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에서 악귀를 물리치는 카운터들은 귀신이 자신의 ‘땅’을 밟기를 기다린다. 내 구역 안에서라면 호랑이의 기운이 솟고, 승률도 높아진다.
교실에서도 땅을 차지하려는 싸움이 치열했다. 센 기운이 허약한 기운을 밀어냈다.
몇 가지가 관건이었다.
성적, 외모, 성격과 같은 베이스에 잔대가리, 완력, 잡기 등과 같은 토핑을 섞어보면 대강의 견적이 나왔다. 이 중 한두 개라도 소유한 자는 소박하나마 제 땅을 갖는 것이 가능했지만, 뭐하나 해당사항이 없는 자들은 깔끔하게 천민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지닌 자는 그야말로, 광대한 영토의 대지주로 군림했다.
다른 말로 핵인싸 되시겠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부잣집 자식이, 키 크고, 날씬하고, 하필 얼굴까지 예쁘다면? 게임은 끝났다. 누군가는 엄친딸이라 부르는 재수때기들이다.
새우젓이 바로 그 왕재수였다.
민선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다 가졌다.
새우젓이라는 별명은 민선이 갖지 못했던 그 한 가지 때문에 생겨났다.
민선은 눈이 작아 새우젓이었다. 눈뿐만 아니라 이목구비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도 비슷했다. 가는 붓을 서너 번만 휘두르면 초상화가 완성될 것 같은,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마스크였다. 그것은 아직 골격이 자라지 않은 아기의 얼굴을 닮았다. 남자 선생님들은 그런 이유로 민선을 편애했다. 여자와 아이는 보호한다는 허세 넘치는 사명감이 민선의 얼굴을 보면 발동하는 모양이었다. 우악스러운 극성쟁이들 틈에서 어디 맞고 다니지나 않는지 염려하는 눈치였다.
총각 선생들 수업시간이면 민선의 또 다른 자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육신에서는 ‘ㄷ’과 ‘ㅈ’이 혼합된 자음과, ‘ㅛ’와 ‘ㅕ’의 경계에서 만나는 모음이, 어느 섬나라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 선생님, 정말 너무 하세여.
- 왜 저한테만 그러세여?
- 그럼 저 삐딜 거에여.
선생들은 수시로 민선을 새우젓이라 놀렸고, 그녀는 매번 최선을 다해 토라졌다. 텔레비전 드라마였다면 바로 채널을 돌렸을 테지만, 이건 라이브인 관계로 아이들은 꼼짝없이 앉아 그 생쇼를 직관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빙의되었던 아기동자는 물러나고, 민선의 참자기가 돌아왔다. 자모는 제자리를 찾았고, 음정도 한 옥타브 낮아졌다.
그뿐이랴.
새우젓은 우리 반 최고의 욕쟁이였다. 부모가 지어준 엄연한 이름을 놔두고, 민선은 친구들에 대한 호칭을 ‘야 이년아’로 통일했다.
새우젓의 진가는 그녀가 열을 받았을 때 드러났다. 민선은 주로 뭔가에 패배했을 때 뚜껑이 열렸는데, 오죽하면 ‘지고는 못 산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급훈으로 정하자고 우길 정도였다.
"지고는 못 산다."
궁서체로 적어 교실에 걸어두기에는 도덕적으로 켕기는 게 있었던지, 결국 민선은 ‘최선보다는 최고’라는, 거기서 거기인 말을 급훈으로 밀었다.
민선은 반에서 1등 아니면 2등이었다. 민선처럼 1등 아니면 2등을 하는 애는 또 하나 있었는데, 그 애는 세영이었다. 의외로 민선은 세영을 상대로는 투지가 없었다. 죽기살기로 덤비기에... 세영은 이미 많이 아팠다.
세영은 하루 종일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교실 한 구석에서 미량의 산소를 축내며 물갈이를 잊은 어항 속 붕어처럼 헐떡였다. 뼈와 가죽으로만 이루어진 몸은 드센 눈빛에도 부서질 것 같아 함부로 쳐다보기도 아슬아슬했다. 쓸쓸한 나룻배가 연상되는 이름, 갑상선이 난파되어 세영은 아팠다.
아무리 먹어도 기운이 나지 않는 병. 세영의 도시락은 내 것보다 세 배쯤 컸는데, 세영은 그 많은 밥을 점심시간 내내 꾸역꾸역 먹었다. 지필로만 판가름 나는 시험에서는 세영이 압도적 1등이었고, 음미체 실기가 포함되면 뭐든 잘하는 새우젓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공부도 1등이었지만, 미술대회나 백일장같은 번외 게임에서도 민선은 장려상 정도의 숟가락은 얹었다. 가끔 민선을 제치고 반의 누군가 눈치 없이 최우수상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제 발로 동심원 과녁의 정중앙으로 걸어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종일 민선이 입으로 쏘아대는 총알에 누더기가 되었다.
하지만 단체전으로 돌입하면 우리는 다시 한 팀이었다. 우리 반은 민선의 주도 아래 온갖 대회를 휩쓸었다. 민선은 유능한 반장이었다. 환경미화나 합창대회, 반 대항 피구대회도 이변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경쟁이 시작되면, 민선의 작은 눈에서는 다스베이다의 광선검이 뿜어 나왔다.
아이들은 민선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선의 야망 덕에 자신이 ‘뭐든 잘하는 11반’의 멤버십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정했다. 비록 제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민선과 함께라면 그 귀하다는 자존감이 국민연금처럼 주기적으로 떨어졌다. 손바닥만 한 자기의 땅뙈기도 민선의 영지에 편입시키고자 아이들은 줄을 섰다. 핵인싸의 인증을 득한 인싸가 되고 싶은 아이들.
국경 근처에는 틈만 나면 월경을 시도하는 주변인이 어슬렁거렸고, 외곽에는 언감생심 민선국민을 꿈도 꾸지 못하는 무리들이 시무룩한 잡초처럼 군생했다. 극소수의 오타쿠들은 제 등에 짊어진 소라껍데기에 숨어 여간해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인숙은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자라는 곰팡이처럼, 제 영토를 갖지 못한 채 검은 점으로 피었다 졌다.
그런 인숙이 자신의 땅을 광개토대왕처럼 넓혔던 사건이 있었다. 가을 소풍 때였다. 선생님들은 관악산 기슭에 아이들을 풀어놓고 자기들끼리 응달에서 캔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김밥을 먹고 나면 해산 때까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정말 기획력이라고는 필요 없는 행사였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져온 애들을 중심으로 군데군데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나무 그늘에 누워 무료하게 하늘만 바라보던 체육 선생이 뭐가 떠오른 듯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 반으로 다가왔다.
- 너희들, 이리 와봐. 어디 춤 좀 춰 봐라. 맨날 그 좁은 교실에서 몸부림치지 말고, 여기 넓은 곳에서 한번 실컷 흔들어 봐.
아이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이 쳐다보았다. 별다른 호응이 없자, 체육은 다른 반 아이들까지 불러 모았다. 스포츠맨답게 배틀을 붙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 너네 춤 좋아하잖아. 11반이랑 5반이랑 한번 붙어 봐.
멍석을 깔아주면 하던 일도 바로 접는 것이 우리 민족 특유의 겸양이 아닌가. 우리 반 아이들은 사슴처럼 젊잖은 듯 말이 없었다.
그때 이 애매한 침묵을 찢고 누군가 나타났다. 5반의 성혜였다. 로라장에 가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앞반의 대표 날라리였다. 성혜가 앞으로 튀어나오자 자연스레 관객들이 성혜를 애워싸며 원을 그렸다. 눈치 빠른 아이 하나가 전영록의 ‘불티’를 선창 하자 드디어 성혜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5반 아이들의 함성에 지나가던 등산객들도 깜짝 놀랐다.
- 11반은 이렇게 인물이 없나? 시끄럽기만 하지 뭐 별 거 없구만.
체육의 도발에 반장이었던 새우젓은 눈꼬리가 이마까지 치솟았다. 약이 올랐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박수만 치는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며, 적임자를 물색하느라 요리조리 굴러다니던 새우젓의 눈동자에도 서서히 체념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때 누군가 슬라임처럼 원 안으로 스며들었다. 인숙이었다.
저게 누구야?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춤추던 5반 아이들이 멈칫했다.
인숙은 도도한 표정으로 성혜의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흔들기 시작했다. 인숙은 우리가 알던 응달의 소녀가 아니었다.
인숙의 춤은 차원이 달랐다. 뭐랄까. 관절을 지닌 문어 같달까. 신체의 모든 말단은 연체동물처럼 유연했지만, 동작은 칼로 자른듯 절도가 넘쳤다. 흐느적거리며 뇌쇄적 매력을 흘리다가도, 불현듯 군무를 추는 보이그룹의 파워를 발산했다. 중앙을 차지하던 성혜 무리들은 슬그머니 후방으로 밀려났다. 얼핏 인숙의 백댄서처럼도 보일 지경이었다. 5반 아이들의 시선도 점점 인숙을 따라다녔다.
- 이야~ 이건 뭐 상대가 안 되는데? 어디서 이런 인물이 튀어나왔어? 11반 승!
체육은 제버릇 개 못주고 이 와중에도 판정을 내렸다. 우리 반 아이들이 들뜬 함성을 질렀다. 숨을 몰아쉬는 인숙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신묘한 웃음이 가득했다. 실로 경이로운 인숙이었다.
인숙의 영토가 관악산 전체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어디 산등성이에 '남인숙순수비'라도 세우고 싶은 날이었다. 그날만큼은 인숙의 몸에 배어 있던 곰팡이 냄새조차 말끔하게 날아갔다.
나는 그 냄새에 익숙하다. 우리 집에도 그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이 있다. 우리 집 부엌은 마루보다 1미터 정도 지대가 낮았다. 그 부엌 바닥에서 몇 계단을 더 내려가면 지하실이 문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우리 방 연탄아궁이가 있었고, 겨울이면 엄마는 하루에 두 번씩 그곳에서 연탄을 갈았다.
어느 겨울 엄마가 몹시 앓았다. 누가 엄마 대신 연탄을 갈지 않으면, 냉골에서 자야 할 형편이었다. 난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내 세계관 속에는 늘 한을 품은 소복의 귀신이 이웃처럼 공존했다. 꼬박꼬박 <전설의 고향>을 본방 사수하면서, 아이들과는 어디서 주워들은 괴담들을 성실하게 공유하던 시절.
하얀 한복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들은 두려운 동시에 너무 매혹적이었다. 인간의 방심을 먹고사는 고약한 취향 탓에, 괴담의 결말은 대부분 그녀들의 기습으로 끝이 났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은 머리통을 모은 채 낮은 목소리로 숙덕거리다가, 째지는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강박적으로 전기를 아끼던 할머니 덕에 지하실에는 코딱지만 한 전구가 사물의 윤곽만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어둠과 귀신을 햄버거와 콜라처럼 세트로 떠올리던 나는 그 겨울밤 거기에 가야 했다. 아무리 궁리해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엄마의 머리는 뜨거웠고, 창밖에는 엄동의 칼바람이 불었다. 결국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엄마에게 속성으로 연탄 가는 법을 배우고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 11년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그런데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무언가 내 종아리를 건드렸다.
툭. 툭. 툭.
마침내 올 것이 온 것이다.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실물을 영접하는 것인가?
죽을 때 죽더라도, 얼굴이나 보고 죽자는 마음에 한쪽 눈은 감은 채로, 슬로비디오처럼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수십 마리의 꼽등이가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나의 침입에 열 받은 눈치였다. 내 다리에 박치기까지 하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 오지 마. 나가. 여기는 우리 땅이야. 까불지 마. 저리 가. 분명 꺼지라고 말했다!
왜 이 오래된 집에 인간만 서식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자신의 영토로 아닌밤중에, 아니 그냥밤중에 나타난 침략자를 축출하고자 수십 마리의 원주민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덤비는 중이었다.
최악의 가정은 이럴 때 긴요했다. 틀림없이 귀신이라 상상했던 생각의 백신 덕분에 곤충류가 자아내는 이승의 공포 따위에는 헛웃음이 터졌다.
나를 놀라게 한 죄까지 얹어 나는 그들에게 대차게 비짜루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재주는 꼽등이들도 귀신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제 훼방꾼도 처치했으니 계획된 미션을 클리어하고, 톰크루즈처럼 신속히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불붙은 연탄을 아궁이에서 빼내고, 그 밑에 깔린 연탄재를 꺼내고, 불붙은 연탄을 다시 아래에 깔고, 새 연탄을 그 위에 얹는다. 들을 때는 심플했던 4단계 작업이, 실전에서는 디테일과 완력을 요구했다. 검은 연탄은 구멍 많은 그 얼빵한 외모와 달리 깜짝 놀랄 만큼 무거웠고, 불 붙은 연탄은 끔찍한 화력을 자랑해서 감히 그 위로 집게를 꽂기가 겁났다. 어찌어찌 모든 재배치를 끝내도화룡점정과도 같은 마지막 절차가 남았다. 위아래의 구멍을 일직선으로 맞추는 일이다. 그래야 공기가 순환해서 연탄이 꺼지지 않는다. 아궁이는 높았고, 내 키는 모자랐기에 나는 한껏 까치발을 들고 불붙는 연탄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 갑자기 훅, 숨이 막히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드디어 원귀의 출몰인가. 내 속의 액체와 기체가 동시다발적으로 눈코입을 뚫고 분출했다. 귀신조차 놀랄 만한 괴성을 지르며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날숨으로 일관했던 호흡이 한꺼번에 일산화탄소를 크게 들이켠 것이다. 비명소리에 엄마가 달려와, 찬 동치미 국물을 떠 먹였다.
그 뒤로 나는 지하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유독가스가 기도를 타고 흐르는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몇 년 뒤 도시가스가 들어오면서 우리 집도 연탄과는 영영 이별했지만, 후각은 시각보다 기억력이 좋은 탓에, 아직도 습한 장소에 가면 자동으로 그곳이 떠오른다.
인숙의 냄새는 그 기억을 소환했다. 꼽등이와 최초의 혼절, 어둠과 가공할 공포.
하지만 우연히 인숙의 비밀을 알게 된 후로 공포는 호기심으로 대체되었다. 인숙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소풍 다음날 아침, 인숙 옆자리의 희정은 교실문을 열자마자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 오올~ 인쑤기! 어제는 진짜 멋졌다. 평소에는 눈도 못 마주치더니, 웬일이니! 체육도 이제 틀림없이 니 이름을 외웠을 거야. 야, 축하한다!
입 닥치라며 희정의 목을 조르면서도 인숙은 들뜬 표정이었다.
인숙은 체육 선생을 사랑했다.
- 니들 그렇게 살지마. 사람이 먼저 돼야지.
인숙은 그의 말에 감동을 먹었다. 천사같은 얼굴로, 몸에서 곰팡이 냄새가 난다고 면박을 주었던 수미에게, 인숙은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너 그렇게 살지마. 사람이 먼저 돼야지. 반지하방의 냄새는 목욕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타인의 절망을 가볍게 조롱한 죄. 체육의 '그렇게 살지마'는 제 분노를 수미에게로 정반사하는 마술 프리즘이었다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체육의 경고가 그렇게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에 뜨악했다. 억울하게 얻어터진 이후, 나는 수업시간마다 ‘불타는 적개심’을 두 눈에 담아 체육의 기분을 잡치게 만들겠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워낙에 존재감이 없는 데다가 안경까지 쓰고 있어 별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 함정.)
- 너무 멋지지 않냐?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할 때 난 소름 돋았잖아. 수미한테 내가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인상 쓰면, 옆모습이 딱 민수 오빠랑 판박이야. (민수 오빠는 최민수)
인숙과 희정이 숙덕이는 말을 엿들은 이후, 나는 괜스레 체육이 달리 보여 슬슬 표정 테러를 접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그날 인숙의 말을 엿들은 사람은 나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새우젓이었다.
다음날 새우젓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공식적으로 이씨 부인을 선언했다. 체육 선생은 이씨. 그때 우리들은 남편의 의사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서로 누군가의 부인임을 선언하는 것이 풍속이었다. 인기가 좋은 총각 선생님들은 반마다 부인을 두었다. 선언의 의미는 한 가지였다. 내 것에 욕심내지 말라는 것. 먼저 선언하는 사람이 본처가 되는 선착순 시스템이었다.
새우젓은 쉬는 시간마다 인숙이 근처로 가서 아이들에게 공갈과 협박을 골고루 배포했다. 내꺼 탐내면 죽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등가 말등가’였고, 나는 ‘저게 눈이 삐었나’였다. 풀이 죽은 사람은 한 명, 인숙이였다.
입싼둥이들이 바로 일러바친 덕에, 체육은 우리 반에도 자신의 또 다른 부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대상이 새우젓이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되었다. 체육시간, 햇볕을 피해 등나무 그늘에서 숨을 돌릴 때면, 체육은 매번 새우젓을 앞으로 불러 어디 노래나 하나 해보라며 싱글거렸다.
결국 할 거면서도 새우젓은 ‘왜 자기만 못딸게 구느냐’며 애기 동자의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인숙은 땅바닥에 낙서를 하는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새우젓은 고음이 많아 소화하기 힘든 남자 가수의 노래를 높은 키로 시작해서, 기여코 삑싸리를 냈다.
‘내가 자다가 깨서 불러도 그것보다 낫겠다’고 퉁을 먹이면서도, 체육의 두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유, 왜 나만 갖고 그래요~ 그들의 꼴상사나운 애정행각에 인숙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나는 철회했던 표정 테러를 다시 시작했다.
인숙이가 사라졌다.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학도 아니었고, 실종도 아니었다. 담임은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곧 다른 아이가 전학을 왔고, 비어 있던 책상도 채워졌다. 한두 주가 지나니 더 이상 인숙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인숙을 다시 만난 것은 겨울 방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주번을 서고 늦게 교문을 나서는데, 언덕 아래에서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핀컬 파마를 해서 낯설긴 해도 틀림없는 인숙이었다. 인숙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인숙의 땅에서 나를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