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복작복작한 밴쿠버 다운타운 한복판을 걷는데, 어떤 사람이 스파이더맨 복장을 하고 유유히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할로윈도 아니고 아무 날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스파이더맨이고 싶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캐나다 생활이 좋은 점 중 하나는 남의 시선으로부터 정말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겁니다. 이곳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주는 행동만 아니면, 남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다니든, 진심으로 서로에게 관심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각자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한국에서 욕구나 취향을 주변으로부터 주입(?) 당하고 통제(?) 받는 느낌이 들 때도 있는데, 이곳은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나를 알아가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란 생각도 듭니다.
나의 욕구를 알아갈 기회가 유난히 절실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애착 트라우마 전문가로 활동 중인 밴쿠버의 가보르 마테 박사는 패밀리 닥터 시절, 암이나 자가 면역병, 혹은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대하면서 이들의 성격적인 특징을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고 합니다 (Mate, 2004):
나의 욕구를 자동으로 억제하며 타인의 욕구에만 집중하는 사람
나의 역할과 책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
건강한 화를 억누르는 사람
"남의 기분은 모두 내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 혹은 "나는 절대로 남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면 누구나,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남을 편하게 해주려는 태도가 어느 정도 몸에 배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지나치게 되면, 내가 많이 불편하거나 내 건강에 해가 되더라도, 정당하지 않은 요구에 대해서도, 혹은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남을 "편하게" 해준다는 미명하에 무리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이 오래 지속되면, 그 감정적인 스트레스가 임계치를 넘어 몸에서 여기저기 신호가 오기 시작합니다.
마테 박사는 이렇게 무리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안위보다는 타인과의 연결감이 절실하기 때문이고, 이렇게 불건강할 정도로 연결감이 중요해진 이유는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이 조건부였거나,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정하게 형성된 애착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되어 남의 욕구에 자신을 재단해 억지로 끼워맞춰가며, 자신의 가치를 쓸모를 증명하는 것으로 대체하려 합니다. 내가 이렇게 쓸모가 많은 사람이 되면, 나는 버림 받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쓸모가 많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끌리거나 정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가치가 분명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싶어하며 모든 애정과 노력을 그런 사람들에게 들입니다. 쓸모가 많은 사람은 딱 아쉬울 때만 찾게 되죠.
매번 헌신하는 사람보다는 자기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더 사랑받는 이런 불공평함은 어디에서 오는걸까요. 저도 끊임 없이 제게 쓸모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왜 불편한지 한참 고민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설명법을 찾았습니다. 저는 이런 "좋은 사람"들의 태도를 악덕 사장에 비유합니다. 상대방은 귀한 고객으로 대하면서 나의 몸, 나의 멘탈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직원 정도로 생각하는 그런 사장 말이죠. 고객을 위해서라면 직원들이 끼니 거르고 야근 정도야 할 수 있는거 아니냐며. 그런데 지켜보는 고객 입장에서, 자기 직원을 저렇게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나한테도 저런 식으로 함부로 할 수도 있겠구나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반면 자기를 꿋꿋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보면, 나도 괜히 저 무리에 좀 끼고 싶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드는 모양입니다.
자기 가치에 확신을 갖는다는 건 나의 쓸모와는 무관하게, 나는 있는 그대로 소중하다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에서 나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신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으려면, 이제라도 나 자신을 가끔은 그냥 좀 내버려두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인가요? 내가 아무 쓸모가 없어진 날에도, 나는 여전히 사랑 받고 보살핌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요? 밝고 씩씩하고 긍정적이지 않은 날에도, 나는 여전히 괜찮은가요? 내가 세상에 기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껏 베푸는 행위의 출발점이 부족한 자기 가치에 대한 수치심이 아닌 차고 넘치는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연습 1. 내가 평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활동을 전부 쭉 나열해보고, 내가 실제로 좋아하는 순서대로 나열해보기.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보기.
연습 2. 남들이 내가 당연하게 해줄거라 기대하는 것을 한 가지만 골라, 하루만 안해보기.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아닌 나의 내면의 반응에 집중해보기.
연습 3. 남들이 나에게 기대한다고 내가 가정한 것들 중 하나를 골라, 상대방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 사실 확인해보기.
참고.
Mate, G. (2004). When the body says no: The cost of hidden stress. Vintage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