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리학자 J Aug 27. 2017

꿈을 꾸는 사람들

뮤지컬 <맨 오브 라 만차>와 꿈꾸는 몽상가에 대하여

차가운 현실과 뜨거운 이상 사이에서 짓눌려 죽은 이로 기억되는 남자가 있다. 때로 그는 현실감각 없는 몽상가로, 착란 증세를 겪는 광인으로 비하되지만, 많은 이들에게 그는 비참한 현실에 정의를 세우려고 노력한 참된 기사로 기억된다. 그의 이름은 돈 키호테로,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인물이다. 뮤지컬 <맨 오브 라 만차>는 이 두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금 징수원 일을 하던 세르반테스는 교회에 세금을 부과했다가 신성 모독 혐의로 감옥에 갇힌다.  세르반테스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모의재판을 받는다. 동료 수감자들에게 그는 이상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극형을 구형받는다. 그는 자신이 극작가이므로 연극의 형태로 변론을 하고자 한다. 세르반테스는 직접 돈 키호테 역을 맡고, 수감자들 중에서 몇몇은 다른 등장인물을 맡아 감옥 안에서 작은 연극이 진행된다. 극중극으로 진행되는 <맨 오브 라 만차>는 돈 키호테의 이야기와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를 넘나 들며 두 몽상가의 궤적을 쫓는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남자

 <맨 오브 라 만차> 중 <Opening & Man of la Mancha>

뮤지컬 <맨 오브 라 만차>는 스페인의 향취가 물씬 느껴지는 오프닝(위 Youtube 참조)으로 시작된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의 연극을 하고, 돈 키호테는 산초와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느 누구도 구하지 못 한 여행을 하고 병으로 죽는다 [1]. 이처럼 돈 키호테는 직접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세르반테스 또한 직접 세상을 바꾸지 못 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들은 한심한 실패자다. 하지만 그들의 불가능한 꿈은 세상을 바꾸었고, 지금도 누군가에겐 세상을 바꿀 용기를 주고 있다. 돈 키호테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던 알돈자에게 둘시네아로 상징되는 희망을 주었고, 세르반테스는 함께 연극을 했던 감옥의 수감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뮤지컬에서는 묘사되지 않지만, 현실에서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스페인과 온 유럽으로 뻗어 나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누군가는 <돈 키호테>를 읽거나 <맨 오브 라 만차>를 보며 자신이 간직한 꿈을 좇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나, 돈 키호테 / 라 만차의 영주 / 내 운명이 부르고 나는 간다
 (I am I, Don Quixote, / The Lord of La Mancha, / My destiny calls and I go,)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가 꾼 꿈은 단순한 꿈 이상이다. 그들의 꿈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한 윤리적인 꿈이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 전통에서 인간의 삶은 흔히 시시포스에 비유된다. 신화에서 시시포스는 신의 저주를 받아 산 아래로 떨어지는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 올려야 하는 일을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반복해야 한다. 마치 시시포스의 삶은 무의미라는 저주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시시포스 신화를 떠올리며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는 <선과 악>에서 시시포스가 어떻게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는 시시포스의 삶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1) 그가 바윗돌을 굴려 산 정상에 아름다운 신전을 짓는 보람을 느끼는 것, 또는 (2) 시시포스가 바윗돌을 굴리려는 강한 욕망을 가지는 것, 두 가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리처드 테일러의 주장에 철학자 피터 싱어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에서 그의 주장은 자아 안에 갇혀 있으므로 한계를 가진다고 반박한다. 즉, 신전을 짓는 보람이나, 바윗돌 굴리기에 대한 욕망은 자아 안에서 나오므로, 그에 대해 성찰할수록 그 안에서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피터 싱어는 우리가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자아를 넘어선 초월적 이상이 필요하되, 그 초월적 이상은 반드시 윤리적 토대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터 싱어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한다면,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불가능한 꿈(The impossible dream)'은 그들이 삶에서 의미를 찾기에 충분히 알맞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꿈은 궁극적으로 정의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골 촌부 알론소 키하나는 "나는 나, 돈 키호테(I am I, Don Quixote)"라고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와 어제의 몽상

수잔 보일 - <The impossible dream> (<맨 오브 라 만차> 중) [2]

하지만 <맨 오브 라 만차>는 꿈을 좇는 일을 낭만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가 꿈을 좇기 이전에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문제를 다룬다. 돈 키호테는 몽상가다. 바보처럼, 광인처럼 철 지난 정의와 기사도를 우직하게 쫓는다. 그러나 <맨 오브 라 만차>가 몽상의 대가를 참혹하게 보여준다. 돈 키호테가 둘시네아라는 귀족 이름으로 불렀던 거리의 여인 알돈자는, 돈 키호테와 싸운 남자들에 의해 집단 강간을 당한다. (충격적 이게도 뮤지컬에서는 집단 강간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표현된 몽상의 대가는 현실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몽상의 보답으로 성공을 거두거나 세상을 바꾸는 데에 성공한 것은 기껏해야 실리콘 밸리의 몇몇 영웅들에게나 허락된 일이다. 대신, 몽상가 대부분은 '이곳 너머'를 꿈꾸다 '지금 여기'에서 파산하거나, 커리어를 망치거나, 이별을 겪거나, 자살한다. 그들은 '이곳 너머'와 '지금 여기' 사이에서 짓눌려 죽게 될 운명인 것이다. 이것이 몽상의 대가이다.


이것은 내 운명, 별을 좇는 일 / 그것이 희망 없는 일이라도, 아무리 멀리 떨어진 일이라도 상관없이 / 천상을 위해 지옥으로 행진하라 (This is my quest, to follow that star / No matter how hopeless, no matter how far / To fight for the right without question or cause / To be willing to march into hell for a heavenly cause)


이처럼 뮤지컬 <맨 오브 라 만차>는 꿈을 좇는 일의 필요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그 대가 또한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듯, <맨 오브 라 만차> 또한 '이곳 너머'와 '지금 여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하지만 <맨 오브 라 만차>의 대표곡 <The impossible dream>에서 드러나듯,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는 "저 별을 쫓는 것은 내 임무다(This is my quest)"라며, "그것이 얼마나 희망 없는 일인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인지 상관하지 않는다(No matter how hopeless, no matter how far". 이 지점에서 그들은 몽상의 순교자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결코 몽상의 대가를 알지 못하고 불가능한 꿈을 꾸는 바보들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분명히 몽상의 대가를 알고 있지만,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돈 키호테와 세르반테스와 같은 몽상가들은 값비싼 몽상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삶이 불가능한 꿈을 꾸다 맞이 한 죽음보다 그들에게 잔인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세계는 이름 없는 몽상가들에게 빚지고 있다. 오늘의 현실은 어제의 몽상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로 오늘의 몽상가들에게 빚을 져야 할 것이다.



[1] 물론 이 것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돈 키호테와의 여행을 통해 산초는 성장을 이루고, 둘시네아(알돈자)는 희망을 찾는다.

[2]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생역전을 이룬 수잔 보일이 부르는 <The impossible dream>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는 일과 사는 일, 그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