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한정원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17-18쪽)
인디언 소녀가 친구에게 자신의 집으로 오는 길을 설명한다.
울타리를 지나서 바다 반대편 고사목 쪽으로 와. 일렁이는 가는 물줄기가 보이면, 푸른 나무에 둘러싸일 때까지 상류로 올라와. 해가 지는 쪽으로 물길을 따라오면 평평하고 탁 트인 땅이 나오는데, 거기가 나의 집이야.
(...)
내가 당신이라는 목적지만을 찍어 단숨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소한 고단함과 아름다움을 거쳐 그것들의 총합이 당신을 만나게 하는 것. 그 내력을 가져보고 싶게 한다. (23-34쪽)
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 흐름 (2020)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라고 작가는 프로필에 썼다. 한때 시를 썼다던 작가가 마음에 담았던 시들은 과연 아름답다. 하지만 이 책의 문장이 작가가 인용한 시들보다 더 마음을 붙잡았다. 맑고 시린 겨울날의 차가운 밤하늘처럼 좋았고 어둠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좋았다. 모든 문장들을 손으로 받아 적고 외우고 싶어지는 만큼이나 글쓴이를 그려보게 되었다. 낯 모르는 사람을 다정한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 진다. 시어의 옷을 입은 문장들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고, 쓸쓸하지만도 다정하지만도 않았다. 다만 담담하게 흘러나와 오목한 자리로 고여 들었다. “무게에 지지 않은 채 깊이를 획득”하는 일은 바로 이 책의 문장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말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수도자가 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하나의 마음을 평생 가져가는” 할머니 수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서른과 마흔의 나는 궁금하지 않은데, 일흔 즈음의 내 모습은 보고 싶”었다고도 썼다. 서른의 내가 궁금하지 않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 마음은 헤어리기 어려운 것이라서, 괜한 손가락만 구부려본다. 그녀의 글엔 ‘지나친 자애나 자만’ 대신 자아를 부풀리는 마음에 대한 경계심이 있다. 한때 내게 당연해 보였던 성취에 대한 꿈도,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나 원망 따윈 없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한 조급함이나 조바심 같은 것도 없었다. 그녀의 문장은 어딘가에서 할머니 수도자의 삶을 살다가 우리 곁에 온 사람의 것처럼 초연하다. 그 마음은 작가가 말한 ‘은둔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에밀리 디킨슨의 삶처럼, 눈에 띄지 않는 삶 말이다. 그녀는 수도자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걷는 일을 좋아하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이는 일을 좋아해서 길고양이 들과 가난하고 아픈 이웃들이 자꾸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 보이는 거리는 좁지만, 보이지 않는 거리는 우주만큼 멀 수 있다. ‘나’라는 장시는 나조차도 미리 짐작할 수 없는 행들을 붙이며 느리게 지어진다. (25쪽)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55쪽)
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 흐름 (2020)
그녀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이 나도 좋아서, 그녀의 마음이 머무는 풍경들이 따스하고 섬세해서,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과 바라는 작은 것들을 가만히 내 마음에 옮겨보고 싶었다. 그러다 이내 부끄러워졌다. 그토록 깨끗한 마음이 내 것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를 그려보고 싶어서, 이런 사람, 이런 사람이라고 적어 내려 가다가 멈칫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빗기어 말하진 않았을까, 함부로 오해한 건 아닐까. 많은 문장들을 그렇게 썼다 지웠다.
그녀는 아껴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덜 주는 것이 배려가 되고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 최선의 위로라는 것을 아는 사람. 자신을 가엾게 여기기보다, 아껴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아끼게 될까 봐 염려하는 사람. 사랑을 잃고, 희망을 잃고, 누군가를 잃은 뒤에도 “그늘 속에 몸을 둔 채로 볕을 보는 사람, 내 몫의 볕이 있음을 아는 사람, 볕을 벗어나서도 온기를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다며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해선 아껴 말하는 것만이 내 애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일 텐데,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다.
팔다리가 나무처럼 굳어가고, 호흡이 가빠지고, 덜 보이고 덜 들리게 될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아껴 움직이고, 아껴 말을 하고, 아껴 보고 듣게 될까. 아껴 사랑하게 될까 아니면 사랑을 아끼게 될까. (...) 사람의 색이 바래거나 사라지지 않고, 순록의 눈동자나 호수의 가슴처럼 그저 색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계절에 따라, 나이에 따라, 슬픔에 따라. 그러면 삶의 꺾임에도 우리의 용기는 죽지 않고, 무엇을 찾아 멀리 가지 않아도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목격하며 너르게 살아가지 않을까. (66쪽)
다시 이전과 같이 나의 미래를 낙관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사랑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도 끝과 죽음을 먼저 고려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늘 속에 몸을 둔 채로 볕을 보는 사람, 내 몫의 볕이 있음을 아는 사람, 볕을 벗어나서도 온기를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97쪽)
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 흐름 (2020)
책장을 덮을 땐 바다가 그리워졌다. “모래보다 소금보다, 비밀의 밀도가 높”은 바다. 너르게 다가와 묵묵히 들어주는 바다. 그 곁에서는 모두가 아름다워지는 바다.
바다 같은 책이었다고, 다만 그렇게 말할 걸 그랬다. 나에게 다정히 다가와 말 걸어주는 바다였다고.
“같이 걸어요.”
바다처럼 너른 사람이 되진 못하겠지만, 자주 바라보고 때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마음을 다해, 겨우 답한다.
“같이, 걸어요.”
바다는 저 혼자 아름답지 않다. 바다 곁에서는 모래도, 물결의 무늬도, 새와 사람의 발자국도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바다 곁에서 살기를 바라고 있다. 걸어서 바다에 닿을 수 있는 크지 않은 집에서, 가능한 아는 사람들 없이 혼자 혹은 둘이서, 변함없이 덧없이 사랑하면서. (79쪽)
“같이 걸어요.”
모든 시작이 이런 말이면 어떨까요. 같이 걷자는 말. 제 마음은 단번에 기울 것입니다. (169쪽)
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 흐름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