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과 김광석

김광석이 김광석 한 날

by 명랑도리





- 선생님은 왜 그런 구린 음악만 들어요?


건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10%는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였고, 나머지 90%는 갈굼의 표현이었다.

'노친네라 옛날 음악을 듣는 건 알겠는데, 구린 건, 맞긴 맞지 않나?' 대충 이런 의미였다.


숙제를 안 해서 한참 욕을 먹고 나면, 건은 꼭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었다. 숙제를 안 하면 힘들여 비싼 과외를 하는 보람이 없으니, 다른 건 몰라도 숙제는 꼭 해야 한다,며 첫 수업에 엄숙히 선언을 했었다. 미리 경고도 했으니 걸리면 선처란 없었다.


상호 간 합의된 징벌이라 할 말은 없지만, 무슨 나라 팔아먹은 죄인도 아닌데, 이게 이 정도로 욕을 먹을 일인가, 건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강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복수심의 콩나무가 건의 마음속에서 천장을 뚫고 치솟을 때쯤, 건은 슬쩍 화재를 돌렸다. 만만한 것이 음악 얘기였다.


음악에 대해서라면, ‘조예’라는 고급진 단어를 꺼낼 수준도 못 되는 나에 비하여, 건은 자기 학교에서 유명한 힙합 소년이었다. 지누션이 가수왕을 휩쓸던 그때의 이야기다.


몸의 일부가 진화한 듯 건의 귀에는 늘 삐죽한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방 한벽을 차지한 책장에는 책 대신 CD가 그득했다. 기분이 업된 날에는 과외 시간 내내 모든 대답을 랩으로 날렸다. 남고생의 짧은 머리는 두건 속에 감췄는데, 한 번은 겨울방학을 틈타 겨우 기른 머리에 레게파마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 처절한 노력의 결과는 왕소라 과자를 머리통 여기저기 붙여놓은 것과 비슷해서, 나는 주먹으로 입을 막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은폐했다. 딱히 뭘 어쩌는 것도 아니면서, 건의 모든 제스처에는 스웨그라는 것이 양념처럼 묻어 있었다. 그야말로 온몸이 힙했다.




내게 힙합은 바지였다. 건이 즐겨 입던 그 바지들. 그 바지가 주는 경악스러움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지금도 힙합을 생각하면 바지가 먼저 떠오른다.

허리는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쳤고, 밑위는 거의 무릎 근처까지 내려와 전체적으로 우리가 익히 아는 ‘똥싼바지’를 정확히 구현하고 있었다. 가장 압권은 동네 먼지란 먼지는 다 쓸어버리고도 남을 가공할 봉사정신이었다.

가랑이 하나에 사람 하나는 너끈이 들어갈 정도로 통 넓은 바지를 엉덩이 중간에 걸친 채 건은 새카맣게 해진 밑단에 먼지를 잔뜩 몰고 왔다. 건의 바지는 실내와 실외를 구별하며 살아온 인류문명을 강하게 조롱하고 있었다. 이런 무엄한 것을 봤나.

건의 발밑에는 길에서 쓸어온 흙이나 낙엽 같은 것이 항상 버석거렸다.



가끔 보는 나도 죽을 지경인데, 건의 엄마는 오죽할까 싶었다. 과연 건의 엄마는 나만 만나면 하소연이 늘어졌다.


- 선생님, 저 녀석은 장래희망이 흑인 되는 거래요.


건은 진심으로 자신이 힙합의 본고장에서, 힙합에 정통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다음에 의학이 발달하면 흑인이 되고 말 거라며 야욕을 불태웠다. 심지어 집에서 기르는 코딱지만한 갈색 푸들의 이름도 무려 코비였다. 건이 가장 좋아하는 코비 브라이언트를 오마주한 이름이라나.


건은 공부만 빼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유쾌하고, 배려심 많고, 유머러스하고, 정도 깊었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높아 옹골찬 나무처럼 대견했다. 놀리면 길길이 날뛰지만, 놀리는 사람의 본마음을 읽을 줄 알기에, 별로 상처 받지 않아 편했다. 공부만 좀 열심히 하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것이 주변 어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내가 숙제로 목을 조르면 그도 지지 않고 뭐라도 걸만한 것이 없나 잔머리를 굴렸다. 힙합의 왕국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건의 기준에서 봤을 때, 그 왕국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나는 국경 밖에서 풀뿌리나 캐먹는 야만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심사가 꼬이면 맨날 그걸 갖고 시비였다.


- 선생님은 왜 그렇게 구린 음악만 들어요?


헐, 김광석이 구리다니.

건은 1라운드에서 당한 수모를 돌려주겠다는 복수심에 슬슬 텐션을 올리고 있었다. 상대방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는 없다. 나는 제일 약올리기 좋은 방식으로 응수한다.


- 인간이 구려서 그렇다고 치자.


- 에이 짜증 나. 나 앞으로도 숙제 안 해.


그 힙합소년이 사랑에 빠졌다. 같은 학원을 다니는 인근 여고의 학생.

고등학생의 첫사랑이란 이렇게 뻔한 장소에서 시작되는구나...


남들 눈에는 식상한 사연이겠지만, 당사자는 세상이 뒤집혔다. 모든 것이 급격히 심각해졌다. 발랄하던 그의 가슴에 암막커튼이 걸렸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의 누군가에게 제 이야기를 재잘재잘 쏟아내다가도, 금세 커튼을 치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건의 사랑에 대한 엄마의 논평은 간단했다. ‘하다하다 이제는’

그러니 엄마 앞에서는 야멸차게 커튼을 닫을 수밖에.


하지만 끝내 제 얘기를 들어줄 타인의 귀를 갈구하는 것이 짝사랑의 속성이기에, 건은 나만 나타나면 암막커튼을 활짝 젖히고 시끄러운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자연스럽게 수업의 절반 정도는 연애 상담에 할애되었다. 건은 며칠 동안 마른오징어 비틀어 짜듯 생각해 낸 온갖 아이디어를 늘어놓고 내 논평을 기다렸다. 대부분 조잡스럽고 엉뚱한 전략이어서 대답하기 난감했다.

온갖 길을 돌고 돌다 보면, 결국 문제는 하나로 귀결되었다.


고백을 할까, 말까.


둘 중에 하나를 고르기만 하면 되거라, 제삼자에게는 쉬운 문제였다.

이렇게 끙끙대느니 그냥 눈 딱 감고 말해버려!

건이 즉각 반발했다. 그랬다가 까이면 선생님이 책임질 거냐.

당황한 나, 그 책임을 왜 내가 지냐.

그럼 책임도 안 질 거면서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얘기하면 어떡하냐.

이번에는 한참을 생각하는 척하다가 신중하게 대답한다. 이렇게 죽도 밥도 안되게 굴 거면 그냥 고백해.

똑같은 말이지만 좀 더 진정성을 가미해 어렵게 말했다.

하지만 내용물이 같으니 포장을 바꿔도 건이 속지 않는다. 건이 다시 따졌다.

그랬다가 그나마 아는 척하던 것도 어색해지면 선생님이 책임질 거냐.

(내 연애도 책임지기 어려운 마당에, 왜 자꾸 지 연애를 책임지라고 하는 건지.)


책임질 거냐는 추궁에 말문이 막혀 버린 나는 바로 꼬리를 내린다. 간교한 정치인처럼 지금까지와 정반대의 주장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다.

첫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데, 속앓이 하지 말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 몇 년 지나도 니 마음이 똑같으면 그때 고백해. 어차피 같은 동네에 사니까 기회는 다시 올 거야.

이번에도 최선을 다했다.


건은 소리쳤다.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무성의하게 말하면 섭섭하다며.


결실로 닿지 못하는 어떤 모색도 정답일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건은 용기 내 고백했지만, 차였다.

남자 친구 있다나.


실연의 상처는 힙합 전사에게서 소울을 앗아갔다.

늘 리듬을 타던 몸짓과 말투에 허세 대신 슬픔이 들어찼다.

숙제를 안 해와도 뻥끗도 못하고 나는 눈치만 살폈다.


건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헤드폰 바깥까지 울리던 음악도 언제부터 사라졌다. 사랑을 잃어버린 게 실연의 정의라면, 상실은 어떤 식으로든 헛헛한 슬픔의 잔향을 남긴다.


나는 슬그머니 내 가방에서 헤드폰을 꺼냈다.

건축학개론의 수지가 이재훈에게 그랬던 것처럼, 잠든 척 엎드린 건의 귀에 그것을 씌웠다.

움찔하던 건이 곧 잠잠해진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김광석, <사랑했지만>


건이 놀리던 구린 노래가 흘렀다.

하지만 건은 헤드폰을 빼서 던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노래가 끝나도록 그와 나는 침묵했다.


노래를 듣던 중 건이 잠깐 훌쩍이는 것 같았지만, 워낙 자존심이 센 아이라서 나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김광석이 김광석 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