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를 낳고, 우리 부부 둘이서 모든걸 감당해야했다.
우리가 사는 엘에이 지역에 우리를 도와줄 가족이 한명도 없었다.
일단 아이에게 집중하기 위해 내가 경력을 잠시 보류했다.
디자인과 아트쪽이니 은퇴도 없고, 취업이 안된다면 프리랜서로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거 같은 자신감이 있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출산 후 일년여뒤 다시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내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것이란 철없는 다짐이 있었다. (네 육아를 만만히 보고 있었단 뜻입니다..)
학생시절, 주변에 비교적 일찍 출산한 유학생 부부들이 있었다.
아기를 포대기에 안고 재우느라 거실을 왔다갔다 걸으며 책을 보던 선배가 있었는데, 당시는 그렇게 열육아, 열공하는 모습이 낭만적으로 보였다.
또 다른 부부는 둘 다 공부하던 시기에 아이를 낳았던 친한 언니네인데, 두 사람은 동갑내기 부부로 알콩달콩 항상 즐거워 보였다.
그 언니 오빠들보다 몇살 더 어렸던 나와 내 싱글 친구들이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웃고 울고 지지고 볶던 시절,
그 결혼한 커플들은 우리 싱글들과 비교될 만큼 생활이 차분히 안정 잡히고, 행복하게 잘 살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육아를 어렵게 보지 않았던거 같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낭만적으로 육아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웬걸,,
그런데 내가 아이를 낳은 후 다시금 그들을 생각하니, 육아의 낭만은 가당찮은 착각이었다.
(내가 어렸다.^^;)
당시 아기를 안고 책을 보며 아기 낮잠을 재우던 낭만적인 선배는 아빠였는데,
유학와서 공부하는 남편을 위해 홀로 독박 육아를 하다 지쳐 쓰러진 언니에게 짬을 주기위해, 선배가 캐리어에 안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험을 앞두고도 책상이 아닌 아이를 안고 왔다갔다 거리며 힘겹게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던 모습이었다.
알콩달콩했던 동갑내기 부부는 갓 태어난 아기만 한국으로 보내야 했다.
아기는 한국에 시댁과 친정을 오고가며 어른들이 육아를 분담해주셨고,
그동안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언니는 떨어뜨려 놓은 아기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해 몇년동안 몸이 아파 고생했었다.
내가 그런 기억은 잠시 망각하고 있었네..
학교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도 막상 아이를 낳고보니 3살까지는 엄마손으로 직접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둘째를 낳았다.
머 애 둘인데 두배정도 힘들겠지,, 이미 경험이 있으니 어느정도 육아의 내공이 쌓였으니,,흠.
또 웬걸,,
둘째 낳은 후 첫 삼개월은 전보다 네배가 힘들었다.
(왜 아무도 이야기 해주지 않았을까..^^;)
둘째를 낳으니 갓 태어난 아기와 아직 혼자 옷도 겨우 입는 두살반 유아를 키우는게 쉽지 않았다.
아직 두살반도 엄마의 손길이 많이 가는 나이이기에 그러하였다.
그 때부터 하루하루 두 녀석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닦이고 매일 처절하게, 희미한 행복을 느끼며 정신없이 살아왔던거 같다.
말도 잘 못하는 두 아기 사이에도 관계가 형성되고, 더하여 엄마를 두고 삼각관계까지 발생하며 생각지 못했던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둘째가 커갈수록 두 아이간의 관계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언니는 무조건 동생을 이뻐하려는데, 막상 동생은 그러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태어나보니 엄마 사랑을 나눌 경쟁자가 있네?
매일이 티격태격이었고, 두 어린 딸들은 냐옹냐옹 고양이 같이 귀엽지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싸웠다.
주로 동생이 언니의 장난감을 질투 낸다.
싸우는 이유를 찾아 똑같이 생긴 장난감에 각각 주인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주고 나서야 냥냥 거리는 아가들의 싸움은 끝이 났다.
그 두 아이가 성장하여 초등 학생이 될 무렵,,, 나를 찾기 위해, 내 커리어를 찾기 위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만해도 내 자신감은 반이상 줄어있었다. 내가 돌아 갈 수 있을까..
그런데 갑자기 코비드가 창궐하고 가족들이 집에 갇히게 되었고,
첫 한두달은 즐거이 가족들끼리의 시간을 보내며 집에서 잘 지냈는데, 점점 사태는 심각해지고
집밖은 사람들이 실려가거나 죽어나가는 뉴스만 들리니 예민해지기만 했다.
당시 동네 스타벅스 매장의 매니저 사망 소식이 동네 신문에 실렸고, 지역 학부모 중 젊은 아빠가 세상을 달리했단다.
두려웠다.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간다면,, 혹은 아이들만 둔채 부부가 아파 쓰러져있다면 누가 아이들 끼니를 챙길 수 있나.
그래서 위생과 전염에 무척 까다롭게 대처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가정 교육을 시켜야하는 엄마 역할,
기본으로 삼시세끼와 두번의 간식을 준비해야하는 요리사,
해도 표안나지만 안하면 엄청 표가 나는 청소부 역할,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두 아이 교실을 따로 만들어, 두 곳을 왕복하며 컴퓨터 테크니션?이자 선생님 보조 역할까지,, 몸이 10개였으면 좋겠다.
남편도 간간이 나를 도와줬지만 당시 새직장, 데이브와 스캇의 회사로 옮긴 직후에 코비드가 터졌던 터라,
남편도 2층 방에서 본인 회사일로 바빴다. 남편의 일도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홀로 독박 육아를 자청했었다.
그동안 커오며 내가 길렀던 인내심과 정신력이 이 기간을 위해 훈련을 받은것이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내 생애 매일 18시간 이상 노동을 하며 일년 반 남짓 그런 숨가쁜 생활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나의 가족을 위해서 한 노동이었지만,
가족을 떠나 그때 그 상황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어떤 보상도 없이 아침에 눈 뜨자마자 주방일부터 시작해서 저녁에 눈감을때까지 빨래를 개는등 쉴 틈 없었던 경험. 조선시대 노예들이 이랬을까...
그나마 바이러스 전이라, 폭탄이 터지는 그런 전쟁터가 아닌게 어디냐라는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드라마를 틀고, 와인 한잔을 하면서 피로를 풀었다. 빨래도 개면서…
쿼런틴으로 집안에 갇혀 있어서, 드라마를 보면 잠시 어딘가로 여행 다녀온 느낌도 들었다.
SNS에 여러 엄마들의 쿼런틴 관련 육아를 코믹으로 푸는 영상을 보며 웃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세아들을 밧줄로 묶어 놓았다던지, 학교 갈 수 있다는 뉴스가 떳을때 아침부터 와인잔을 들고 샤워가운을 걸친채 마당에서 굿모닝이라고 외친다든지,,
대리만족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웃긴 영상이라도 링크하면서 나와 친구들은 의지하며 그 생활을 버텼던듯 하다.
물론 나 또한 일일일잔(와인) 없이는 힘들었다.
회사에서 인정받던 시절이 그리웠다.
프젠을 끝내고 업무를 마무리 하고 휴가를 갔던 시간도 그리웠다.
학교 프젠을 마치고 집에서 쓰러져 자던 시간도 그리웠다.
싱글들은 오히려 집에서 혼자 취미생활도 하고, 독서도 하고 그림도 그리드라.
매일 코믹 영상을 찍어 올리던 유명인 커플들도 있었다. 그들은 행운으로 보였다.
항상 할 일만 가득해서 아침에 눈을 뜨기 싫었을 정도로 지쳤던 시절.
아이들을 키워야하니 겨우 일어나 아침 준비를 시작으로 햄스터처럼 같은 일을 반복했던 일상.
정신력으로 버텼던거 같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과 기여를 할 수 있지만,
코비드 공포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더불어 혼자만의 조용한 커피브레익을 가지기도 힘들 만큼 쉴틈이 없었던 하루 일과로 인해,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코비드 터진후 2년뒤,
긴 터널을 지나오고 나서 나의 정신과 체력이 그냥 무너졌다.
하지만 여전히 변이도 생기고, 코비드는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대면수업으로 세시간 정도의 학교생활은 했었지만 여행도 여전히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던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마음은 계속 가족의 안전을 위해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차였다.
그렇게 재충전을 할 시간없이 지내오다 보니, 마치 노예가 된 듯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 삶에서 내 존재가 희미하게 사라져감을 느끼게 된 순간이 왔었다...
그 후 또 한번의 헛헛함이 닥쳤다.
시간은 조금 더 흘러 아이들은 학교를 더 길게 가게 되었고, 아이들은 그 새 커서 조금 더 독립적인 모습을 보였다.
코비드덕에 집에서 몇년 24시간 부비며 살다보니 아이들이 학교를 간 시간에 헛헛함을 느끼며,
오히려 엄마가 아이들과의 불리불안이 생긴거 같고 약간의 우울감이 생기게 된 요상한 상황이 되었다.
뭐시 중헌디,,하며 그런 감정을 무시하며, 웃으려 노력하고,
또 다른 단계로 성장한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느라 허둥되면서, 엄마도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장한 줄 알았던 내 모습의 결과는,
얼굴은 늙어가고, 손은 거칠고 못나 졌으며, 머리도 멀티태스크를 하느라 가끔 버퍼링이 걸리고,,
엄마란 현실적인 일만 하다보니 어느새 크리에이티브했던 부분은 뭉그러지고 있었다.
임신, 육아에 근 10년을 보내다보니,
(그렇다고 10년 동안 내가 육아가사의 프로가 된것도 아니다. 특히 가사는 나랑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ㅠㅠ)
내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것이 안타까워 계속해서 더 이전의 나를 떠올릴려 노력하였다.
아이들을 보며 난 그 나이에 무엇을 했던가...
내 모습을 찾는데, 마치 전생을 떠올리듯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코비드란 긴터널을 되돌아 들어가 어렴풋이 내가 살아왔던 모습이 떠오르고,
열심히 스스로의 멋진 미래 모습을 기대하며 통통 뛰어다녔던거 같은데,
지금 거울속엔 어린시절 스스로 상상하던 내 모습이 아닌 꽤죄죄하고 피곤하며 여기저기 스스로 관리가 안 된 모습의 한 중년 여인이 있엇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번아웃이 온 것도 삶의 한부분이라며 인정도 하지만,,
나 스스로 마저도 나를 잊어가는 만큼 존재가 희미해져 있었다.
남편조차도 과거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다.
그저 아내와 아이들 엄마라는 부캐가 마치 나의 본캐처럼 인지되어 있었다.
나를 흡입한 듯한 ‘주부’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와 엄마가 나중에 생긴 역할이므로 부캐라 본다. 아닌가?
혹은 그 전에 싱글이었던 내가 진정 본캐인가?
지금 나의 본캐는 무엇일까...
나의 본캐, 나의 정체성을 다시 정리해보아야할 거 같다.
* 당시 도움이 되었던 책 추천 해 보아요.
'싸우지 않고 배려하는 형제자매 사이" 아델 페이버, 일레인 마즐리시 지음/ 김혜선 옮김 푸른육아 출판사
** 혹시 이 글을 읽는 예비 엄마님들은 겁먹지 마세요. 저는 타국에 살아서 도와줄 부모, 가족, 친지가 근처에 전혀 없었고, 가사일을 도와줄 분들도 있었지만 그 과정도 고생을 좀 했던 케이스인데다가, 조카의 육아를 도와준 적도 없기에 아이와 관련 모든 생활이 생소했던 극한 상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