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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이 Apr 19. 2023

게으름에게 (1) 노션 대시보드로 널 조져줄게

 하지만 언제나 조져지는 건...

그러니까 부지런해지려면 먼저 내 부지런함을 관리해 줄 대시보드가 필요하다니까요


  퇴사하고 가장 먼저 노션에 대시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 개인의 삶과 일을 차곡차곡 쌓아 관리할 대시보드를 갖고 싶었다. 당시(벌써 '당시'라는 말로 짚어 보는 게 어울릴 정도로 퇴사한 지 오래되었다는 게 새삼 놀랍지만) 나는 이제 나만의 콘텐츠와 서비스를 만들어 갈 거라는 꿈에 부풀어있었고, 노션 대시보드에 나의 모든 일과 삶 정리하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산뜻한 일상이 자동으로 시작될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 사람인지를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대시보드 제작에 열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정교하게 작동하는 대시보드가 내가 침대에 푹 퍼지려고 할 때마다 붙잡아 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닐 때에도 노션을 잘 활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던 나는, 퇴사 후 넉넉해진 시간을 노션 대시보드를 만드는 데에 미친 듯이 쏟아부었다. 바로 여기가 뭔가 어긋나기 시작한 지점이다. 



꿈꿨던 건 총체적이고 예외 없이 완벽한 대시보드


  그런 게 있을까? 총체적으로 내 삶의 모든 부분을 관리해 주고 예외 없이 모든 경우의 수에 적용 가능한 대시보드. 아마 없을 거 같은데, 난 그런 유니콘을 내 노션 워크스페이스의 빈 페이지에 구현하고 싶었다. 회사 다닐 때에 노션을 좋아하고 잘 쓰긴 했지만 복잡한 대시보드는 구상해 본 적도 없는 나에게 그 정도 규모의 대시보드는 만드는 것은 모래를 쌓아 거대한 성을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부지런한 삶을 살게 해 줄 도구를 장만하는 데에 시간을 쓰느라 오히려 부지런히 살지 못하는 바보 같은 시간이 그렇게 시작됐다. 과장 없이 말해도 4개월 정도는 노션 대시보드 제작에 쏟았던 모양이다. 이럴 게 아니라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부터 해결해 나가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일의 우선순위를 잘 따지고, 최소 단위로 완성해 나가고, 같은 시간을 들였을 때에 더 고효율의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일들부터 해내는 것. 그렇게 일 잘하는 프리워커의 삶은 그때의 내겐 훈련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나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인간이었다.


똠양꿍 먹고 힘내서 노션 대쉬보드만 들여다봤던 디지털(바보)노마드 백은영

  그래서 그냥 죽어라 노션 대시보드만 만들었다. 그때 난 회사에 얽매이지 않는 디지털 노마드의 멋진 삶을 즐기겠다며 태국으로 훌쩍 떠난 상태였는데, 거기서 관광도 휴식도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노션 대시보드만 만들었다. 나도 이런 내가 우습다. 

  마치 이걸 다 완성해야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걸 완성하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당신은 아나요? 둘 중 더 나은 방향이 뭔지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을 뒤바뀐 시간. 그 시간을 거쳐 만들어 낸 나의 노션 대시보드는 지금까지도 잘 사용하고 있고 덕분에 나의 일과 삶을 깔끔하고 재미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완성하는 데에도 몇 개월이 들었고 완성되고 나서도 몇 개월을 더 쓰고 나서야 '아 만들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게 된 거다. 긴 시간을 쏟아부은 일의 효용을 또 긴 시간이 지나서야 체감하게 된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만족하며 쓰고 있으니 그렇게 시간을 쏟아부어 만든 걸 잘한 일이라고 봐야 할까? 모르겠다. 지금의 나라면 더 우선순위가 높고 빠르게 결과를 낼 수 있는 실질적인 '일'부터 해나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필요에 따라 대시보드를 완성해 나갈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시간보다 일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하며 책상을 정리하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이 더 길면 안 되니까. 실제로 요즘은 내 노션 대시보드에 새롭게 필요해진 기능을 덧붙이거나 아예 하나의 템플릿을 새로 만들 때면 최소한의 기능만 넣어 빠르게 초안을 완성해 놓고 그걸 실사용하면서 더 복잡하고 사용하기 좋게 바꿔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때 그렇게 미친 듯이 시간을 쏟고 골몰하지 않았다면 지금 유용하게 사용하는 기능을 떠올리거나 구현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깊게 몰입했을 때 만날 수 있는 집중력의 영역, 그 안에서 만들어 낸 기능들은 지금 봐도 참 쓸만하게 잘 만들었다 싶거든. 


  푹 빠져들고 오랜 시간을 써서 완벽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과 우선순위와 필요에 따라 최소 단위로 구축하면서 속도를 높이는 것. 어떻게 하는 게 정답이었을까? 아니, 더 나은 방향이었을까? 아직 나는 둘 사이에서 무게 중심 잡는 걸 어려워한다. 사실 정답은 없으리라고 본다. 어찌 되었든 죽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지금 죽지 않은 걸 보니 그래도 두 가지 방법론 사이에서 줄타기를 아주 못하지는 않았나 보다.



으름이가 기겁을 하고 도망갈 만한 어느 미친놈의 노션


  "노션을 이렇게까지 쓰는 사람은 처음 봤어"

  라고들 말한다 내 워크스페이스를 보면.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집착적으로 복잡한 기능을 만들어서 하나하나 관리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실제로 얼마나 성실한지와 얼마나 완벽하고 복잡한 대시보드는 원하는가는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난 그렇게 생산성 있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님에도 내 노션은 생산성에 미쳐버린 사람의 그것과 같아야 했다는 거다.


  이런 절교장을 내밀었으니, 게으름도 '미친놈은 안 건든다' 하면서 피해 가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 그런 거 같다. 내가 만든 대시보드의 기능들이 매일 나에게 요구하는 입력값들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내 하루에 뭔가를 더하고 지켜내는 생활이 이어졌으니까.


  그럼 내가 노션에 어떤 대시보드를 만들어 쓰고 있는지를 살짝만 소개하고 이 글을 끝내야겠다.



내 목장에 온 걸 환영해, 으름아


노션 대시보드 커버로 만들었던 이미지. 이런 거에 쓸데없이 진심이다. 용량이 너무 커서 지금은 삭제했다.

  내 대시보드는 목장을 운영하는 콘셉트로 돌아간다. 사실 최근 이 목장 콘셉트에 질려가는 중이라 다른 세계관으로 바꿀까 생각 중이다. 스토리텔링만 잘한다면 목장, 우주선, 원양어선, 빨래방, 달리기, 붕어빵 타이쿤 등 그 어떤 콘셉트도 갖다 붙일 수 있다. 이렇게 세계관과 스토리를 부여하는 것은 안 해도 전혀 문제없는 부분이지만 나는 재미있어서 어떤 일을 하든 꼭 한다. 

  제일 중요한 건 '일과 삶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어떤 로직으로 관리하느냐'다. 나는 일=삶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에 그 두 영역을 합쳐서 한 번에 관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 일과 삶에서 접하는 모든 일이나 상황을 '프로젝트'로 취급하기로 했다. 내가 벌이는 사업, 만들고자 하는 콘텐츠, 읽은 책, 감명 깊게 본 영상, 병원 예약, 화분에 물 주기,... 이렇게 내가 하루하루 접하고 처리해야 할 모든 일들은 모두 '프로젝트'로 취급되고 그 프로젝트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나뉘어 관리된다. 

  그리고 여긴 목장이니까, 나는 프로젝트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구분하며 가축의 이름을 붙였다. 

  현재 내 노션 목장에는 7종류의 가축이 살고 있다. 가볍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병아리, 배우고자 하는 것들은 돼지, 소비하려는 콘텐츠는 알파카, 작은 단위로 쳐내는 작업들은 소, 가볍게 이어가는 사업은 양, 본격적으로 하고 있는 사업은 말,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내가 효율적으로 해내야 하는 액션들은 강아지다. 

  병아리로 이 목장에 온 프로젝트가 어떻게 성장하냐에 따라 양이되거나 말이 될 수도 있다. 돼지이면서 동시에 병아리일 수도 있고, 거기에서 파생된 액션이 있다면 동시에 강아지일 수도 있다. 



    또, 모든 프로젝트는 필요에 따라 '부모 가축'이 되거나 '자식 가축'이 될 수 있다. A라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기 위해 B라는 책을 읽어야겠다면, 가축 A의 하위 가축으로 B를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축 목록'이라는 하나의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일과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프로젝트 기반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302크래프터스클럽]이라는 프로젝트의 하위 프로젝트들이 각자의 성격과 상태에 따라 할 일, 부속 프로젝트, 참고자료 등으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매일매일 나의 상태를 체크하고 하루를 기록하는 것도 중요한 영역이다. 매일의 기록은 프로젝트와 구분된 '일지' 형식의 데이터베이스를 따로 만들었다. 거기에 매일 체크하게 되는 내용은 아래 왼쪽 캡처와 같다.

매일 작성하는 일지(왼쪽)과 그 내용이 월별로 모이는 월간 보고서(오른쪽)

  너무 세세한 항목들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모두 필수로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날그날 채울 내용이 있을 때만 체크하기 때문에 막상 해보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매일 작성한 내용들은 월별 기록을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로 연결된다. 그곳에서 한 달 동안 내가 어떤 목표들을 세웠고, 어떤 감사한 일들이 있었고,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한 번에 볼 수 있고 한 달에 몇 %를 아프거나 술 먹거나 운동했거나 채식했는지, 커피는 하루 평균 몇 잔씩 마셨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익숙해지고 난 지금은 그날그날 가벼운 마음으로 기록해 두고, 한 달을 회고할 때 월별 기록을 보면서 하나씩 되짚어본다. 이게 꽤 달달한 시간인데, 읽으면서 내 삶에 대한 애정이 막 회복된달까?


  사실 아직은 주간/월간 회고를 아주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는 않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나의 일하는 방식이 정돈되었다고 느낄 때 나만의 주간/월간 회고 방법을 만들어 보고 싶다. 그때에는 월간 보고서를 딱 켜면 그 달에 집중해서 키웠던 가축(프로젝트)들과 그 진행 상황, 결과 등을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구성을 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 이렇게 노션 대시보드에 수정하고 덧붙일 내용을 머릿속으로 구상해 볼 때 정말 짜릿하다. 노션은 어느새 내 취미 생활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한 내용들을 모두 한 번에 볼 수 있는 메인 페이지는 공개할 수 없는 몇몇 부분들이 빠져있지만, 대략 아래와 같이 구성된다.

  시작은 내가 좋아하는 문구와 사진으로 열었다. 이 두 가지는 내킬 때마다 다른 것으로 갈아 끼운다. 그리고 그 오른쪽은 내 대시보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매일 기록한 일지 중에 한 달 전, 3개월 전, 6개월 전, 1년 전의 내용을 불러와 주는 부분! 이 기능을 구현해 두고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내가 작성한 일지들이 쌓여가니 이 부분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매일 아침에 '아 그게 벌써 한 달 전이구나!', 혹은 '맞아 3개월 전에 그랬지' 하며 지난 시간을 떠올려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스스로를 북돋워 주더라. 이만치 애썼고 이만치 쌓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아래로는 목장 안에 있는 다양한 페이지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안내판이 있다. 많은 페이지들이 보이는데 이걸 지금 다 쓰진 않는다. 처음에 대시보드를 만들면서 구성했던 것과 실제 사용하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시간이 쌓인 후에 실제로 쓰는 방식에 딱 맞게 한 번 쫙 개편을 해볼 참이다.


  그 아래로는 실제로 나의 일과 삶을 관리하는 영역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내가 키우는 가축(프로젝트)들과 그 안에 속한 자식 가축들, 그러니까 내가 실제로 해야 할 일들을 본다.  내가 필요한 대로 정리해두고 나니 엄청 길어졌는데 나는 이게 편하다. 

  그 오른쪽으로는 매일 쓰는 일지, 가축들 중에서도 주요하게 키우고 있는 것들을 모아 두는 곳, 내가 보고 즐기는 콘텐츠(책, 영화, 영상 등)들을 모아두는 곳이 차례로 나온다.


그 달을 대표할만한 사진으로 커버를 채워둔 월간 보고의 바깥쪽 모습

  마지막으로 월간 보고를 모아둔 부분이 나오며 메인 페이지는 끝난다.


  이 형식을 반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제는 이 대시보드 안에 나의 일과 삶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게 꽤 익숙한 일이 되었다. 어떤 툴이나 다이어리를 써도 그게 습관이 되지 않아 고민이었던 나에게는 아주 기쁜 일이다.

  매일 내 목장 안에서 다양한 가축들이 마구 뛰놀며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목장 안에서 으름이는 설 자리가 딱히 없다는 걸 요즘 또 느낀다. 어때 으름아 내 첫 번째 절교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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