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소녀가 과거로부터 타임슬립 하여, 37살 현재의 나와 만난다. 드라마 속에서 둘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동시에 경악한다. 내가 이렇게 망나니였다니. 내가 이렇게 망가지다니.
열일곱의 내가 서른일곱의 나에게 소리친다. 야! 너 이런 사람일 거였어? 과거형과 미래형이 융합된 한국어 특유의 혼란시제.
드라마에서처럼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낙담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가장 큰 쇼크는 단연 이거라 확신한다.
- 너, 이런 술꾼일 거였어?
미안하다. 이럴 줄 나도 몰랐다.
나도 몰랐다. 술과 이렇게 각별한 사이가 될 줄은.
‘만약 내가 어른이 된다면’으로 시작하는 유년의 판타지 속에서도 술은 중요한 항목에 들어있지 않았다. 술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갈망의 대상이 되려면 뭔가 짜릿한 쾌락의 향기를 풍기는 동시에, 삼엄한 금기가 동반되어야 할 텐데, 그 시절의 술은 둘 다 아니었다. 몇 집 건너 하나씩 가난과 알코올에 찌든 가장이 살고 있었고, 난봉을 부리지 않는 일상적 음주는 그보다 훨씬 흔했었다. 술 심부름도 주로 애들이 전담했다. 돈만 있으면 초등학생도 소주를 궤짝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심지어 할머니는 사이다에 섞은 막걸리를 마실 때면 나에게도 선심 쓰듯 한잔씩 따라주기도 했다.
우리 집 술 셔틀은 나였다. 주말 오후가 되면 입이 궁금해진 고모들이 ‘뭐 좀 해 먹을 거 없나’ 의논하는 척하다가, 매번 만장일치로 맥주판을 벌였다. 네 명이 각자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몇 장씩 모아 주면 나는 재빨리 가게로 달려가 맥주를 사 왔다. 술판이 벌어지면 나도 덩달아 신이 났는데, 그것은 간만에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모들은 안주로 사라다빵을 자주 만들었다. 가늘게 채 썬 양배추와 오이를 마요네즈에 버무려서는, 무려 제과점에서 사 온 식빵 사이에 끼우는 것이다. 착착착착 넓은 도마 위에서 양배추가 썰리고, 야무진 손끝이 오뚜기 마요네즈 유리병을 훑는 것을 보고 있자면, 미리부터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채소는 양푼 가득 푸짐했고, 그런 날은 식빵도 넉넉했다. 간식도, 외식도, 별식도 없던 출출한 일상이, 술판에 딸려온 사라다빵 하나 때문에 대번에 축제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술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구나. 안주에 대한 극렬한 호감이 순식간에 범주를 확장하며 자기예언적 결론에 도달했다.
쟁반에 하얀 빵을 산처럼 쌓아놓고, 고모들은 드디어 OB 맥주의 뚜껑을 땄다.
- 맥주는 역시 OB 맥주지.
- 크라운 맥주로는 이 맛을 낼 수 없지.
- 난 크라운 맥주는 도저히 못 먹겠다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 맥주라고는 OB 맥주와 크라운 맥주 둘 뿐이었는데, 그들은 아무거나 드시지 못하는 자신들의 섬세한 미각에 대해 한 마디씩 우쭐대고 나서야 제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침울한 갈색병 속에 웅크리고 있던 거품이, 잔에 술을 따르자마자 짠,하고 마술처럼 나타났다. 보리차를 닮은 온화한 빛깔의 음료는 하얀 거품을 털모자처럼 머리에 얹은 채 좁은 유리컵 표면에 송골송골 물방울을 만들었다. 고모들은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만난 듯, 유리컵을 조심스럽게 쥐고는 맥주를 한 모금씩 음미했다. 그들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초대받은 여신들처럼 마냥 행복해 보였다. 뾰족한 수 없는 남루한 일상도, 남루한 일상 때문에 뾰족해진 마음도, 맥주 한 잔에 거품처럼 가벼워졌다.
물도 없이 꾸역꾸역 빵을 삼키다 목이 매면, 고모들이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맥주잔을 비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65도 각도로 기울어진 잔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맥주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은,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어쩐지 미래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지만, 그건 아마도 기분 탓이었을 것이다.
고1 마지막 모의고사를 망친 날. 기분이 거지 같았다. 시험을 망쳤어. 집에 가기 싫었어. 이런 노래도 있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망친 자들은 대체로 집에 가기 싫어하는 모양이다. 진아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부모님이 함께 가게를 하셔서 진아의 집은 늘 비어 있었다. 진아는 킬킬거리며 허세 넘치게 얘기했다.
- 기분도 꿀꿀한데, 우리 술이나 한잔 할까?
- 우악! 술이라고? 집에 술이 있다고?
기분도 그런데, 술이나 한잔 하자니... 어쩐지 귀에 착착 감기는 것이, 이다음에 내가 자주 입에 달고 살 것 같은 멘트였다. (역시 기분탓이겠지.) 시험은 단박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암담하던 마음도 대범해졌다. 지금은 그런 조잡스러운 일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자물쇠로 잠가두었던 진아의 서랍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심지어 진로도 아니고 캪틴큐였다. 오빠 책꽂이에서 뽀린 거라고 했다. 이건 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 하기의 터줏대감이 아닌가. 럼~ 캪틴 큐, 소리와 함께 해적 선장의 애꾸눈 가리개가 날아가 버리던! 그 작은 병의 등장으로 인해, 방안에는 카리브해의 향취와 낭만이 가득 찼다.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사 온 떡튀순을 한 상 차려놓고 떨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땄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진아가 냉큼 뛰어가 커다란 컵에 얼음을 담아왔다. 얼음이 10개쯤 담긴 컵에 술을 10ml 정도 따랐다. 녹인 플라스틱 같은 묘한 화학약품 냄새가 번졌다. 뭔가 사람이 음용할 수 있는 음료라기보다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시약에 더 어울리는 향기였다. 소심한 우리는 5분이 넘도록 얼음컵을 상모 돌리듯 뱅뱅 돌리기만 했다.
집에 양주를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양주는 TV 속 소품이었다. 요즘 가장 양주를 많이 마시는 사람은 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차화연이었다. 시험기간에도 본방을 사수하게 만들던 중독성 짙은 드라마. 극 중에서 미자 역할의 차화연은 대체로 기분이 안 좋았는데, 그럴 때마다 유리컵에 양주를 따라 마시며 울부짖었다. 첫사랑과 결혼했고, 남편도, 자신도 성공했지만, 그녀는 매일 불행했다. 저렇게 예쁘고 저렇게 좋은 집에 사는데, 뭐가 그렇게 우울할까... 미자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존중이었지만, 아무도 그걸 주지 않아서 미자는 양주를 마셨다. 양주는 서러움의 메타포였다.
최고의 배우가 된 미자도 예뻤고, 그녀가 매일 들고 흔들어 마시는 위스키 온 더 블록도 멋졌으며, 술만 마시면 어마어마한 텐션을 올리는 그녀의 비아냥 화법도 기가 막혔다. 나 같은 잔챙이는 가늠할 수 없는 중첩된 고독이 서려있었다. 침착한 표정으로 위스키를 홀짝거리다가, 느닷없이 벽에 잔을 던져 깨뜨리는 과단성에는 간담이 다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먼 미래에 굉장히 빡치는 일이 생기면, 한 번쯤은 흉내 내 보고 싶은 장면이었다.
유리잔에서 딸그락거리는 얼음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여배우라도 된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공허한 눈빛으로 얼음잔을 훼훼 돌리다가, 안주도 없이 깡술을 홀짝거리다 보면 나에게도 그녀처럼 고급진 슬픔이 찾아오지 않을까. 나는 슬픔마저도 궁핍해서,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띠지 않도록 방구석 같은 곳에 찌그러져있는 스타일이었다. 양주가 든 유리컵을 쥐고 있으니, 내 구질구질한 슬픔도 드라마처럼 분장이 가능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음은 크기가 줄어들고 술은 점점 많아져, 결국 얼음 맛 술인지 술맛 얼음인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정도라면 원샷도 가능했다. 기분도 꿀꿀한데, 우리 원샷할까? 캬~ 한 세트 더. 진아가 다시 얼음을 채워오고 그 위에 또 캡틴큐 10ml를 부었다. 나는 또다시 그 아련한 슬픔을 기다린다. 이번에도 기다리는 슬픔은 오지 않고 얼음만 점점 작아졌다. 다시 술맛 얼음. 캬~ 한 세트 더. 드디어 조금씩 알코올이 기분을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니가 뭘 알어! 도대체 니가 나에 대해 뭘 아느냐구! 아무한테라도 차화연처럼 소리치고 싶었다. 온전한 정신으로는 감히 입밖에 낼 수도 없는 민망한 대사지만, 한잔 걸친고독녀에게이보다 어울리는 말도 없을 듯싶었다. 비록 찰랑찰랑한 슬립 가운을 걸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긴 했지만, 양주의 힘을 빌려서라면, 미자만큼 쓸쓸한내 일상에도 미자처럼 현란한 냉소를 쏘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울고 싶었는데, 울부짖고 싶었는데... 어쩐지 눈물은 안 나오고, 피식피식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슬픔은커녕 온몸의 맥아리가 좍 풀리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행복이 손가락 말단까지 살금살금 번져갔다. 난데없이 기분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이게 아닌데? 양주는 고독이고, 양주는 슬픔인데! 캡틴큐는 양주로 안 친다더니 이래서 그런 것이었던가.
벼르고 있는 냉소와 환멸은 찾아올 기미도 없고, 우리는 점점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입을 틀어막아도 자꾸 피식거리며 웃음이 터졌다. 곁에 앉은 진아가 차화연처럼 예뻐 보였다. 망친 모의고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시험 좀 못 보면 어떠랴. 나에게는 이렇게 소중한 친구가 옆에 있는데. 진아야. 너밖에 없다. 부모형제는 다 어디 가고 이 세상에 진아밖에 없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계속 너밖에 없다며 부담스러운 고백을 연발했다. 진아도 상태가 비슷했다. 야! 나도 너밖에 없어. 캬~ 역시 너밖에 없어.
술을 마시면 슬퍼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한없이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다던데, 캐리비안 해적의 호방함을 마신 듯 우리는 떡볶이 국물에 불어 터진 왕김말이를 한가득 입에 물고, 연신 너밖에 없다면서 깔깔거렸다.
고2 수학여행, 선생들이 자러 가버리자 드디어 우리는 한 방에 모였다. 고만고만한 소심둥이들의 기획인지라, 모이긴 했지만 다들 쭈뼛거렸다. 용감한 진아가 제일 먼저 숨겨온 소주병을 꺼냈다. 진아를 시작으로, 다들 가방 맨 밑바닥에 깔린 술병을 뒤적뒤적 찾았다. 우리 반 최고의 순딩이 미영은 겁에 질려, 어우야어우야를 반복하면서 자꾸 문쪽을 돌아보았다. 슬근슬근 꺼낸 술이 탁자에 쌓였다. 이제부터 뭘 어째야 할지 모른 채 우리는 심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마침내 반장 경숙이 리더십을 발휘했다. 쫄아붙은 우리들을 도발적 눈초리로 쏘아보더니, 과감하게 한 병을 깐 것이다. 그리고는 종이컵에 소주를 반의반의반의반 잔 정도 따라 모두에게 돌렸다. 원샷! 이 정도는 원샷을 하고 싶지 않아도 구조적으로 꺾어마시기가 불가능한 분량이었다.
어쨌거나 원샷이라는 샤우팅의 임팩트는 커서, 다들 자랑차게 머리 위에 컵을 털었다. 그리고는 얌전히 대기했다. 향정신성 음료를 마셨으니, 정신에 영향을 줄 누군가 똑똑 머리를 노크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너무 미량이라 무시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맛이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못 먹겠다는 몇 명이 먼저 포기를 선언했다. 자고로 기권하며 수건을 던지는 자의 등장만큼 남은 자의 쎈척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다시 한 바퀴를 돌렸다. 이번에는 반의반의반 정도. 원샷.
누군가 괜히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한모금도 안 되는 소주에 죠리퐁 반봉지를 안주로 마신 혜원이 자긴 마실 만큼 마셨다면서 먼저 침대에 쓰러졌다. 다시 한 바퀴. 이번에는 좀 더 과감하게 컵의 반의반. 마침내 최종적으로 술판에 남은 사람은 진아, 반장, 나 그리고 제일 먼저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순딩이 미영, 이렇게 넷이었다.
고수들의 판에서는 더 이상 술을 계량하지 않았다. 어차피 밤은 길었고, 아이들이 쾌척한 술은 한참이나 쌓여 있었다. 우리 넷은 이렇게 말술을 마셨는데도 생각보다 괜찮다면서, 새롭게 발견한 술꾼의 자아에 반해 제각기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겁에 질려 수백 번 문쪽을 살피던 미영이, ‘오늘 밤 누구도 자기 없기‘를 선언했고, 형님 리더십을 뽐내던 반장은 그런 미영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히죽거렸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몇 대에 걸쳐 꾸준히 알코올 중독자를 배출한 친가의 유전자가 본격적으로 저력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입으로는 아무 느낌이 없다고 서로 으스대면서, 라디오의 볼륨 다이얼을 오른쪽으로 돌리듯 조금씩 목소리는 커져갔다.
갑자기 미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시작하는 바람에 우리는 일제히 말을 멈췄다.
- 너희 만주가 누구 건지 알어?
갑자기 웬 만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밤만주? 누가 만주 싸왔어? 안주로 먹게 꺼내 봐. 근데 누가 미영이 밤만주 훔쳐 먹었냐?
- 야아아아앗!! 밤만주 말고, 그냥 만주, 만주가 누구 땅인지 아냐구!
그 만주? 쩌어기 위쪽에서 조상들이 말 달리던, 만주족 할 때 그 만주? 청나라! 누르하치! 변발!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반장이 잘난 척을 시작하자, 저마다 한 마디씩 만주와 관련된 알량한 상식을 끌어모았다. 만주족! 거란! 금나라! 바보야, 금나라는 여진이야. 여진도 만주족 아냐?
얘기가 점점 산으로 가자, 듣고 있던 미영이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다.
- 만주는 우리 땅인데 병신같이 뺏겼어. 만주는 우리 땅인데... 꺽꺽.
리콜당한 급발진 차량처럼 미영이 큰 소리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웃기에는 미영의 서러움이 너무 대대적이었고, 같이 울기에는 아무리 술김이라지만 생뚱맞았다. 나는 연상 게임이 내 앞에서 멈춘 바람에, 만주에 대한 연관 개념을 생각해 내느라 승부욕의 심지에 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미영이 또 소리를 질렀다.
- 너희들, 토끼가 누구 건지 알아?
앗, 깜짝이야, 토끼는 또 무엇일까? 두 번은 속을 수 없다는 결의를 불태우며, 아이들은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면 토끼는 설마 한반도? 빙신아, 그건 식민사관이야, 한반도는 호랑이지! 아이들 사이에 애국심이 불끈 솟을 무렵, 미영이 불현듯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내가 어렸을 때였어. 할머니가 새끼 토끼를 사 줘서 그걸 마당에 키웠었지. 정말 귀여웠는데... 근데어느 날 우리 엄마가 나한테 묻지도 않고 그걸 어디에 가져다 버린 거야. 공부할 시간에 토끼나 들여다보고 있는다구... 나한테 묻지도 않고. 내 토낀데...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자기 맘대로 버리고... 내 토낀데...
미영의 두 눈에서는 토끼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영의 엄마는 우리도 다 아는 무서운 분이셨다. 미영이 집에 전화를 걸면, 미영이 엄마는 매번 사나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 미영이 지금 공부하는데, 미영이는 왜 찾아? 넌 누구야? 왜 걸었어? 엉?
그저 미영이와 잠깐 통화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에게 매서운 추궁을 당하고 나면, 혹시 좀 전에 내가 ‘당신의 딸을 납치하고 있다’ 정도의 헛소리를 지껄인 것은 아닌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엄마 때문에, 엄마 때문에... 미영은 몸속의 배관이 터진 것처럼 쉼 없이 눈물을 쏟았다. 비웃기에는 미영의 슬픔이 너무 절절했고, 같이 울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명분이 부족했다. 하여 멀뚱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 수밖에.
이번에도 사태를 정리한 것은 반장이었다. 아이들의 난장판에는 이골이 난 듯, 반장은 우리를 한심한 듯 쳐다보더니 괄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참내, 대체 뭔 소리야.
반장의 윽박지름에 잠깐 움찔하던 미영은, 경숙이 만주 땅을 침범한 오랑캐라도 되는 듯, 두 눈에 이글이글 반항심을 담아 절규했다.
- 만주는 우리 땅이고, 토끼는 내 거야~~~~
도대체 따라잡기가 불가능한 폭주였다. 반장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 미친년 지랄하네.
경숙의 일갈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이것은 바로 한 잔 하신 미친년이 지랄을 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명징한 상황정리 덕에 혼동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우리는 큭큭 소리를 죽인 채 웃으며 미영의 등을 토닥였다.
- 그래그래, 만주는 우리꺼지. 토끼는 니 꺼고. 소유권이 분명해졌으니 그 기념으로 한 잔씩 돌렷!
이제는 다들 거나하게 술이 올라, 손을 달달 떨지 않고도 종이컵에 소주를 콸콸 잘도 따랐다. 그런데 한창 흥이 올라 깔깔거리던 진아가 갑자기 미영의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만주는 되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만주는 정말 우리 땅이라고... 겨우 틀어막았던 미영의 수도꼭지가 다시 터졌다.
- 그것 봐. 내가 뭐랬어. 이제 너희들도 내 마음 알겠지?
미영과 진아가 얼싸안고 서러움에 흐느끼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울컥했다. 만주를 빼앗긴 것이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나는 침을 꼴깍이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술김에도 이건 앞으로 50년은 놀려먹을 각이라는 감이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