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창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탄쟁이 Sep 25. 2016

안중근 불멸의 기억 (이수광 / 추수밭)

안중근 삶을 통해 생각하는 진정한 역사 교육

요즘 한국사 공부를 하다가 3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꺼냈다. 당시 읽으면서 느꼈던 그 기분을 현재 공부하면서 다시 느끼고 싶었다. 


사람들은 보통 '안중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만을 생각한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서 '안중근'을 검색하면 '의거, 이토 히로부미, 하얼빈' 등 그 암살과 관련된 키워드가 대부분이다. '안중근 업적'으로 검색하면 그 사건 외에 다른 업적은 잘 검색되지 않는다. 심지어 지식IN의 답변 중에는  '총 3발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업적이구요, 나머진 거의 뭐 ..하신일은 없다고 봅니다.' 라는 황당한답변도 올라와 있다. 그러다 보니 어린 학생들은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굳어져 그 사건의 중요성과 의의를 잘 못 느끼거나 오히려 그의 삶이 과소평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동양사 최고 최대의 사건 중 하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뿐만 아니라 짧지만 영원히 기려질 위대한 생의 한 인간을 보았다.


안중근은 단지 의사(義士)만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으로 불렀다. 그는 의병 부대의 대장을 역임한 당당한 군인이었다. 그가 의병활동을 하면서 겪은 온갖 고생과 시련, 불타는 의지, 용맹성과 희생정신을 생생하게 느꼈다. 난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안중근이 대장으로 의군을 이끌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0대였다. 20대 청년 한 명이 수 백명의 병사를 전두지휘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상상하면 그가 얼마나 비범한 위인인지 확 와닿는다.  


의병활동을 위해 백두산의 밀림을 샅샅이 헤맨다. 문득 그 당시 깊은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의병들의 상황이 상상된다. 어디하나 편한 곳이 없고 식량공급도 힘들고 짐승은 얼마나 많을까. 살을 잘라버릴 듯한 추위와 싸워야 하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를 견뎌야 한다. 전화도 연락도 당연히 없기 때문에 다른 부대나 누구와 잠시라도 대화하기 위해선 불확실한 정보를 의지하여 수 백키로미터를 이동해야 한다. 안중근 장군도 홍범도 장군을 찾으러 먼 거리를 이동했지만 실패한다. 간도의 독립운동가 이범윤을 만나고,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과 연합하여 무장군대를 조직한다. 그리하여 안중근 장군은 크고 작은 게릴라 전에서 승리도 많이 했지만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하고 모든 대원을 잃어 항일무장투쟁에 실패하고 만다. 그 실패의 죄책감과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자르는 결의를 다지게 하고 결과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성공으로 이끈 셈이다. 이 모든 일이 20대 청년이 행한 일이다.


생각해 보니 그의 의병활동을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 교과서에 적혀 있지가 않다.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서만 짧게 설명될 뿐이다. 1910년대, 1920년대 국내외 의병 항일무장투쟁의 역사가 큰 비중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안중근은 1900년대에 의병활동을 한 군인이다. 그 시기의 무장투쟁활동은 왜 소홀히 기재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안중근 장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교과서에서 그저 외워야 할 존재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190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수많은 무장단체가 등장하지만 단체 이름과 조직원이 비슷비슷하여 더욱 햇갈리고 귀찮아 할 수도 있다. 교과서의 잘못일까, 교육의 잘못일까?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이러한 거룩하고 숭고한 독립운동가들이 책에 몇글자로만 실리고 학생들에게 암기대상으로만 여겨지게 된다면 그런 교과서는 필요없다. 누가 언제 어떤 활동을 했다는 것을 별 생각 없이  외우고 자세하게 많이 아는 것보다 그 당시를 겪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그리고 불멸의 영웅들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였는지 그 의미를 느끼고 공감하는 것이 국사 교육의 우선일 것이다. 그렇게 느낀 감정을 마음에 품고 이 시대에서 우리가 현재를 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평생동안 고민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10리를 걸어서 두만강 연안에 있는 동포의 집을 찾아갔다. 동포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 동포의 집에서 며칠 동안 쉬며 비로소 옷을 벗자 거의 다 썩어서 몸을 가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이까지 득실거렸다. 나는 6월 23일 이후 12일동안 회령군을 벗어나지 못하고 폭우 속에서 길을 잃고 지냈다. 하룻밤도 자지 못하고 산속에서 뒹굴며 겪은 고초는 붓 한 자루로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 p. 161


안중근은 무장 투쟁에 실패한 뒤 여러 달을 방황하면서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다 얀치헤로 돌아왔다. 얀치헤에는 그와 함께 의병 투쟁을 한 동지들이 있었다. 안중근은 무장 투쟁이 속절없이 끝난 것에 울분을 토하다가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동지들,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의병투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소.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있으니 좀더 강력한 투쟁이 필요하오. 소수정예의 힘으로 손가락을 끊어 '대한독립'네 글자를 혈서로 쓰고, 3년 안에 나라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죽이지 못하면 자결합시다.”

- p. 128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 돌베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