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7일. 비보를 듣고 나서..
2005년 이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생이었고, 나름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싶다 라는 마음으로 중학교 시절엔 밴드부까지 결성하였지만 정작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이었다. (지금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우선 국내 밴드 중 한팀을 정해 관심을 가져보자고 마음을 먹었고,
그때 정한 밴드가 넥스트였다.
지식in에 넥스트 노래 추천을 검색해 보니, 처음 뜬 것이 <껍질의 파괴 The destruction of the shell>이었다.
이 곡을 듣고 난 충격에 빠졌다. 표현 할 수 없는 전율에 휩쌓였고,
곧이어 <세계의 문,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을 들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이후로 난 신해철의 팬이 되었다...
차례차례 곡을 하나 알게 되었고, 특히 넥스트 음악의 무궁무진한 스펙트럼에 매료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10여 년 동안 신해철의 음악을 하루도 듣지 않은 날은 군대시절 빼곤 없는 듯 하다.
군대에서 초소근무를 하면서 시간이 가지 않아 미쳐버릴것 같을 때에도 넥스트의 가사를 머릿속에 외우며 시간을 떼우곤 하였다.
책, 음악, 시 등 여러 매체에서 감동받은 구절을 옮겨적는 노트에 신해철 노래의 가사들을 필사하였다.
<아버지와 나>를 들으며 아버지의 고독을 이해하였고, 어머니 생신 땐 <MAMA>의 가사를 편지에 써서 드렸다.
<Lazenca, Save us>를 들으며 어린 시절 만화영화 보던 때를 기억하였고, <The Hero>를 들으며 어린 시절 동심의 순수함을 떠올렸다.
특히 그의 곡 중엔 죽음에 관한 곡이 참 많았다.
<The Ocean, 불멸에 관하여> 에서
" 처음 아무런 선택도 없이 그저 왔을 뿐이니, 이제 그 언제가 끝인지도 나의 것은 아니리 "
" 그대 불멸을 꿈꾸는 자여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으라 말하는가, 왜 왜 너의 공허는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처음부터 그것은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있었다 "
이 구절들은 그대로 나의 '죽음관'을 형성하게 해 주었다. 그 이후로 내 꿈은 '잘 죽는 것'이 되었다.
또한 <Questions>의
"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고 또 느껴야 하는가? 내게 다가올 끝날이 오면 나는 무엇을 찾았다 말해야 하는가? "
를 통해 '무엇을 찾기 위한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며 지냈다.
<우리앞의 생이 끝나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 우린 그무엇을 찾아 이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
이렇듯 항상 내 꿈은 '잘 죽는 것'에 맞춰져 있었고, 그러기 위해 잘 살고 싶다고 의지를 다졌다.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는 위로한답시고 <HOPE>가사를 적어 보내주었고,
새해를 맞이하여 과도기를 겪으며 함께 성장하는 친구들에게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적어 보내곤 하였다.
고3 시절, 진학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될 때 <It's Alright>을 듣고 펑펑 울었다가, <민물장어의 꿈>을 듣고 힘을 내어 공부했다.
같이 기타연습하던 형의 MP3에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가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 시절 기타연습을 할 땐 <날아라 병아리>가 필수 연습곡이었다.
<아가에게>를 들으며 나중에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게 된다면 꼭 아이에게 이 말을 해주겠다고 김칫국을 마시기도 하였다.
5.18이나 4.19와 같은 기념일엔 항상 <70년대에 바침>을 들었으며, <Goodbye Mr. Trouble>을 듣고 봉하마을에 추모하러 갔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에 관하여>를 들으면 거짓말처럼 기운이 났으며, <그저 걷고 있는거지>를 들으며 <길 위에서>와 함께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더웠던 여름날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매미의 꿈>을 틀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낄낄거리기도 하였고,
농구를 좋아하여 농구장에 갈 때마다 우리팀이 이길 땐 <그대에게>가 흘러나와 신나게 따라불렀다.
<Friends>를 들으며 한 20년 후, 현재 같이 지내는 친구들과 함께 모여 추억을 공유하는 상상을 하였고,
짝사랑 하던 여자아이와 잘 안되었을 때 <The last love song>을 들으면 분을 삭혔고, 동시에 <Here I stand for you>를 들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좋아하는 아이가 있을 때 <일상으로의 초대>를 들으면 너무나 설레서 몸둘 바를 몰랐고, 여자친구가 있을 땐 <조금 더 가까이>를 작게 불러 주며 행복해했었다. <먼 훗날 언젠가>는 꼭 결혼식 때 불러주고 싶다.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외로움의 거리>를 들려주니 너무 공감간다고 하여 뿌듯함을 느꼈고,
요즘은 유난히 <나에게 쓰는 편지>와 <The Dreamer>를 들으며 내 길을 향해 힘내서 가려고 한다..
노래방에선 넥스트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모르기 때문에 불렀다간 눈치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가끔씩 혼자 오래방이라고 불리는 동전오락실에 가서 넥스트 신해철 노래를 실컷 불러재끼곤 하였다. 함께 그의 음악을 공감할 친구가 많이 없어 너무 외로웠다.
고3 시절엔 공부해야 되는데 새벽까지 고스를 들으며 낄낄거렸고, <좀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 사연 몇개는 녹음하여 지금도 가끔씩 듣고 있다. 고스같은 경우는 제대로 듣질 않아, 옛날 것을 다운받아서 가끔씩 듣기도 하는데 아직 들어야 할 것이 끝도 없이 있어 평생 풍족할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이렇듯 신해철은 나에게 단순한 가수, 연예인이 아닌 멘토이자 위인, 젊은 시절의 영웅, 정신적 지주, 삶의 교리이자 나의 사상이었다.
10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신해철 정신을 생각할 땐 어떻게 이렇게 한 인물을 이렇게 추종할 수 있는지 나 자신이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만약 10년 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신해철을 모르고 살아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내 삶은 지금보다 훨씬 건조했을 것이다. 내 감성의 팔할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난 신해철이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과소평가받는 뮤지션이라 생각하여 그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내 또래에 친구들에겐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곤 겉으로 최대한 표현하지 않았다. 그들을 이해 못하는게 아니라 이건 내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신해철은 우리 80년대 후반 출생 시대의 또래들의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대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내가 뒷북인 것이다.
하지만 내 동생이 있었다. 1살 차이 나는 내 동생은 내가 넥스트 곡을 소개해주자 관심을 가지고 듣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나처럼 푹 빠지게 되어 내가 몰랐던 노래까지 먼저 찾아듣는 수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와 내 동생은 가끔씩 저녁마다 기타를 치거나 함께 신해철 노래를 부르며 쌩 쑈를 하였다. 내 동생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난 넥스트 공연을 단 한번도 가질 못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서는 그가 제대로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 이미 전성기는 저 멀리 지나간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 내가 죽기전, 그의 공연을 보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그리고 2014년, 정말 몇 년 만에, 내가 신해철을 알게 된 이후로 가장 활발하게 그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각종 예능과 라디오에 쉴틈없이 나오며 넥스트 새 앨범을 준비중이었다.
이 페이스라면 올해 연말 무조건 콘서트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올해 말, 드디어 처음으로 넥스트 공연을 보러 갈 것이라 속으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
하지만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다른 좋아하는 가수들 공연은 그렇게 자주 보았으면서....
...
난 지금 이 현실이 너무나 믿기지 않는다.
세상이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건 내가 전혀 0.01%도 예상치 못한 현상이다.
앞으로 그와의 인연을 만들어 나갈 일이 지금까지의 인연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었다.
'명복을 빈다'는 문장을 쓰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다.
차마.....
서울에 올라가서 빈소를 다녀와야겠다.
이제서야 나는 그를 처음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