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읽은 책을 또 읽는다는 건, 나에겐 매우 특별한 경우다. 적극적으로 읽기를 시작한 이래, 재독을 한 경우는 10권 정도이고, 그중 한 권이 바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제목부터 워낙 강렬했기에, 선반에서 이 책을 발견하자마자 위시리스트에 있었던 책이라는 게 떠올랐다. 어떤 책을 읽기로 마음먹을 때까지 영향을 주는 요건 중 하나가 한 줄 평인데 이 다섯 마디를 보고는 미룰 수가 없었다.
"책의 모양을 한 작은 경이.” <더 내셔널 북 리뷰>
#첫 번째 읽기
수많은 곳에서 이 책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경의를 표했기에 그 글귀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부푼 기대를 안고서 시작했는데 정작 도입부부터 진도가 안 나갔다. 내용에 대한 정보는 물론, 장르가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교양서인지도 모른 채 시작해서일까, 읽으면서도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인지, '그럼 이 책은 과학서일까' 아니면 '이제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건가' 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웠기에 인내력이 필요했다. '책의 모양을 한 작은 경이'라니, 교양인으로 한 발짝 다가서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고 싶었다. 한 장씩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다행히 조금만 버티면 진가를 알게 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신이 없는 막간극]에 다다르자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지루하리만큼 자세하게 묘사된 '아가시'라는 인물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떻게든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간절했던 룰루 밀러는 아가시의 제자이자, 존재하는 모든 물고기의 종을 분류하고자 연구해 온 저명한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알게 되며, 그의 경이로운 업적에 매혹되어 갔다. 이는 곧 깊은 존경으로 이어졌고, 조던의 모든 행적을 쫓아 그의 책과 전기를 낱낱이 섭렵해 가던 중, 롤모델이었던 그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작가인 룰루 밀러의 인생뿐 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 미국 사회, 더 나아가 하나의 세계에 너무나 강력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시련과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 우주의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의 우월성을 인정해 버리는 터무니없는 믿음인 것일까?
나는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어떤 생각이 옳은 것일까?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있는 명제일까?
그러고 나서 마침내, 룰루 밀러도 그녀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3. 신이 없는 막간극
나의 희망을 꺾는 침묵이 점점 더 강력하게 내 귓가를 울려대는 동안, 열역학 제2법칙은 그 가늠할 수 없는 꼬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것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주의를 끌었던 이유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거라는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게다가 그는 과학자였으므로, 나는 무엇이든 끈질기게 지속하는 일에 대한 그의 정당화가 내 아버지가 심어준 세계관에도 들어맞을 수 있을 거라는 적은 가능성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 희미한 빛을 발하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9. 세상에서 가장 쓴 것
데이비드가 공중에서 몸을 뒤집고 회전하며 곡예를 하는 모습, 그러면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이뤄내는 모습, 심지어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경험까지 가스라이팅하는 모습은 참으로 경탄스럽다. 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나의 괴상한 애착과, 그가 내게 살아가는 방법을, 내가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내 인생을 되돌려놓을 방법을 가르쳐 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에게는 내가 존경할 만한 많은 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자기 확신을 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굳은살이 단단히 박히고 그 어떤 방해물에도 끄덕도 하지 않게 되면, 결국에는 한 여자의 목숨까지 끊어버릴 수 있게, 아니면 최소한 그 죽음의 진실을 기꺼이 은폐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채로. 내 목덜미로 뜨거운 열을 치솟게 만든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의 일이다. 데이비드가 쓴 물고기 수집 안내서 중 하나인 《물고기 연구를 위한 안내》에서 답을 찾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430페이지에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성가신 물고기를 잡을 때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은? 바로 독이다. 그가 추천한 종류는? 언젠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쓴 것"이라고 묘사했던 위험하고 강력한 물질, 바로 스트리크닌이다.
10. 진정한 공포의 공간
'그 단어'는 그가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미국에서 그리 인기가 없는 단어였지만, 그가 지극한 열성과 과학적 권위를 갖고, 옹호했던, 그리하여 그의 도움에 힘입어 미국 땅에 보급된 단어, 바로 우생학eugenics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판결은 아직도 법전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 캐리 벅 소송의 대법원 판결은 이후 한 번도 뒤집히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라면 정부는 당신을 집에서 끌어내 당신의 배를 칼로 긋고 당신의 혈통을 끊어버릴 권리를 지금도 갖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 골턴의 어리석음, 가난과 고통과 범죄가 혈통의 문제이며 칼로 잘라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이 나라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우생학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나라다.
11. 사다리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 그러다 마침내 나는 루이 아가시가 젊은 데이비드의 정신에 관념의 씨앗 하나를 심어놓는 순간에 다다랐다. 그것은 자연 속에 사다리가 내재해 있다는 믿음이었다. 객관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향하는 신성한 계층구조.
그리고 인류가 쇠퇴해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생각했을 때,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류를 구출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그는 인류를 구원할 가장 건전한, 아니 유일한 방법은 불임화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12. 민들레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당신이 중요하다는 말. 그것은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에필로그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겪자가 없는 곳.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 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두 번째 읽기
처음 읽었을 때 들어오지 않았던 글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재독을 함으로써 이 책의 진가에 더 다가가게 되었다. 장르는 전기이자 회고록이며 과학적 모험담이라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음을 알고 시작했기에 기뻤고, 저자인 룰루 밀러가 그녀의 아빠를 위해 쓴 책이라는 것도 두 번째 읽기를 통해 알게 된 소중한 정보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거나 파악한다는 게 가능할까, 우리가 믿어왔던 진리라는 것이, 누구나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더 들어가 이런 과업이 우리 삶에 과연 중요한 것일까,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장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굉장히 가치로운 작업이었다.
재독을 마치며, 룰루 밀러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가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과학에서조차 오류와 과오, 실수가 범람할 수 있다는 것, 어떤 존재에 대한 가치판단, 정의, 선과 악 등 모든 관념들을 따르거나 거스르지 않은 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존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그렇게 나는 룰루 밀러를 이해했다.
혼돈.
'중요하다'와 '중요하지 않아' 사이에서의 혼돈의 시간을 거쳐 룰루밀러는 결국 알게 된다. 우리는 중요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