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자의 흔한 습성으로 나는 땅을 보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앞사람의 뒤꿈치에 시선이 고정됐다. 체육시간에 피구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100개도 넘는 신발짝들이 대륙을 누비며 전쟁을 하는 것 같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새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의 신발을 대부분 외울 수 있었다.
신발은 내게 많은 것을 일러 주었다.
민옥의 신발은 일 년 내내 한 번도 빨지 않아, 학대 당한 노예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육중했던 정순의 운동화는 위에서 찍어누른 jpg 파일처럼 출고 당시보다 1.5배 정도 가로로 퍼졌다.
스노우진을 입고 다니던 뒷자리 애들은 언제부턴가 발목까지 올라오는 비비화로 갈아탔다.
신발은 자신이 발 딛고 선 국토를 표지하는 패스포트였다.
그곳의 최강 귀족 국가는 프로스펙스, 아디다스, 나이키 3국이었다.
엄마는 내게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스펙스 운동화를 사주었다. 까발로나 타이거의 시대가 가고 스펙스의 시대가 열렸다.
프로스펙스가 아닌 스펙스.
F를 눕혀 놓은 프로스펙스 마크에서 가운데 선 하나를 지우면 스펙스가 된다. 프로스펙스 한 켤레 값이면 스펙스 세 켤레를 살 수 있다. 선 하나가 스펙스 두 켤레 값인 셈이다. 엄마는 그 이상한 셈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이해한다 해도, 엄마의 지갑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기에, 내 신발은 스펙스였다.
사치품이 흔치않던 그때, 아이들의 욕망은 운동화로 쏠렸다.
엄마를 들들 볶아 마침내 프, 아, 나 세 브랜드 중 하나를 쟁취한 아이들은, 이제 남은 인생에 더 바랄 게 뭐 있겠냐는 표정으로 교실문을 열었다. 평소에 친하지 않던 아이들도 같은 브랜드를 선택한 제 안목을 공유하기 위해, 아이돌 팬클럽처럼 끼리끼리 뭉쳤다. 할리데이비슨 동호회나 벤틀리 클럽의 프라이드도 이보다 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프로스펙스 왕국의 맹주는 연희였다. 연희와 친했던 탓에, 나는 그 나라의 백성도 아닌데, 그녀의 핑크색 신상 운동화가 얼마나 새끈한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공부를 잘해서 받은 전리품이라 연희의 운동화는 더 각별했다. 매일 공부하라고 호랑이처럼 딸을 다그치던 연희의 엄마는, 연희가 이번 달 월정고사에서 약속한 점수를 받자, 그 즉시 계약을 이행했다.
기분이 좋으면 연희는 손가락을 쫙 펴고 제 손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얘기하는 버릇이 있었다. 연희는 자기 손을 사랑했다.
- 내 손 정말 예쁜 것 같지 않냐?
연희는 딴 얘기를 하다가도 불쑥 이렇게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대화를 멈추고 연희와 함께 그 손을 감상했다. 과연 연희의 손은 남달랐다. 하얗고 가늘고 길었다.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했다.
같이 시험공부한다는 핑계로 그 애의 집에 놀러 갔던 날, 연희 엄마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놀지 말고, 졸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는 방 밖으로 수다떠는 소리가 세어나갈까 봐 연습장을 펴고 필담을 나누며 키득거렸다. 연필을 잡은 연희의 손이 유난히 예뻐 나는 글자보다 연희의 손에 더 눈이 팔렸다.
나의 엄마는 연희 엄마처럼 내게 공부하라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마가 나를 부를 때는 주로 뭔가를 부탁할 때였다. 겨울밤이면 엄마는 밀린 빨래를 한가득 들고 나를 불렀다. 우리 집에는 세탁기도 없었고, 온수도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돌아와도 누구 하나 엄마의 일을 대신해 주는 어른은 없었기에 고단한 엄마는 늘 나를 찾았다.
마당 수돗가에서 큰 고무다라이에 물을 틀어놓고, 우리는 대야를 하나씩 끼고 깔판에 앉았다. 엄마가 비누칠을 해서 빨래를 비비면, 내가 그것을 받아 헹구는 시스템.
엄마와 나 사이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바가지가 놓였다.
살얼음이 낀 찬물에 손을 넣으면 곧이어 손가락이 마비될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참을 만큼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그 물에 손을 담갔다. 그러면 손가락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살아나며 묘한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제 앞에 놓인 물은 각자의 하루처럼 차가왔지만, 우리 사이에 놓인 따뜻한 물이 있어 그래도 견딜만 했다.
그 추운 밤 빨래는 초등학교 3학년 정도부터 시작되었다. 텔레비전에서는 9시만 되면 이제 어린이들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 내일을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가 되라며 아동의 수면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했다. 그 시간 나는 상하로 엉덩이를 들썩이며 어린이는 물론 웬만한 어른들도 잠들 시간까지 빨래를 했다.
엄마는 미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딸이라서 너무 좋다’며 나를 치켜세웠다. 내가 좋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달콤했지만, 그 이유가 고작 내가 딸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조금 슬펐다. 고무장갑도 없이 수시로 설거지를 시키는 할머니도 비슷한 말을 했다. 계집애라 그나마 쓸데가 있구나. 따뜻한 바가지 속의 내 손은 고사리가 아니라 고사리나물처럼 빨갛고 이물스러웠다.
연희가 운동화 자랑을 하다 말고 뜬금없이 손 얘기를 꺼낸 것은 아마 거칠고 험악한 내 손에 시선이 멈췄기 때문일 것이다.
스포츠 브랜드를 대표하는 아디다스를 나는 어이없게도 드레스 슈즈로 착각했었다. 수미 때문이었다. 한동안 그 클래식한 삼선을 볼 때마다 청순한 소녀의 실루엣이 연상되었다.
낯선 얼굴이 가득한 새 학년 교실에서 수미의 외모는 단연 눈에 띄었다. 순정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모습. 만찢녀의 원조격이었다. 한국인에게 흔치 않은 연갈색 곱슬머리는 허리까지 찰랑거렸고, 쌍꺼풀 짙은 큰 눈은 긴 속눈썹 때문에 늘 서늘한 우수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레이스나 프릴이 달린 정장풍의 옷을 즐겨 입었는데, 그런 옷은 대체 어디서 파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수미를 보고 있자면 신일숙이나 황미나의 만화 속 주인공이 같은 교실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수채화를 잘 그렸던 예고 지망생 수미의 선택은 아디다스였다.
수미는 명랑하고, 잘 웃었으며, 제 고급진 물건도 친구들에게 선뜻 빌려주었다. 수미 곁에는 아이들이 늘 북적였다. 그들은 수미와 팔짱을 끼고 화장실이나 음악실에 가고 싶어 했다. 이상했던 것은 아이들의 그 갈망이 오래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비슷한 이유로 그 소망을 접었다.
평생을 인기쟁이로 살아온 수미가 굳이 단련할 필요가 없었던 신체기관이 있었는데 (그런 게 실제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머릿속의 생각을 말로 만들어 입에서 내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검열기관, 수미는 그 기관이 망가져 있었다.
누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이 비굴한 존재론적 질문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연하고 선하게 다듬는다. 그 질문이 필요 없던 수미의 말끝은 둔탁하고 거칠었다.
한참 잘 놀다가도 문득 그녀는 천진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 너 이빨에 고춧가루 꼈어.
- 왜 그렇게 걸레같은 옷을 입고 왔어?
- 어우야, 너 몸에서 곰팡이 냄새 나.
수미의 그 말들은 솜씨 좋은 살수의 습격처럼 타겟을 빠르게 가격하고 사라졌기에, 주변인들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채지 못할 때도 많았다. 오직 독침에 찔린 당사자만이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피했다.
매일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만 싸오던 진혜도, 위로 두 명의 언니를 거치고 나서야 제 옷을 물려받을 수 있는 희경이도, 책상도 없는 반지하 방에서 엎드려 숙제를 하던 인숙이도, 한동안 우울했다.
누구는 자신의 예민함을 자책하며 여전히 수미의 친구로 남았고, 누군가는 고요히 물러나 홀로 절교를 결심했다.
수미는 수시로 제 물건이 없어졌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는 야간반이 있었다. 산업체부설학교라는 정식명칭은 어려워 아이들은 모두 야간반이라는 교대조 느낌의 이름으로 불렀다. 주간반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면 야간반 학생들이 등교해서 같은 교실을 나누어 썼다. 주간반이 열세 반, 야간반이 세 반. 야간반 학생들은 낮에는 인근 구로공단이나 가리봉 공단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왔다. 시간대가 달라 그녀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청소 당번이라도 걸려 늦게 귀가하는 날에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낯선 얼굴과 맞닥뜨려 서로 당황하는 일도 벌어졌다.
수미는 그녀들과 교실을 공유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서랍에 두고 간 물건이 없어졌다고 주기적으로 법석을 떨었다. 수미의 막말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 걔들이 가져간 거 아냐?
대부분 우리보다 한두 살 많은 언니들이었지만, 수미는 늘 ‘걔들’이었다. 웬만하면 수미의 편을 들어주던 아이들도 이때만은 뭔가 불편해서 입을 다물었다. 결국 ‘손버릇 나쁜 걔들’에 대한 절도의 의혹은, 수미에게서 그 물건을 빌려갔던 친구가 나타나면서 대부분 해소되었다.
나에게도 수미가 할퀴고 간 생채기가 남아있다. <응답하라 1988>에 영혼을 뺏긴 채 울고 웃던 어느 날, 드라마를 보다가 불현듯 수미가 떠올랐다. 덕선이가 부잣집 미옥이의 반찬을 집어 먹으며 수다를 떠는 그 평범한 장면.
수미와 친해지고 싶어 주변을 서성거리던 때였다. 운 좋게도 수미의 앞자리를 뽑았던 그 주간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수미와 도시락을 같이 먹는 영광을 얻었다. 직사각형의 양은 도시락통에 계란 프라이를 얹은 밥과 고구마 줄기, 시금치, 콩나물 같은 나물류 한두 개를 추가한 것이 내 도시락의 고정 포맷이었다.
수미는 나와 달리 밥그릇보다 더 큰 반찬통을 따로 들고 다녔다. 뚜껑을 열면, 조리법과 원재료는 겹치지 않지만, 모두 단백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5종 이상의 반찬이 짜잔~ 하고 나타났다.
<응답하라 1988>
내가 수미의 반찬을 먹는다고, 수미가 내 반찬을 먹을 리 없으니, 내가 수미의 음식에 손을 대면 결국 수미는 밥이 남을 것이다. 이런 계산을 하며 나는 오로지 내 것만을 먹었다. 나는 담대한 덕선이와 달랐다.
하지만 그날은 눈 앞의 유혹이 너무 강렬해서 하나 맛보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한 개 집어먹는다고 크게 티가 날 것 같지도 않아 갈등하고 있던 차에, 뒷자리의 누군가 수미를 불렀다. 수미가 뒤돌아 다른 애와 떠드는 그 틈을 타서 나는 동그랑땡 하나를 냉큼 집어삼켰다. 곧이어 수미가 상냥한 목소리로 외쳤다.
- 야! 그냥 눈치 보지 말고 내 반찬 먹어도 돼. 뭘 안 볼 때 훔쳐 먹냐!
수치심에 목구멍이 막혀 말이 안 나왔다. 다음날부터 나는 밥통이 고장 났다든가 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한동안 매점에서 사발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더 이상 수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그 애와 마주치면 자동으로 시선이 떨어졌다. 체크 스커트를 입은 날씬한 다리가 아디다스의 삼선과 너무 잘 어울렸다.
뭐니뭐니해도 나이키가 최고라는 고정관념은 시현 때문에 생겨났다. 시현은 내 옆자리였다. 난생 처음 체육 선생에게 따귀를 맞은 날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원색적인 폭력을 당해본 경험이 없던 터라 나는 거의 멘붕 상태였다. 교실에 돌아와서도 책상에 엎어져 훌쩍이고 있는 나를 시현은 한참이나 꼬나보았다. 도저히 꼴상사나워 못 봐주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는 마침내 시현이 내게 말했다.
- 야, 오늘 우리 집에 가서 놀래? 우리 집에 가서 피자 먹으면서 비디오 보자. 어른은 없어.
시현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실내화를 까딱거리며 임병수 노래를 흥얼거리던 중이었다.
시현의 모든 말이 놀라워서 찔끔거리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피자를 먹다니! 비디오를 보다니! 어른이 없다니!
피자도, 비디오도, 빈 집의 자유도 다 내게는 없는 것들뿐이었다.
- 개놈. 지가 뭔데 패고 지랄이야. 달리기 좀 못할 수도 있지.
시현은 창밖에 대고 욕을 했다. 다음 반 수업을 기다리며 체육 선생은 등나무 그늘에서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방금 전 내 싸대기를 갈긴 자였다.
내가 맞은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정컨데, 태도의 문제였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공식적인 나의 죄목이었다.
체육 선생은 틈만 나면 인간성을 들먹이며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를 했다.
- 니들은 그래서 문제야. 니들 그렇게 살지 마. 그래도 인간이 먼저 돼야지. 안 그러냐?
쉬는 시간마다 날뛰는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웠기에, 우리는 먼저 인간이 되라는 그의 말에는 별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나머지는 헷갈렸다. ‘그래서 문제’라는 ‘그래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오늘 체육선생은 시작부터 똥 씹은 표정이었다.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사단이 벌어질 것 같은 음산한 날이었다. 다른 날보다 훨씬 빡세게 이리저리 굴렀지만 아이들은 모두 웬일인가 싶을 정도로 고분고분했다. 자기의 사나운 표정이 아이들의 공손함과 정비례 관계라는 것을 눈치 챈 체육선생은 종종 이런 식으로 연막을 피웠다.
마지막 관문은 100미터 달리기. 아이들이 준비선에 8열 횡대로 섰다. 이미 에너지가 고갈된 내 저질 몸뚱아리는 생리통까지 겹쳐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라톤 평원에서 달려온 아테네의전령처럼, 숨이 턱 끝에 매달렸다. 저 고지만 지나면 모든 게 끝난다. 나는 송곳이 훅 찌르고 지나가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마른 오징어 비틀어 짜듯 기운을 끌어 모았다. 칼 루이스는 열 걸음에 주파하는 100미터가 내게는 경부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결승선에서는, 어디 한놈만 걸려보라며 벼르던 체육선생의 그 한놈이 바로 나였다는 경악스러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 안경 벗어. (다짜고짜 안경은 왜?)
이유를 일러주지도 않고 솥뚜껑 같은 그의 손이 내 뺨을 내리쳤다. 불이 번쩍 났다. (다짜고짜 왜??) 온몸의 피가 쏠린 듯 새빨개진 얼굴에서 활활 열이 났다. 선생은 나를 앞에 세워놓고, 선고를 내리는 포청천처럼 모두에게 외쳤다.
- 먼저 인간이 돼야지. 니들 그렇게 살지마. 니들은 그래서 문제야. 누가 100미터를 배를 잡고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뛰나? 엉? 최선을 다하지 않는 쓰레기는 용서 못 한다.
내 속에서는 말이 되지 못한 생각들이, 실성한 정치가의 난상토론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 생리통 때문이라고 말했어야지. 하지만 누구도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남자 선생님한테 ‘그런 말’을 어떻게 해? 그럼 앞으로는 어쩔 건데? 그냥 또 맞고 말지 뭐. 근데 이렇게 계속 억울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억울해 죽겠다는 말도 있잖아.
결국 나는 아직 인간이 덜 된 탓에, 최선보다 요령을 선택한 쓰레기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쓰레기라면, 그는 시현의 말에 따르면 ‘개놈’이었다.
- 개놈!
그 과감한 사운드에 모골이 송연해지며 모든 분비샘에서 아드레날린이 분출했다. 내 발음기관으로는 아직소리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보케뷸러리 서브 폴더에 차곡차곡 수집만 해놓고, 생활회화에서는 감히 사용할 것이라 상상해 본 적 없는 꿈의 언어.
보급형으로 통용되는 ‘개새끼’보다 훨씬 강렬한, 마치 피카추가 라이츄로 변하듯, 에네르기를 응집한 욕이 스스로 한 단계 진화한 그런 느낌의.
시현은 그 말을 떡볶이, 국어책, 운동장 따위의 무구한 낱말처럼 자연스럽게 뱉었다. 창가에 앉았던 탓인지, 역광을 등에 업은 시현의 머리 위로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가 번졌다. 그 빛에 넋을 잃은 나는 시현의 팔짱을 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향했다.
시현의 말대로 집에는 언니와 여동생만 있었다. 살림을 도와주는 친척 할머니는 어차피 잔소리를 안 하니 어른으로 안 친다고 했다. 엄마는 어린 남동생과 함께 아빠가 일하는 천안에 살고, 시현의 세 자매는 말하자면 수도 서울로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었다. 엄마는 자식들에 대한 염려를 지나치게 풍족한 용돈으로 다독였다.
시현의 방에는 놀라운 것들이 많았다.
만화책과 하이틴 로맨스가 무려 5단 책장에 빡빡하게 꽂혀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공테이프에 해적처럼 카피해서 듣던 나와는 달리, 시현은 웬만한 인기가수의 노래는 음반과 테이프 양쪽으로 보유했다. 집에서는 오디오로, 밖에서는 '마이마이'로 들으려면 둘 다 필요하다나.
어른이 없다던 그 집에서는 할머니가 피자 대신 부침개를 내왔고, 보기로 한 비디오는 임병수의 신곡을 들으며 뒹굴다보니 새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왠지 모든 것이 바라던 대로 착착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찌끼야 미야 쏘 모쓰 꼬렐 땡 뽀랄’로 시작하는 ‘아이스크림 사랑’의 외계어도 베껴 썼다.
필사를 마치고는 연습장을 마주 들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이중창도 불러재꼈다.
'영원한 나의 사랑아~~~~~~~~~'로 끝나는 후렴구의 그 '~~~~~~~~'를 재현하느라, 되지도 않는 바이브레이션을 뽑아내며 서로의 목젖을 두들겨 주었다.
한참을 웃다 보니 거짓말처럼 행복했다. 배도 아프지 않았고, 서러움도 날아갔다. 시현은 할 말이 없을 때마다 딸꾹질하듯 괜히 ‘개놈!’이라 소리를 질렀고, 나는 그 소리만 들으면 자동으로 웃음폭탄이 터졌다.
저녁이 되자 시현은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하겠다며 옷을 챙겨 입었다.
나이키 잠바. 그리고 하얀색 나이키 운동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짐.이 묻어 있었다.
현관에 벗어놓은 나의 스펙스는 멀리서 보면 나이키와 닮아서, 그날 나는 시현과 커플 신발이라도 맞춘 듯 마냥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