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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Aug 12. 2017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

'메멘토 모리'에 대한 <덩케르크>의 현대적 재해석에 대하여

덩케르크 해안에 독일군 전투기 슈투카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병사들의 표정엔 절망감이 떠오른다. 그들은 죽음이 그들을 피해 가기만을 바라며 황급히 지면을 향해 엎드린다. 악마의 사이렌이라는 별명을 가진 슈투카가 지면에 폭격을 가할 때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땅에 엎드리는 일뿐이다. 그 죽음의 해변에서 죽고 사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의지한다. 하늘을 날며 폭탄을 떨어트리는 슈투카 조종사가 폭탄 투하를 어디에 하는지, 그날 해변의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내가 어디에 누워 있는지, 그런 수많은 우연이 모이고 모여 죽은 자와 산 자를 가른다. 내가 살아남은 것은 내가 죽은 자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며 그가 죽은 것은 그가 생존자들보다 못났기 때문이 아니다. 죽고 사는 것은 단지 여러 겹으로 겹친 우연이 결정하는 것이다.


무작위로 결정되는 죽고 사는 일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의 새 영화 <덩케르크>에서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우연성을 극대화하여 연출한다. 이를 위해 감독은 기존 영화적 문법이나 내러티브는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인물들의 생존과 죽음을 시간적으로 뒤섞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음 인터뷰를 보면, 그의 의도를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은 그들의 이야기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대화를 다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누구처럼 행동하는지, 아니면 어디서 왔는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게 유일하게 흥미로웠던 질문은 "그들이 해변을 벗어날 것인가? 잔교로 가려다 다음 폭격에 죽지는 않을까? 건너가던 중에 배로 인해 으깨지진 않을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The empathy for the characters has nothing to do with their story. I did not want to go through the dialogue, tell the story of my characters… The problem is not who they are, who they pretend to be or where they come from. The only question I was interested in was Will they get out of it? Will they be killed by the next bomb while trying to join the mole? Or will they be crushed by a boat while crossing?)
-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뷰 중


잔교에서 해변을 벗어나는 배를 탄 병사들은 운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그 배는 슈투카의 폭격에 의해 침몰한다.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시가지를 벗어나 아군이 모여 있는 해변에 도착한 병사들은 그들의 행운에 감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폭격에 살아남지 못한다. 해변을 벗어나던 배가 침몰하고, 배에서 뛰어내린 사람들 중 몇몇은 구명보트에 탈 수 있었고, 몇몇은 구명보트에 타지 못 하고 자신의 목숨을 운명에 맡겨야 했다. 놀란이 그린 이러한 장면들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전장에서의 죽음과 생존은 무작위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Philippe de Champaigne - Vanitas [1]


전쟁은 부조리한 삶의 속성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주는 우화일지도 모른다. (전쟁이 비극인 것은 그 우화가 현실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현실로 존재하기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부조리가 전시엔 현실이 된다.) 전시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삶 곳곳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은 부조리가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는지는 우연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라틴어 격언 중 "너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흔히 알려진 메멘토 모리의 기원은 고대 로마 장군의 개선 행진 때 노예가 개선장군의 머리에 관을 씌우며 "너를 돌아보고, 네가 단순히 사람임을 기억하라"라고 속삭였다는 데에서 기원한다 [2]. 우연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메멘토 모리"라는 음울한 격언을 외우는 것 밖에 없다.


지금, 여기의 '메멘토 모리'

중세 이후 메멘토 모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허무주의적 성격을 띠는 격언이 된다. 현세의 일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니 신 앞의 겸손해야 한다는 도그마가 된다. 그러나 신에 대한 헌신이 더 이상 사회의 중심이 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되는 오늘날 '메멘토 모리'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돼야 한다 [3].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지점에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덩케르크>는 '중세식 메멘토 모리'에 대한 놀란의 '현대적'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답은 영화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기존의 영화적 문법을 거의 지키지 않는 영화이기에 <덩케르크>는 무척 혼란스러운 영화이지만 영화 내내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연대이다.


물론 감독은 그것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지 않는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이기적인 행동을 하거나 국가(프랑스인 병사를 차별하는 영국군)나 분대(사격받는 배 속에서 다른 분대 병사를 차별하는 분대)와 같은 작은 집단 이기주의 속에 매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대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죽음의 세계, 메멘토 모리의 세계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연대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망망대해에서 힘겹게 나아가는 조난선처럼, 우연한 죽음의 세계에 속한 우리 인간에게 의지할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


우리는 언젠가 곧 죽을 것이고, 죽고 사는 일은 내가 가진 것이나 내 재능을 벗어난 일이다. 죽음은 마른하늘에 치는 벼락처럼 예고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죽음과 몰락을 가져오는 악마의 눈은 멀어 있다. 내가 살아 있다고 우쭐할 것이 아니고, 내가 부유하다고 우쭐할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찾아오는 죽음은 공평하다. 그러나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곁에 있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헌신뿐이다. 연민과 헌신을 통한 우리 사이의 연대가 완전한 방법은 아니라도, 우리가 기댈 것이라고는 그것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월 속에 닳고 닳은 격언 '메멘토 모리'를 다시 기억해야 한다. 전쟁 속에서 죽고 사는 일이 우연에 의한 것이듯, 전쟁과 같은 삶 속에서 부유하고 가난하고 행복하고 불행한 일은 단지 겹치고 겹친 우연 때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에 '메멘토 모리'는 신 앞에서의 겸손함을, 전시에 '메멘토 모리'는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연대의 희망을, 그리고 오늘날 '메멘토 모리'는 우리 곁의 이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삶의 윤리를 포괄하는 단 하나의 정언 명령일지도 모른다.

 


[1]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ile:StillLifeWithASkull.jpg

[2] 그러나 wikipedia에 의하면, 이 기원은 다른 교차 기록이 전무하므로 불분명하고, 이후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낸 말일 것으로 여겨진다.

[3] 신자들에게는 여전히 '메멘토 모리'가 신 앞에 선 믿는 이들의 자세로서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의 자세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말: 지금까지 주 1회 주기로 글을 올려 왔지만, 최근 2주 간은 학회 출장으로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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