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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Aug 26. 2022

이해한 만큼, 사랑한 만큼이 나의 삶이다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 송순섭 옮김, (열린책들, 2021)




철도 공무원으로서 평생을 성실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평범한 인생>의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돌아봤을 때 그의 삶은, 지녀온 서류와 문서들을 정리하고 나니 더 이상 정리할 것이 없을 만큼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마음에선가 그는 지나온 삶을 글로 정리하고 싶어 진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굴곡 없는 삶이어서 기록을 남기기에 너무 시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였다. 자서전을 쓰기 위해선, 평범한 삶도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다. 목가적이고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 의젓했고 모범적이었던 학창 시절, 고독 속에 삶을 던져버리고 세상 끝에서 홀로 방황했던 청년기, 정직하고 성실하게 완수한 직장 생활과 헌신적인 아내와의 축복받은 결혼 생활로 그의 삶은 요약될 수 있었다. 존경받는 고위 공무원으로서의 삶은 그의 아버지가 바랐던 대로 출세하고 성공한 삶이라 평가될 수 있을 터였다. 그의 자서전은 이처럼 한 남자의 평범한 성과들로 완결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소설은 예상치 못한 전개를 예비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건 '나를 엄숙하게 방문하는 일'이라고 페소아는 말했다. 우리의 내면에는 특별한 방들이 있어서, 그곳을 기억하는 또 다른 내가 어두운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듯 그렇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말이다. 특별한 방으로의 엄숙한 방문 끝에 주인공이 발견한 것은 충격과 고통이었다. 심장발작이 오고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만큼의 고통. 이것은 진실을 보고자 하는 이에게 찾아오는 숙명일 것이다. 언뜻 보게 된 진실을 덮어버리려는 마음과 진실을 구태여 들춰내고 직시하려는 마음이 그의 내면에서 다투기 시작한다. 인생의 완성이자 진정한 자신의 삶이라 여겼던 관청 생활--출세하여 명예와 지위를 누리는 일--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 나왔다. 거짓의 천을 걷어내고 진실을 말하려 하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는 정돈된 기억을 헤집고 구석진 곳마다 어둠의 빛을 비춰나갔다.




‘왜 혼자 놀았던 거지? 다른 아이들을 능가할 수 없어서 그랬던 거야. 그건 나약하고 능력이 모자란 아이의 저항이자 도피였어. 자존심이 센 겁쟁이, 바로 그거야.’ ‘여보게, 그건 우정이 아니었어. 그건 세상 누군가가 자네의 우월함을 겸손히 인정해 주는 데 대한 열렬한 감사의 표시였을 뿐이야.’ ‘너는 시 따위로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 그러기에는 재능도 모자라고 인격도 부족하다는 것도. 넌 그들을 흉내 내려고 했던 거야. 뭔가가 되어 보겠다는 너의 노력은 수포로 끝났어. 그건 패배였어.’ ‘대체 왜 역장의 딸에게 접근했지? 처가 덕분에 출세한다는 거 있잖아?’ ‘착하고 양심적인 공무원? 결국 더 높이 올라가는 약삭빠른 자들을 보았어. 세상이란 보다 강하고 용감한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너는 패배자였어. 그들은 너를 조사했고 넌 은퇴를 했어. 패배였지. 그건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고, 끔찍한 삶이었어.’



다른 목소리가 전하는 것은 하나의 삶에 대한 냉혹한 다른 해석이었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을 그는 다시 써 내려가야만 했다. 선택과 만남의 의미를 더 깊숙이 바라보고 재정의할 때, 삶은 다르게 적혔다. 하나의 자아로 통합하고 구축해왔던 '평범한 인생'은 수면 아래 수많은 다른 자아를 숨기고 있었다. 그는 약하고 민감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자신을 끊임없이 간호하고 과보호했던 어머니가 그에게 심어준 것은 자기 불신과 육체적인 열등감이었다. 근검함과 강인함 뒤에 숨어서 삶을 두려워했던 아버지의 성향은 스스로가 의식하는 것보다 더 깊이 그의 내면에 뿌리 박혀 있었다. 그런 성향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안정된 기반을 다져야 한다는 강박이 되어 그를 억척이로 만들었음을 그는 깨닫는다. 그는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인 동시에,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였으며, 삶을 두려워하는 나약하고 소극적인 우울증 환자이자 철도를 사랑한 낭만주의자였다. 그 모두가 그 안에 있었고 모두 그의 삶이었다. 삶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하는, 성당 문가에 서 있는 거지도 그중 하나였다. 내면의 아주 깊은 골짜기에는 자신의 사악하고 타락한 부분이 억눌린 채 있었는데, 그의 삶에 몰락과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은밀한 어둠이었다.




우리는 삶에 단일한 서사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모순됨이 없고 완결된 하나의 자아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선별하고 편집한다. 어떤 것들은 폐기하고 수정하면서까지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려 한다. 그렇게 버려진 장면들과 수정 이전의 장면들은 나의 삶이 아닌  되는 걸까. 외면했던 사건들에서 그림이   있는 연결선들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삶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하나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어떨까. 소설은 극단적으로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속에 있었고, 고유한 삶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수많은 가능성   가지 가능성일 뿐이라 말한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었다. 누구나 고정되고 통합적인  하나의 자아를 가진다는 것은 허상이다. 하나의 그림으로 아름답게 통합될 수는 없을 다양하고 모순된 자아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우리는 좀더 자유롭게 인생의 항로를 선택할 수 있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213쪽)




다양한 자아의 실체와 자신의 민낯을 마주한 끝에 삶의 여러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에 이른 주인공은 나아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연결한다. 삶의 가능성을 더 크게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곳으로 나아갔다. 우리 안의 다양한 가능성은 다른 이들의 내면을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준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 떠밀려 성실한 삶을 살아온 억척이는 내 안에도 있었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고 싶지 않던 성당 밖의 거지 또한 내 안에 있었다.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던 삶,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본다. 내 안의 성향은 어디에선가, 누군가로부터 왔고, 내 모든 가능성은 나의 것인 동시에, 모든 형제들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많은 운명의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서, 그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써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며, 가능성이기만 했던 것은 현실이 된다. 나를 제한하는 이 자아가 내가 아니면 아닐수록 나는 더 많은 존재가 된다."(240쪽) 당신도 나도, 똑같은 가능성을 살아가는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넓게 사랑할 힘을 얻는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당신 안에도 있고, 그렇기에, 내 삶은 당신의 삶, 곧 우리의 삶이다. 소설은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 가장 평범한 인생이다. 내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하면서도 그것은 축복이다.
(240쪽)




인간은 사회 바깥에서 살아갈  없고, 그러하기에 누구나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 속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지위는 사회의 인정으로부터 성립되고 보호받는다. 세속적인 성공 혹은 부와 명예를 바라는  아니라 해도, 우리는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속에서 인생의 의미도 찾아지는 거라 믿는다. 외부의 인정은 누구에게나  시간 삶에서 크나큰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그가 삶에서 이뤄낸 성취들을 누구도 함부로 깎아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동기와 욕구를 알아차리고 외부의 요구와  구분하는 일인  같다. 진실을 알아차린 곳에선 자기 모순이 발견될 테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것으로 융합해 나갈  삶은   가능성과 자유를 얻게 된다. 주인공이 생의 마지막에 했던 질문을 우리는 지금 던져볼 수도 있겠다. 무엇이 온전한 진실인가. 무엇이 진실한 나일까. 지금의 나보다  나은 내가 되고 싶고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었던 바람은 나의 진실한 욕구였을까, 그저 인정받고 싶은 욕구였을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가 나를 알아봐 줘도, 나는 그저 나일뿐이니 말이다.




밑줄  문장들을 수없이 곱씹어 본다. " 많은 이들을 이해하는 . 그것이 진정한 삶이자 평범한 삶이다.  것이 아닌 우리의 . 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그것은 평범하면서도 축복이다." 온전히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을 남들과 달리 특별해지거나 개성을 추구하는 일이라 착각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스스로에게 진실한 삶은 평범한  속에 깃드는지 모른다. 내가 아닌 다른 나를 꿈꾸기보다 오늘 주어진 나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누리는 , 나의 위치와 나와 연결된 선을 알아차리고  돌보는 , 그렇게 보편적이고 평범한  말이다.  안의 어떤 목소리가 말을 건다.  안에 흐르는 광대한 생명의 흐름을 보라고.  안의 수많은 사람들과 너를 닮은 사람들을 이해해보라고. 이해하는 만큼이 너의 삶이며 사랑한 만큼이 너의 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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