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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Jul 17. 2021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프랑켄슈타인: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미친 과학자와 복수심에 불타 비틀거리며 걷는 괴물을 보여 주는 데 급급하면서, 진지한 심리 소설인 원작에서 멀어진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반비, p66)​





이름 없는 존재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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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으로 오인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시신에 생명을 불어넣은 과학자의 이름이며,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인 ‘괴물’에겐 이름조차 없다. 우리가 이름을 혼동하고 착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북극 항해에 나선 탐험가 월턴이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만난 이야기가 나오고, 그가 어떤 광기와 열의에 휩싸여 피조물을 창조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들려주는 괴물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 소설에서 괴물의 서사는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바로 괴물의 서사가 이 소설의 풍부한 해석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이후 문학과 다양한 장르에서 상상력과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을 부를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리뷰를 쓰는 이 순간에도 곤란함을 안겨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에게 이름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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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지요.”

- 『프랑켄슈타인: 현대판 프로메테우스』(현대지성, 오수원 옮김,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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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자신의 창조자로부터 생명을 얻자마자 버림받는다. 프랑켄슈타인은 시신을 조합하여 인간을 만들었으나, 시신이 살아나자 공포에 질려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도망쳐버리고 만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거대한 몸집과 흉측한 외모 때문에 모든 곳에서 야수로 취급받는다. 그가 베푼 선행조차 폭력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에겐 누군가 다정스럽게 불러줄 고유한 이름도, 안전하게 머물 장소도 없다. 곤경에 처했을 때 그의 신원을 보장해 줄 가족이나 친구, 그 무엇도 없었다. 어느 곳에서도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속감을 얻지 못한다. 아직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의 예절을 배우지 못한 그에겐 그를 사회로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겉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그 때문에 공포에 질려 자신을 혐오하고 배척하기만 했다. 불행에 빠진 그는 몸을 숨길 곳을 찾게 되고 펠릭스의 헛간에 숨어 지내며 그들 가족의 삶을 몰래 지켜보게 된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에 감동을 느끼고 인간에 관해 많은 사실들을 깨쳐나간다. 인간이 지닌 훌륭한 덕성을 그들에게서 발견하고 여기에 희망을 건다. 펠릭스의 가족이라면 자신의 흉측한 외모 너머로 자신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보아주리라는,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다리가 되어줄 거라는 열망을 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첫 단추로써 그들의 환대는 너무나 절박하고 필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마저 그를 외면하고 떠나버렸을 때 그의 희망은 처참히 짓밟힌다. 자신을 창조하고 이러한 비참과 절망 속에 내버려 둔 창조자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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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괴물의 모습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 흉악하고 포악하지 않았다. 그는 무력하고 의지할 곳 없으며 잘 알지 못하여 상처 받는 어린아이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폭력에도 그는 자신 안의 선한 의지를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한 경멸과 혐오의 시선을 먹고 점차 사악하게 변해간다. 어느 한 사람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에겐 부모와 같은 프랑켄슈타인이 그를 증오하고 그를 버렸다는 사실이  절망을 가져다주었다. 인간의 감각은 불완전하다. 표피 너머로 내면의 진실을 보는 감각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현혹되어 온전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불완전한 감각은 상대를 단순하게 축소해버리고 쉽게 판단해버리며 재고의 여지없이 돌아서게 만든다. 사람들과 다른 외모를 지닌 괴물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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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혐오 담론과 관련하여 피해자들에겐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편을 가른다는 비판이 있어 왔다. 그러나 폭력의 옷을 입은 방식으로 발화할 때에야 비로소 관심과 주목을 받는 존재들이 있다. 평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주변부로 밀려나기 쉽고 대개 가시화되지 못한다. 어떤 일부 특성 때문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이 바로 혐오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가 약자를 폭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괴물이 되어간다. 그 어디에서도 온전한 자기만의 자리를 구할 수 없고, 자신의 몸을 숨기도록 강요당하며, 사람들의 눈에 띈다는 사실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이 될 때, 그는 분노에 의탁하게 된다. 자신과 똑같이 닮은 반려자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그의 마지막 의지이자, 최소한의 우정과 유대감,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단 한 사람에 대한 요구이며 관계를 향한 인간의 절실한 욕구다. 그 누구도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었더라면, 그가 프랑켄슈타인의 친구와 가족들을 죽이는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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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은 늘 있어요. 선택을 하면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고요.”

-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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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을 만들고 이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생체 전기 실험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실험 자체에 광분할 뿐 결과의 위험성을 전혀 내다보지 못했다. 메리 셸리의 삶을 다룬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에서는 퍼시 셸리와의 만남과 이 소설을 집필하던 당시의 메리의 고뇌가 그려진다. 영화는 제한되고 차별당하는 여성의 삶과 그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불행에 맞서는 메리의 의지에 초점을 둔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퍼시 셸리와의 동거를 선택한 그녀는 자신과 그들의 아이에게 책임감을 갖지 않고 여전히 사랑할 자유만을 추구하는 셸리의 태도에 상처 받는다. 그녀의 소설은 작가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작품 자체로써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며, 시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남편이 쓴 소설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프랑켄슈타인』은 처음 출간 당시 저자의 이름을 지운 채 익명으로 출간되었고, 이는 소설 속 괴물에게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결과에 대해 숙고함이 없는 무책임한 과학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프랑켄슈타인은 현실 속 셸리와 겹쳐진다. 메리의 이복동생을 임신시키고도 그 모두를 무시하고 외면해버린 바이런(양육비는 보냈을지라도)은 좀 더 극악한 버전의 셸리이며, 수많은 방탕한 인간의 모습이자,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폭주하는 과학의 미래와 포개진다. 괴물은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현실의 여성이며, 배척당하고 보이지 않기를 강요당하는 약자이자, 상처 입고 파헤쳐지는 지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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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동생의 실연을 직시하고 바이런의 별장을 떠나려는 메리에게 바이런 경은 말한다. “난 사랑한 적 없어요. 그런 척한 적도 없죠.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남자고 여자는 여자죠. 젊은 여자가 집요하게 성인 남자에게 덤비는데 다른 방법이 있겠어요?” 메리는 단지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방법은 늘 있어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면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고요.” 바이런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바이런적 영웅은 이후 많은 문학에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그는 결점이 있는 인간이었다. 고립감과 무시, 불행은 우리를 악마로 몰아간다. 유부남과의 낭만적 사랑의 도피로 시작된 셸리의 결혼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셸리를 떠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메리는 셸리가 실종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8년 여 간 그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했고, 네 아이를 낳았으나 세 아이를 잃었다. 젊은 날 자신의 선택이 무모했을지라도 그녀는 그 선택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힘든 순간들을 견뎌낼 힘은 자신의 선택을 수용하고 선택한 삶과 불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오기도 하니까.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에 다가가 보고 싶은 것이다. 퍼시 셸리 사후 그녀는 독신을 유지했으며, 아들과 아버지를 부양할 수 있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버림받고 상처 입었지만,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싶지 않은, 스스로 괴물이 되는 일을 막고 싶은 한 여성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자 분투하는 의지로 쓰였다. 소설은 말한다. 우리에겐 언제나 다른 방법이 있다. 그리고 선택엔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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