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이 Jan 11. 2023

직원이 딸랑 한 명인데 도대체가 일을 안 해요.

너무 게으른 직원, 나. 어떻게 해야 얘를 일하게 만들 수 있을까?

대단해! 그래도 제목이랑 부제목까지 썼다

  

  라고 우스운 생각을 했다. 새벽 4시, 오늘만큼은 밤을 꼬박 새서라도 비틀려버린 내 정신을 바로잡고 미뤘던 일들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한 때로부터 6시간이 지난 지금. 자못 결연한 태도로 맥도날드 아이스 라떼 미디움 사이즈를 들이켰던지라 눈 앞은 또렷했다. 또렷한데, 이 맑은 시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안타깝게도 유튜브의 숏츠 영상, 그걸 끄고 나면 인스타그램의 릴스 영상, 그걸 끄고 나면 요즘 빠져 사는 노노그램 게임 화면, 그걸 끄고 나면 커뮤니티의 인기글, 그걸 끄고 나면... 끄면... 뭐였더라? 자극적인 내용들에 절여진 뇌는 뭘 봤던지 기억도 잘 해내지 못한다. 

숫자 힌트를 보고 네모 칸을 색칠하는 게임, 노노그램을 아시나요.

  오늘 꼭 발행하겠다고 다짐한 이 글의 제목과 부제목을 겨우 쓰고 나니 뭔가를 해냈단 생각에 어이없게도 뿌듯해진다. 그리고 뿌듯해서(?) 내게 주는 작은 보상으로 다시 휴대폰을 든다. 내 뇌와 호르몬의 시스템 뭐 그런 것이 단단히 고장난 모양이다. 

  억울한 건 휴대폰을 붙잡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동안 전혀 즐겁지도 않았다는 거다. 찜찜하고, 메스껍고, 두렵고, 답답했다. 이래선 안될 것 같아 애써 작업을 하기 위한 페이지를 켜봐도 머릿속이 멍하기만 하다. 1분 이상 집중해서 뭔가를 해내는 것이 영영 불가능할 것만 같은 기분. 결국 다시 수만 개의 짧고 재미난 영상들이 날 기다리는 세계로 뛰어들고 싶어 휴대폰을 슬쩍 바라본다.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 손을 묶어버려야 휴대폰을 그만할텐데.


  아니 그런데, 손을 묶으면 일도 못하잖아.




나, 왜 일을 안 하니?


  위 묘사한 상황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면 지난 5개월의 나를 설명하게 된다. 지난 8월의 퇴사 이후 지독히도 게을렀다. 빈틈없이 모든 순간이 게을렀다. '퇴사하고 몇 개월 쉴 수도 있는 거 아냐?'라고 다독여주려 했다면 실패다. 지금의 나는 차라리 진짜 푹 쉴 걸, 이럴 거였으면 그냥 정☆말☆로☆쉴☆걸 하는 후회를 하거든.


  그럼 안 쉬고 뭐했냐고? 

  첫째로는 운 좋게도 퇴사하자마자 바로 여러 프리랜스 업무를 제안 받았다. 그걸 넙죽 받았다. 지금까지 회사 일을 열심히 했던 것처럼 프리랜스 업무도 열심히 할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다음으론 재택 근무가 가능한 프리랜서가 됐으니 멋 좀 부려보고 싶어서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 치앙마이로 3주간 여행도 다녀왔다. 일하는 사이사이 열심히 놀 수도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개인 사업 아이템, 크리에이터 콘텐츠 아이디어도 순풍순풍 떠올려댔다. 노션에 공들여 기획안을 써두고 주위에 내가 이런 생각들을 했노라고 자랑도 했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내가 열심히 행동으로 옮겨줄 거라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만 써놓으면 부지런히 움직이며 살아온 것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의 가냘픈 의지력이 쳐낼 수 있는 데까지. 딱 거기까지만 움직이고 그 뒤는 잊어버리거나 다급히 수습하기만 했다. 


  호기롭게 프리랜스 프로젝트를 받았지만 평소 일에 들이는 에너지의 10%쯤만 쏟았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가 겨우 움직였고, 마지막에 가선 더 공들이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내용들도 그냥 흘려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무사히 마무리짓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기대했던 목표 달성 이상의 성과나 인센티브는 당연히 내 것이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 밖으로 나갈 생각이 안 드는 호텔방 안에서 구글 렌즈로 열심히 번역해 밥이고 커피고 시켜 먹었던 모습

  치앙마이 여행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귀찮으니까 돈으로 사겠어'였다. 시간을 들이고 몸을 움직여 알아보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치워버리고 간편한 결제 한 번으로 사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들만 했다. 귀찮았다. 항공권과 숙박을 예약하고 옷을 몇 벌 산 다음에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갔고, 가서는 호텔 침대에 누워 드라마만 보면서 시간을 죽였다. 그냥 서울의 호텔을 갔어도 다를 바 없었을 거다. 배가 고프면 배달 앱으로 음식을 시켜 먹었고, 찌뿌둥 하면 호텔 앞을 잠깐 걸었다. 그러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마감이 다가오면 잠깐 일하고, 노트북을 닫고 나선 다시 침대에 잡아먹혔다. 해외까지 와서 방 안에만 쳐박혀있다는 생각에 부담이 돼서 누워있는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누워있었다. 그렇게 제대로 쉬지도 즐기지도 않은 여행에 수백만 원을 쓰고 돌아왔다. 


나의 콘텐츠·사업 아이디어들, 노트북 안에만 갇혀 있다.

   여러 콘텐츠 아이디어나 사업 아이템들은 순간의 추진력을 발휘해 기획안을 써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대로 내 노션 한 구석에 몇 줄의 데이터로만 남겨두고 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업 아이템을 생각하고 있던 지인은 일단 실행에 옮겼고 금방 소소한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내가 생각한 것과 유사하거나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 콘텐츠들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오며 소비자들의 반응을 얻고 있더라. 빛나던 나의 아이디어들은 실행력 없는 주인을 만난 죄로 노션 문서 안에 갇혀 낡아가고만 있었다.


  '차라리 푹 쉴 걸 그랬어'와 '이것저것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지'가 공허한 싸움을 이어온 지난 5개월. 휴식으로부터 얻은 안온함도, 땀흘려 얻은 성취도 내게는 없다. 이제는 돈도 없어져 간다. 그래 지금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대체 어떻게 하면 움직일 거야?




유일한 직원아, 일을 하자!


  이 매거진은 나의 유일한 직원인 내가 움직여 일하고 어떤 열매든 맺어가는 과정을 담는다. 원래의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과가 났을 때 그것들을 쭉 늘어놓고 잘 손질해 보기 좋게 전시하는 것이었는데, 하도 일을 안 해서 그럴 수가 없게 됐다. 

  From scratch, 이 표현처럼 경기장의 선을 긋는 모습부터 기록할 예정이다. 내가 어떻게 게으름을 극복하고, 내 일을 찾고, 즐겁게 일하게 되는지를 남겨보려 한다. 이 경기장이 완성되고 선수들이 들어서고 볼만한 게임이 펼쳐지는 순간까지, 맥주 한 컵 들고 재밌게 관람해주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