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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리비 Jul 05. 2024

어린 시절이 가전제품 CF 같지 않았더라도

상담을 처음 시작하면서 내담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드리는 질문들이 몇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아시아계 내담자들만 머뭇머뭇하는 질문이 하나 있더라구요. 바로 어린 시절 학대 경험에 관한 질문입니다.


"음... 이게 학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요...저희 부모님은 저를 위해선 뭐든지 다 하셨어요.. 그런데 그게 좀.."


이야기를 풀어나가다보면,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동양 문화의 영향 때문인지,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구요.


가전 제품 광고를 보면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 마치 자기들만 아는 비밀을 품은 듯 미소 지으며, 햇살 가득한 집에서 행복해하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외벌이로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완벽한 머리와 화장을 하고 앞치마를 두른 엄마며, 얼굴에 뭐 하나 묻은거 없이 환하게 웃기만 하는 아이들이며, 회사가 아닌 동네 마실을 다녀온 것 같은 온화한 표정의 아빠까지. 우리 가족은 왜 이러지 않을까, 왜 다른 집이랑은 다를까, 고민해본적 있나요.


이 세상에는 자기가 가진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부모는 없고, 아이의 니즈를 전부 완벽하게 채워주는 부모 또한 없는 것 같습니다. 심리 상담을 하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꾸만 하는 이유는, 내가 나약해서, 부모에게 모든 탓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이가 신체적으로 잘 성장하려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영양소가 제공되어야 하듯이, 정서적으로 잘 성장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영양소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잘 못 먹어서 키 안 큰건 나중에 고칠 수 없지만, 정서적으로 영양이 결핍된 건 어른이 되어서도 스스로 학습과 훈련을 통해 되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이라는 놀라운 능력이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죠. 신경가소성이란, 매번 사용하는 뇌의 회로 대신 다른 회로를 사용하도록 의식적으로 훈련하면, 실제로 훈련한 회로를 자동으로 사용하도록 뇌구조가 변형되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뇌를 재훈련 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영양소가 빠졌는지 파악부터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상담사들이 어린 시절, 어린 시절, 하는 겁니다.


내 어린 시절이 가전제품 CF처럼 완벽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 내게 생겼던 결핍을 오늘날에는 내가 스스로 채워준다는 전제 하에서요. 그 결핍은 일을 통해서도, 쇼핑/여행/취미를 통해서도, 친구를 통해서도, 연인/배우자를 통해서도 채우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좋은 부모' 역할을 하면서 채우기 시작합니다.


이제 어른이 된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옛날 사진을 찾아내 들여다볼 수도 있겠네요. 그 시절 혼란스럽지는 않았는지, 무섭지는 않았는지, 그때의 기분이 기억 나시나요. 나는 이제 그 힘 없는 어린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기억해내고 공감해줄 수 있습니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라고 말해줄 수도 있겠네요.


그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었는지는 오늘의 어른인 나와, 그때의 어린 아이인 나와의 대화로 풀어갈 수 있습니다. 엄마 아빠 두 사람 사이의 문제로 다툼이 잦아 나에게 충분한 관심을 줄 수 없었다면, 나는 그 시절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겁니다. 힘들어 하는 엄마 아빠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나의 욕구는 전부 꾹꾹 눌러버리고, 엄마 아빠가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나의 말과 행동을 조심스레 편집하는 법을 배웠을 거구요. 하지만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움츠러 들어 생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는 엄마 아빠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데, 나는 어른으로써 나의 몫을 충분히 잘 해내고 있으니까요.


부모가 특별히 싸우지도 않았고, 물질적으로도 풍족했던 경우라도, 부모 공감 능력의 한계로 결핍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Webb & Musello, 2012). 유난히 칭찬에 인색한 한국 부모들의 특성상, 아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충분치 않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부모의 입장이 되어볼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네가 험난한 세상에서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던 거라구요.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객관적으로 충분히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압박을 안고 괴롭게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가 원한 건 내가 평생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게 아니라, 행복한 내 아이였을거잖아요.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스스로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해왔고, 이제는 충분하다구요.


부모에게 일반적인 스트레스 이외에도, 정신 질환이 있어 아이에게 결핍을 생성해내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성격 장애라든지, 심한 불안증이나 우울증, 각종 중독이나 분노 조절 장애 같은. 이런 경우에는 아이는 매우 혼란스럽고 두렵고 외로웠을 겁니다. 다른 아이들은 이 정도로 힘들게 살지 않았었고, 네가 이렇게 힘들었던건 네 탓이 아니라, 자기만의 고통과 씨름하느라 너를 돌볼 여유가 없었던 부모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해줄 수 있겠네요. 그 아이가 이제는 자기 탓은 그만하고, 자기도, 부모도 용서하고, 자기만의 행복한 삶을 설계해나갈 때가 되었다고요.


내가 나에게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이렇게 내가 세상에 대해 이해한 것을 또박또박 알려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겁니다. 좋은 부모라면 내 아이가 몸에 나쁜 행동을 하거나,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 곁에 머물도록 두지 않을 겁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나를 응원하기도 하고 지켜주기도 하고, 때로는 따끔하게 지적해주기도 하는, 사랑과 엄격함을 동시에 갖추었을 겁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치유해나가다 보면, 뇌의 재학습이 시작됩니다. 세상은 알고 보니 충분히 안전하고 즐겁고, 살아갈 만한 곳이라고요.



연습 1. 어린 시절, 유난히 기억이 뚜렷한 에피소드가 있나요. 그 당시 어린 내가 느꼈을 부정적인 감정은 어떤 것이었나요?


연습 2.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세상에 대해 그만큼 아는 것이 많아졌습니다. 당시 어린 내게 그 상황을 납득이 가능한 문장으로 설명해줄 수 있나요?


연습 3.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 어른인 내가 다시 돌아간다면, 어린 나에게 어떤 조언이나 위로를 해줄 것 같나요?


참고.

Webb, J., & Musello, C. (2012). Running on empty: Overcome your childhood emotional neglect. Morgan James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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