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에 많은 부분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데, 시간 약속 정하는 짧은 대화에서도 진아 씨가 쓰는 단어와 문장을 들으며 특유의 에너지와 힘이 느껴졌어요."
“다들 이렇지 않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두 번째 세션에서의 대화였다. 올 초 우연한 기회로 참여한 직업 코칭 프로그램에서 만난 상담사와의 면담은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네 번의 세션 동안 직업 선호도, 버크만 진단, 기질, MBTI 검사 등을 시행한 후, 검사지의 결과들을 토대로 상담이 진행되었다. 수많은 선택과 결정, 그로 이어진 과정과 결과들에 대해 돌아보며, 동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한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저 깊숙한 곳 어디쯤에 있다가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오는, 그럴 때마다 꾹꾹 눌러 담거나 애써 외면하며 요리조리 피해왔던, 나의 구석진 마음 한 켠에 조명을 비추는 느낌도 들었다.
버크만 진단 결과지에 대한 상담을 하며 직업 상담사는 내가 사용하는 말에 특별함이 있다고 했다. 경력을 이야기할 때 "당시에는 물론 힘들었겠지만 즐거웠어요.", “사무실 도착해서 메일 읽기 전 마시는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는 최고예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동생네 부부가 우리 아이들에게 베푼 사랑을 보답하고 싶어요. 동생도 정말 착하지만 제부는 최고의 이모부예요."
"외모, 정말 중요해요. 요즘 엄마들은 관리 많이 해서 다들 예뻐요. 저도 나이 들어도 계속 아름답고 싶어서 엄청 노력해요."
“오늘 아침에 큰 아이와 싸우고 기분이 너무 안 좋아요, 어른인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걱정되는 마음에… 우리 집에서 저만 잘하면 돼요."
지금껏 직업 상담을 하며 ‘제부’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고... 상담사는 인복이 많은 것 같다 하며 웃었다. 그런 후 아이와는 싸우는 게 아니라 혼내는 거라고 정정해 주었다.
그럼 부정적인 감정이나 싫은 사람은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첫마디를 하려는데 선뜻 나오지가 않는다. “음, 일단 웬만하면 상대의 좋은 면을 보려고 해요. 누군가를 싫어하는 일 자체가 꽤 불편하고요, 그로 인해 스트레스받는 제 모습을 보는 것도 싫고요. 그래서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해요. 지켜보는 편이에요.” “진아씨다운 선택이네요. 그래도 분명이 나와 안 맞고 싫은 사람은 있잖아요. 그럴 때 진아씨가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가 궁금해요.” “분명히 있죠. 제 성격이 싫은 사람이 생기는 게 불편했다 했잖아요, 그 부분이랑 연결되는데 또 제가 외향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모임도 많고 친구도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일단 열 번 정도는 기다려요, 모임의 멤버 중 한 명이면 우선은 좋아하는 사람들에 집중해보다 선 넘거나 진짜 아니다 싶으면 안 봐요. 몇 년 전, 오랜 인연과 절연했는데 정말 지독하게 힘들었어요. 내 인생의 반이 다 날아간 것 같았어요. 슬프고 허무하고 배신감이 들었지만, 피가 철철 났던 내 마음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요.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말하다 보니 생각나네요.” 세션을 진행하면서 돌아보니, 내 입장에서는 열 번이나 참은거지만 상대는 모르고 있다 뭐지 싶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야, 난 충분히 지켜봤어.)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부정적 감정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완벽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소망이나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어쩌면 오만일 수 있다.' - <오십의 발견>
내 속에 들어온 것처럼 내 이야기였다. 우울, 불안, 슬픔, 분노,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나에게는 이런 감정들은 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밀쳐내고 외면해 왔다. 느끼지만 못 느끼는 거였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낀다는 사실이 낯설고 두려웠다. 스스로가 만든 완벽함을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강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상담이 아니었다면 다들 이렇게 살지 않나 하며 묻어두었을 거다. 스스로 만든 완벽함을 위해 지금껏 달려왔고 심지어 그 기대와 수준도 평균보다 매우 높은 사람이다.(여러 검사를 통해 실제로 검증되었다.) 이런 내가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건 마치 돌이키기 어려운 인생의 오점을 갖게 되는 듯한 불편한 경험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상담사는 나를 바라보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수준은 너무나 높고. 그리고 그 관계 있잖아요, 진아씨가 그랬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에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겠어요? 진아씨는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요. 이제부터는 조금 더 편안하게 삶을 바라보세요. 제 3자 입장에서 보면 진아씨는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러니 여기서 더 잘하려고 스스로를 몰아가지 마세요. 계속 이렇게 지내다간 번아웃이 올 거에요.”
‘진아씨는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을 살고 있어요.' 세 번째 세션 종료 전 이 한마디를 듣는데 뭐랄까 너무 시원했다. 아마 이 말을 듣기 위해 저혈압에도 에너지를 쥐어 짜내어 새벽에 일어나 폼롤러를 돌리고 내전근을 키우겠다며 허공에 브이를 그리 만들었나 싶다. 그런 새벽을 16년 지나왔더니 그 힘들다는 하비(하체비만)도 탈출한 독한 사람이 바로 나다. 참 열심히도 살았네. 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줄 알았어. 이제부터 눈 딱 감고 내려놔 보자, 내 마음대로 한 번 살아봐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