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
에밀리 그리어슨 양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남자들은 쓰러진 기념비에 대한 존경 가득한 애정의 마음을 품고서, 여자들은 정원사와 요리사를 겸한 늙은 하인 외에 적어도 10년은 아무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집 내부를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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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에밀리 양은 하나의 전통이자 의무이며 관심의 대상이었다. 즉 마을에 세습되는 일종의 책임이었다.
윌리엄 포크너,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장미」
<윌리엄 포크너> (현대문학, 하창수 옮김, 2013)
시간은 누구에게나 일정한 속도로 동일하게 흐르는 것 같아도 누군가에겐 어느 한 순간이 큰 폭의 낙차로 느껴질 수 있다. 남북전쟁으로 몰락한 귀족 가문의 마지막 후예로서 에밀리가 느꼈을 비애. 그 무게와 두께가 처연한 기운으로 소설 전체를 감싼다.
이 글의 화자가 ‘우리’, 즉 마을 사람들 모두라는 점은 기이하다. 그리어슨 가문은 마을 사람들에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여읜 에밀리에 대해서 공동의 의무와 책임을 느꼈을 정도다. 시장이 그녀의 세금을 영구히 면제해 주기로 한 결정에도 이의를 제기한 이는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시대 상황이 맞물려 그리어슨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에밀리는 패망한 가문의 마지막 자손으로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진다. 아버지의 죽음조차 인정하지 않는 에밀리를 보며, 사람들은 이해하기부터 한다. 그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동정한다.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본 마을 사람들은 에밀리의 딱해진 처지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녀가 이제는 고고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와 슬퍼하고 절망하는 ‘인간적' 모습을 보일 거라 기대하는 이도 있었다. 그 속에는 일종의 승리감도 있었으리라.
젊은 세대가 시의원 자리에 오르고 그녀에게서도 세금을 걷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 집에서 이상한 냄새에 난다는 민원이 들어오자 곤란해하면서 머리를 짜내 조치를 취한다.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모욕을 안겼다 여겨 미안하게 생각한다. 두문불출하던 에밀리가 북부 출신의 일용직 일꾼인 호머 배런과 사귀어 마을에 얼굴을 비추었을 때, 사람들은 진심으로 기뻤다고 말한다. 그녀가 마침내 짝을 만나 결혼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는지, 그녀가 신분이 ‘미천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여인들은 마을의 수치가 되리란 점을 염려했으나, 에밀리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노인들도 있었다.
소설은 기묘하게도 화자에게서 먼 에밀리의 입장에서 마을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 모든 선량한 관심이 온통 뒤엣말과 수군거림이 되어 그녀를 뒤쫓는 듯했다. 한때 그녀의 가문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우러러보던 이들이 이제는 동정과 연민으로 대한다는 사실은 조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던 저택이 이제는 흉물이 되어가고 자신의 존재 역시 짐스럽고 부담스러울 뿐인 ‘옛 과거의 상징’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그녀도 모를 수 없다. 지나친 관심은 그녀가 위엄 있는 가문의 외동딸이었을 때는 무시할 수 있을만큼 가벼운 성질이었을지라도, 홀로 남겨진 그녀에겐 세상이 점점 좁아드는 감옥의 일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의 배신은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를 더욱 부추겼을 터이고, 그녀를 수치심과 모욕 속에 몰아넣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변화를 일절 거부한 채 모든 것을 박제해 버린다. 그녀의 애인도 그녀 자신도.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두어 버린다. 에밀리를 이토록 기괴하리만치 고집스럽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그녀 자신일까. 그 남자일까. 아버지일까. 마을 사람들일까. 시대의 변화일까. 아니면, 그 모두일까.
어떻게 했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했을까. 그녀가 아닌 한 우리는 알 수 없다.
영화 ‘벌새’ 속 대사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