겠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래도 당사자가 직접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의견을 구하면서, 어차피 마음을 표현하는 일인데 누가 주든 그건 상관없는 일인 것 같다는 말씀에 끄덕이면서, 동시에 그래도 이만큼 노력했는데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직원분은 그럼 본인이 퇴근을 했는지부터 확인하고 퇴근을 안 했으면 불러오겠다고 말하고는 5분을 넘게 매장을 돌아다니며 그 사람의 소식을 수집해 왔다. 아, 너무 신나고 이상한! 여인들의 연대이다!


그렇게 수집해 온 그의 소식에는

그는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업무로 중간에 자리를 비우고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대신 쪽지를 전달해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휴, 아쉽지만 또 어쩐지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었다.

그렇게 대신 전해주는 손길에 쪽지를 건네는 건데도 호주머니에서 노란 쪽지를 찾는 손은 덜덜 떨리고,

그 작고 소중한 쪽지를 손안에 품고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는 일이 마치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는데 공개고백하는 것마냥 부끄럽고 긴장되고 뜨거워져서,

나는 녹아내릴 것 같은 손을 애써 힘을 다해 꼭 쥐고 있다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아, 이토록 맹렬하고 간질이다 못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누군가를 향한 호감의 마음이란.

그걸 있는 힘껏 다해 꺼내 보이는 용기란.

역시나 너무 대단하고 멋진 일인 것이다.


이제 공은 내 손을 떠났고

나는 쪽지를 건네주었고, 이제 다음은 그의 몫이다.

나는 이미 내 마음을 전한 것만으로도 진심을 다했고 기쁘고 후련하고 모든 게 다 시원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이지 너무너무 좋았다.

내가 너무너무 멋있어 미칠 것 같았다.

새로운 종류의 도파민이었다.


누가 봐도 정말 쪽지를 주는 게 처음이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알 정도로

투명하게 이 긴장과 부끄러움을 직원 분께 다 내보이고

나는 후다닥 애플 스토어의 그 장엄한 문을 열고 나왔다.


드디어! 바깥으로!


한 시간 사십 분 만에 맡은 바깥공기는 실로 상쾌했고,

나는 그대로 친구도 버려두고 역 방향으로 질주했다.  




 이제 연락이 오고 안 오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용기를 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이미 다 얻은 사람이 되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씩 한 걸음씩 내 속도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내 결대로, 은은하고 진득하게 사랑의 용기와 경험을 쌓아가는 내가 기특했다.

살면서 내가 마음에 든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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