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와 프로

나를 잃을지 몰랐다 3

by Beverlymom


프로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달렸다.


지하철역 계단을 빠른속도로 올라오면 얼음같이 차가운 공기가 코끝에 느껴졌다.

베이글집 앞 줄이 조금 길지만, 시간내 갈 수 있을 가능성이 보여서 줄을 섰다.


른 아침부터 크나 큰 아트백을 어깨에 맨 채 , 흔들리지 않게 한손으로 그 손잡이를 부여잡고,

다른 어깨엔 큰 토트백, 그 손엔 커피잔.

커피와 함께 막 구입한 크림치즈 가득 채운 건포도 베이글이 든 브라운 종이백을 토트백에 쑤셔넣고, 커피를 든 채 학교로 향했다.


거의 뛰다시피 걷다가

가끔 뚜껑 구멍으로 커피가 넘쳐, 가방이나 옷에 흩뿌려질때면 짜증이 나기도 했다.


빌딩 코너를 돌아서면 매섭게 불던 뉴욕의 칼바람에 볼살은 찢어질 듯 했고,

푹 눌러쓴 벙거지 모자 아래 나의 긴 머리카락은 드라이어 쐰 마냥 공중으로 휙 날렸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엉켜도 넘길 손이 없었다.

(이때 반짝이는 립밤을 바르고 있다면 최악이다. 머리카락이 풀에 붙듯 딱 고정된다 )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휘휘 고개를 젖혀 대충 넘기고 빠른 걸음으로 다시 걸어가다 보면 패딩 쟈켓 안으로는 땀이 베였다.


통굽 가죽 워커부츠를 신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얼마전 눈이 내려 인도가에 쌓여있던 먼지 가득 쌓인 얼룩진 눈. 축축히 녹아가는 눈이 길 곳곳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놓았다.


낮은 기온, 찬 바람에 총총 걸음으로 얼굴이 벌건 채 학교 건물내로 들어서면,

훅,, 나를 감싸는 따뜻한 히터 공기에 얼굴이 더 빨개졌다. 안은 덥다.

이미 조금의 땀을 흘리던 코트 안이 더 후끈해졌다.

아직 수업을 하는 작업실을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더 걸어야하니 무거움과 더위를 좀 더 벼텨야했다.


작업실에 들어서면 넓찍한 공간에 마치 오케스트라 대열처럼 서있는 이젤들과 데생을 하는 나무 벤치 ( Art Horse)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


안심과 동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단 지각하지 않았음에 기분이 좋았고,

더불어 목탄 Charcoal 냄새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데생실에서만 나는 큼큼한 목탄 냄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목탄과 파스텔등으로 정신없이 데생을 몇시간 하고 나면 손톱 밑은 새까매졌다.

비누로 씻어도 남아있어서, 바빠도 항상 옅은 컬러의 매니큐어를 손톱에 바르고 다녔다.


코를 만지는 습관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콧등에 시커먼 목탄을 묻힌 채 다음 클래스로 달려가기 바빴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항상 그렇게 분주했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즐겼다.


몇 날 밤을 새며 수채화 혹은 아크릴 작업을 하고,

또 몇 날 밤을 새며 2D와 3D 컴퓨터 아트 작업을 하였다.


한번은 밤새 꼬박 작업한 컴퓨터 파일을 제대로 저장하지 않아 중간고사 마감 직전에 다 날려버려 울고불고 뒷목잡고 거의 쓰러지기도 했다.

( 당시는 자동저장 기능이 없었고, 물론 그 아찔했던 경험 후론 저장을 수시로 했고, 백업도 여러군데 중복으로 했었다)


그렇게 폐인이 된 채, 해내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1분 1초 직전까지 가까스로, 겨우 새로 제작하여 중간고사 프레젠테이션까지 다 마친 후 12시간 내리 잠을 잔 적도 있었다.


쉬운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렇게 바빴던 유학시절,

나의 첫 알바, 즉 첫 사회생활을 한 곳은 맨하탄 내 한국인이 경영하는 작은 한의학 대학교였다.

당시 유학생 신분이었던지라, 현금을 받을 수 있는 한국인 비지니스 업소에서 알바를 할 수 있었다.


그 때 호랑이 같은 사수에게 손등을 맞으며 서류 파일링부터 배웠다.

그 분은 한국 정치계에 계시다가 미국으로 건너 오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셨지만, 사실 무섭다기 보단 재미있었다.

사회 초년생에게는 대충 가르쳐주는 사수보다 배울 땐 조금 엄하더라도 제대로 배우는게 맞는거 같았다.


무엇보다 20대 초반 어린 내가 서럽지 않고 즐겁게 배운 이유에는,

처음 사회 생활을 시작하던 나를 위해 꼼꼼히 잘 가르쳐 주시려던 사수의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꼰대라 생각한 적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더 물어보고 확인하다가 잔소리 더 들어가며 배웠다.

물론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그 잔소리가 나도 반가웠을리는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배웠던 덕분에, 나중에 아티스트들이 많은 디자인실의 자료 관리organize 업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티스트 감성이 무척 강했던 내 게이 파트너. 그 패션 디자이너는 실력이 좋았지만, 서류나 컴퓨터 업무에 많이 취약했다.


반면 이과 출신 미대생이었던 나는

일러스트레이션과 컴퓨터 아트를 공부했던 만큼,

PC와 Apple 두 컴퓨터 사용에 능수능란했고,

더불어 알바 시절 그 호랑이 사수에게 일을 배웠던 지라

재깍재깍 발빠르게 디렉터의 업무 스케줄에 맞춰 파일들을 다른 부서나 외국 공장에 보내주었다.


그렇게 디자인실에서 아트 영역만이 아닌 각 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과 오피스 업무까지 정확히 하던 나를 내 미국인 상사(Creative Director)가 이뻐해 주었다.


어디가서 이쁨 받으라고 무섭게 가르쳐 줬던 생애 첫 사수의 가르침.

그 사수의 잔소리와 호통은 내게 덕이 되어 돌아왔었다.


당시 프로의 의미가 정확히 뭔지 몰랐지만 내 일에 있어서는 프로가 되고 싶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기도 하고..

할려면 열심히 하고 안하려면 하지말고,,

좋으면 좋고 싫으면 말고,,

그런 뉴욕이 나는 잘 맞았다.



프로의 스피드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 뉴욕은 굉장히 빠르게 움직인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오래된 좁은 지하철역 출입구는 수트와 정장용 구두를 신은 남녀들이 급물살처럼 이동한다.


장대처럼 키가 큰 사람들의 빠른 걸음 사이에서 느긋히 걸으면 그들의 진행에 방해가 되거나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걸음도 빨리졌고,

나아가 작은 몸으로 타인과 부딪히지 않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뉴욕커의 빠른 스피드에 맞춰 생각도 걸음도 빨라졌다.


공부하던 분야 또한 작품 마감 Due date에 맞춰

몇날 며칠 밤을 새서라도 작품을 완성하여야만 했다.

(미대생들 다 겪어요),


가끔은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든 해내야 고,,,

10여분만에 10블럭 거리를 힐을 신은 채 단숨에 빠른 걸음으로 가야만 하기도 했다.


그런 스피드가 아니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마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24시간동안 많은 일들로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빠른 스피드만큼, 마음도 조금씩 단단해져갔다.


누군가가 내 자식같은 작업비판하며 크리틱해도,

부끄러움, 서운함, 불쾌한 감정들을 견뎌내야 고,

(이 또한 미대생들이 다 겪어야 하는거다)


졸업시기에는 취업비자 스폰서 회사가 필요했던지라 나는 이력서 resume 백통을 돌릴 각오로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고, 몇 회사와 인터뷰를 했다.


한국으로 귀국하기보다 뉴욕에서의 커리어 경험을 위해 회사를 았던 것이다.


원래 꿈이었던 영화쪽 디자인일은 미국 거주 신분이 되지 못해 잠시 보류를 하고,

일단 패션 회사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취업을 준비하였다.

내 전공은 아니었지만 패션 일도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취업비자를 받기 용의한 산업분야였다.


그렇게 회사에 취업을 하고 미국 생활을 더 연장하게 되었다.

사실 영어도 잘 못하는데 한국인없는 회사 디자인실에서 잘 버텻다.

물론 비쥬얼 작업이 더 중요한 디자인팀이라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뉴요커들과 함께 경험한 빠르고 정확해야 했던 생활 환경은 나를 그만큼 발전 시켜주었다.

워커홀릭 기질이 있던 나는 그 분야의 프로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였다.




아트데코 시절 금빛 그대로의 로비를 가진 뉴욕 패션지의 높은 빌딩.

사원증을 보여주고 빌딩 로비를 지나,

번쩍거리는 금빛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그와 상반된 세련되고 모던한 인테리어로 단장된 회사 로비가 있었다.


프론트데스크를 지나 디자인실을 들어가려면 지문 인식기에 검지 손가락을 확인해야 문이 열렸다.

2003년 당시 어린 나에게는 보안을 위해 지문을 찍고 디자인실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So cool! 멋있어 보였다.

(요즘은 동공 인식기가 있을려나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회사에서는 배웠다.

그게 재미있었고, 동료들과 함께 퇴근 후 다시 혼자 오피스로 돌아가 내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작업 할 수 있도록 이전 파일들을 꺼내 연구하기도 하였다.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팀과 프로덕션팀 선배들은 대부분 오랜 경력을 가진 프로였고,

회사 업무에 있어 어떤 문제가 생겨도 서로 잘못을 떠밀며 정치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함께 그 일에 집중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그런 힘들었던 날은 근처 바Bar에서 칵테일 한잔에 수다를 떨며 업무 스트레스를 함께 툭툭 털고 헤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디렉터 직급들은 육아때문에 저녁시간에는 거의 함께 하지를 못했던거 같다.

주부 였던 당시 내 상사는 일년에 반은 외국에 출장이었으니, 틴에이져 자녀를 둔 그녀는 뉴욕에 있을 때만은 일찍 귀가하는 편이었다.


일을 못하는 사람이 끼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 니탓, 걔탓, 남탓을 하며 팀웍을 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내가 운이 좋았는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일을 했던 곳은 그런 일이 없이 오롯이 우리가 함께 목표로 하는 '업무'에 집중을 하고 본인들 실력과 삶의 질을 위해 노력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회사 업무 후에는 취미 생활을 하거나 수업을 듣고, 휴가는 항상 1월에 미리 계획을 하여 여러 국가를 여행 다녔다.


그것이 프로라고 생각했다.


원래 열정이 가득했던 패션 분야는 아니었지만, ( 패션은 열정없이 하기 힘든 분야다)

일을 하다보니 흥미로워 뉴욕에서 패션업에 마음을 잡고 커리어 둥지를 틀려던 찰나, 갑자기 엘에이로 오게 되었다.


엘에이에서도 당시 국제적으로 한창 인기많던 T브랜드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또한 G 브랜드 회사에서 프리랜서 일도 하였다.


나의 경험상 로스엔젤레스 패션계는 뉴욕과는 많이 달랐다.


그 무렵 어릴 적 미국에 올 때의 꿈이 꿈틀거렸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 꿈에 시도를 하고싶었다.


30대 초에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A 미대로 돌아갔다.

그 학교는 하루 두시간을 자도 모자를 만큼 빡 센 학교였다.


무지막지 하게 많은 작업양과 과제, 프젠을 준비하느라 두세시간 잠을 자고,

눈을 부비면서 운전해서 다녔다.


사족이지만 학기중에 학생들이 졸음운전으로 차사고가 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 복도 쇼파에서, 혹은 본인의 차에서 잠을 자고 학교에서 샤워 하기도 했다.


사실 회사 생활을 하다가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전문 관련 분야 일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스케쥴 속에서 일을 하다가,

학교에서는 다양한 과목들과 관련된 작품이나 프젠을 모두 짧은 시간안에 마쳐야했고,

글도 이멜 수준이 아닌 에세이 레벨의 쓰기를 해야했다


교수들도 모두 렉서스, 디즈니등과 같은 굵직한 회사에서 일했던 혹은 일하던 프로들이라,

그 학교로 돌아가니 나에게 보스가 여러명 생긴 느낌이었다.

잠을 못자면서 하루 2-3시간 왕복 운전을 하니 체력이 많이 딸렸다.


물론 힘든 만큼 하고싶은 작업에 대한 열정도 가득했다.

우리에겐 샤워따위 보다 중요한 마감일 Due Date이 있었고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작업을 마무리 짓고,

제대로 복장 갖춰 멀끔한 모습으로 프젠까지 마치고나면 보람과 함께 아쉬움이 가득했다.


학교로 돌아갔던 이유는 관련 포트폴리오와 네트웍이 필요했는데,

포트폴리오가 채 만들어지기 전에 임신이 되었다.


당시 방독면을 쓰고 스프레이룸에 들어가

내가 제작하던 헬맷에 자동차용 스프레이 페인트를 작업하던 시기였다.


또한 3D 모델링 룸에서 기계를 사용하며 온갖 나무가루나 스티로폼 가루가 날리고, 화학제품들로 작업을 하던 때라 아무리 방독면을 쓰고 작업을 한다해도, 뱃속에 아이가 걱정되었다.


꿈과 관련된 새 커리어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이 살짝 아쉬웠지만,

나이가 있었으므로 임신을 받아들엿다.


미술쪽은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다며,

경력에 대한 불안함도 별로 없었다.

(물론 수입 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학교는 입학 경쟁률이 높고, 실력이 좋아야했는데 휴학하기 아까웠다.

그 곳에서 익히는 그림 실력과 네트웍이 내게 도움이 되지만, 어쩔 수 없이 일년만 휴학하고자 했다.

출산 후 한두학기만 쉬고, 다시 돌아가서 포트폴리오 작업을 마무리하고, 다시 일을 할 생각을 하였다


다시 돌아가서 작업하면, 나중에는 나도 멋진 그림을 그리고, 프로로서 작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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