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리학자 J Aug 20. 2017

하는 일과 사는 일, 그 사이

<셰프의 탄생>, 그리고 내 직업과 삶의 간격에 대하여

내 버킷 리스트에는 몇 가지 일들이 있는데, 요리를 잘 하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사실 요리를 잘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수많은 시도와 실패 경험일 텐데, 평소 끼니를 만들 기회가 많지 않아서 내 요리 실력은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가끔 레시피대로 만들면 맛있는 결과물이 나올 때가 있지만, 숙련된 요리사나 주부처럼 레시피 없이 감만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경지는 내게는 까마득하다. 또한, 집에서 주방이라는 공간은 그 주방 주인의 취향과 스타일에 맞추어져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나만의 주방을 가지지 못 한 나에게 타인의 주방(그것이 가족의 주방이라고 하더라도)에서 요리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다. 생활 속에서 요리를 한다는 것은 내 삶을 나 스스로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므로, 언젠가는 꼭 요리를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실용적 탐미주의자들의 세계

프랑스 보르도에 위치한 레스토랑 <Le Chapon Fin>의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 (2013년 직접 촬영)

그런가 하면, 미식으로서의 요리 (gastronomy) 또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생활 요리에 대한 열망이 아마추어 스포츠를 즐기는 느낌이라면, 미식을 즐기는 것은 프리메라리가나 윔블던과 같은 프로 스포츠 관람하는 일에 가깝다. 우리가 메시나 페더러의 플레이를 보며 희열을 느끼듯, 우리는 페란 아드리아나나 조엘 로부숑과 같은 셰프의 음식을 맛보며 먹는 것 이상의 경험을 한다. 내가 처음으로 파인 다이닝의 매력을 느낀 것은 프랑스 보르도의 레스토랑 <르 샤퐁 팽 (Le Chapon Fin)> (이 글 메인 사진 참조)의 점심 코스를 먹었을 때였다 [1].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레스토랑 내부는 동굴을 연상시키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였고, 요리는 실험적이었지만 맛이 있었다. 분자요리를 처음 접한 것도 그곳이었다. (나는 분자요리 방법으로 만들어진 애피타이저를 그곳에서 처음 접했지만, 그것이 분자요리라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미식은 값 비싼 사치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 <르 샤퐁 팽>에서의 경험은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한 경험이었다. 이렇듯 완숙한 셰프의 요리를 접하는 경험은 단순한 미각의 만족을 넘는다. 스페인 셰프 페란 아드리아나에 대한 책 <엘불리의 철학자>를 보면, 그는 메뉴를 설계할 때 코스를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가장 최고의 미학적 경험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나름의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지점에서 그는 음식과 현대 예술의 경계선을 넘는다. 또한 20세기 말 분자요리의 탄생 이후, 요리는 지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요리사들은 실용적 탐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하면 실용적 탐미주의자는 차가운 핫초코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지만, 그들의 일을 이 단어보다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고 생각한다. 글 서두에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의 미식과 집에서의 생활 요리를 이야기했듯, 요리는 자체로 예술인 동시에 우리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미식이든 생활 요리이든, 우리는 고픈 배를 채우려고 요리를 먹는다. 그렇기에 요리는 실용적이며, 예술과 지적 고민과 논리가 그 안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요리는 탐미주의적이다. 따라서 요리사들을 실용적 탐미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용적 탐미주의자들인 요리사의 삶에 매력을 느낀다면 저널리스트 마이클 룰먼의 <셰프의 탄생>을 읽어볼 만하다. <셰프의 탄생>에서 저자는 세계 최고의 요리 학교 CIA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어떻게 요리사를 양성하는지, 요리사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직접 체험하여 요리사들의 삶을 현장감 있게 보여준다. 처음에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요리사를 관찰하다가, 점점 그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책의 마지막에 결국 그는 저널리스트로 돌아가지만, CIA 이전과 이후에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저자의 삶이 달라진 것은 <셰프의 탄생>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며 그가 요리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요리사란 직업이란 삶의 태도 또한 요리사에 맞게 바꾸기를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셰프의 탄생>에서 그려지듯, 직업 요리사 수준의 직업의식을 가지지 않고서 CIA의 타이트한 커리큘럼을 진지하게 쫒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스킬 주방에서 잘 해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형언할 수 없는 힘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일단 받아들이기면, 수업이 시작하는 2시에 그것들을 활성화시켰다가 주방을 떠나면서 도로 넣어두는 일 따위는 할 수가 없었다. 그 힘은 우리 마음속에 영구적인 체계를 뿌리내렸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힘이 하나가 되어 윤리,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도덕률, 즉 가치 체계였다.
- 마이클 룰먼, <셰프의 탄생> p.152


그렇다면, 실용적 탐미주의자인 요리사들에게 삶과 요리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실용적 탐미주의를 연구하는 요리사들은 세상을 우리와 다른 식으로 보고 있을까.


내 직업과 내 삶 사이 가운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참을 돌아왔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직업은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우리는 생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에 보낸다. (9-6 근무를 기준으로 한다면 ) 우리는 하루에 8시간 일을 하고, 하루에 8시간을 자는 데에 쓴다고 하면 깨어있는 나머지 16시간 중 절반을 일하는 셈이다 [2]. 그렇다면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삶의 나머지 부분에 어떻게든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물리학자가 세상을 보는 방법과 요리사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다를 것이다.


<셰프의 탄생>에서 볼 수 있는 셰프들의 모습에서도, 직업과 삶의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셰프들에게 요리란 삶의 태도를 규정하는 하나의 도그마인 것처럼 보이고, 내 경우 물리학을 하는 방식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무언가를 바로 잘 믿지 않는 버릇이 있다. 연구를 하며 논문을 읽을 때, 그 논문이 주장하는 바를 바로 믿어서는 안 되고, 최소한 그 주장에 대한 근거나 인용 논문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나는 연구를 할 때 풀리지 않는 문제에 직면하면 그것을 언제든 꺼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갈무리해놓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파인만 알고리즘과 같은 버릇이 있는데 [3], 내 삶의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을 얼마 전에 발견했다. 이처럼 물리학자라는 내 직업은 알게 모르게 내 행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삶과 직업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겹쳐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굳이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말하지 않더라도, 삶과 겹쳐지는 직업은 때로 우리를 괴롭게 한다. 그렇다면 내 삶과 내 직업 사이의 거리는 얼마가 적당한 것일까? 아마도, 이 질문에 단 하나의 정답은 없을 것이다. 개인에 따라, 직업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직업은 우리를 영혼 없이 일하는 기계로 만들 것이고, 삶과 완전히 겹쳐진 직업은 우리를 완전히 소모시켜 파괴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는 일과 하는 일 가운데, 그 어딘가에 우리가 찾는 것이 있을 것이다.



[1] <르 샤퐁 팽>은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몇 년 전에는 미슐랭 원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이었다고 한다. 

[2] 한국의 경우 노동시간은 9-6보다 더 길기 때문에 생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에 보낸다고 보면 된다.

[3] 파인만의 문제 해결 알고리즘: (1) 문제를 쓴다. (2) 매우 깊게 생각한다. (3) 답을 쓴다.

매거진의 이전글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