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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Sep 03. 2017

자아의 결

함미나 작가의 <나이테>와 자아에 대하여

가장 익숙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장 낯선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일 것이다. 어느 날은 나를 완전히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어느 날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덮쳐와 나를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현재의 나를 만들어온 과거의 기억도 완전하지 않으며, 때로는 기억과 진실이 다를 때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안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없고, 어떤 기억은 나를 상처 입힐지도 모르며, 어떤 기억은 나를 기만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를 지각의 껍데기에서 피상적으로 알고만 지낸다는 것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곳에서 안주하는 것과 같다. 그런 곳에서 나는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닌 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외부에서 비롯된 감정에 더욱 쉽게 휩쓸리고, 나 아닌 다른 이를 더 자주 상처 입히고, 자아의 우물은 더 쉽게 마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윤리적인 일이기도 하다. 함미나 작가의 회화 작품 <나이테>는 자아의 결을 찾는 일에 대한 작품이다.


지나온 시간의 궤적

하우스 아트페어 2017에 전시된 함미나 작가의 <나이테> (좌측 하단) [1]

함미나 작가의 작품 <나이테>는 내가 구입하여 소장하게 된 작품 컬렉션 중 세 번째 작품이다. 무척 맑고 약간은 더웠던 주말 오후, 나는 우연히 연남동에서 열린 하우스 아트페어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만난 <나이테>는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실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표현보다는 (점을 뜻하는 '푼크툼'이라는 말처럼) 그것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왜 그런지 작품을 본 그 순간에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작품을 본 순간 마음이 서늘해지며 무언가를 느끼게 되는 작품이 있다. 그런 작품을 만날 때, 나는 그 작품을 내 방에 가져다 놓고 싶다고 느낀다. 작품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작품, 그리고 그 상처가 나를 더 멀리 나아가게끔 하는 작품, 이런 작품들이 소박한 아트 컬렉터로서 작품 구입 기준이 된다. 물론 이런 작품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함미나 작가의 <나이테>는 정말 오랜만에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나이테>는 한 남자의 초상이다. 흐릿하게 흐려진 화면에서 남자의 이목구비나 표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화면이 흐려져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남자의 본질에 가 닿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남자의 형태는 작품의 제목과 같이 나무를 닮았다. 잎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선택된 녹색 배경, 마치 창 밖의 나무처럼 남자가 창 밖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흰색 틀, 그리고 굳건한 나무를 연상시키는 남자의 몸. 나무를 닮은 그 남자의 몸에서는 나무의 거친 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아마도 그 결에는 그 남자의 전부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무의 나이테에는 나무가 지나온 세월이 기록되어 있다.

나무는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자신의 몸에 새긴다. 겨울이 추웠는지 따뜻했는지, 그 해에 비가 많이 내렸는지 아니면 가물었는지, 그 나무가 어렸는지 나이 들었는지, 그 모든 시간의 궤적이 나무의 나이테에 기록되어 있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어쩌면 우리 내면에도 여러 가지 자아의 결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을 만든 것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옛 생각들이다. 자아의 결, <나이테>의 남자의 몸에 새겨진 그 결은 각자의 방식으로 암호화된 자신의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결을 보고 아는 일은 그 남자 자신에게도 쉬운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 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가늘고 긴 드릴로 나무의 허리 깊은 곳까지 뚫어내는 표본을 채취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결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고서는 결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또는 나 자신의 결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런 고통, 일종의 순교를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를 찾는 모험

프루스트는 마들렌과 홍차로부터 잃어버린 시간을 떠올린다.

함미나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가 떠올랐다. 그 작품에 나오는 그림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나 "멘시키의 초상"에 대한 묘사가 바로, 함미나 작가의 작품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에서 묘사하는 그 그림들의 분위기와 함미나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느껴지는 분위기는 무척 다르지만, 의도적으로 뭉개지고 흐려진 형태나 거친 페인팅 같은 기법,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의 본질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과 같은 것은 두 그림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하 세계로의 모험이나, 마르셀 프루스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잃어버린 시간", 파르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의 기차 여행과 같은 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찾는 과정일 것이다 [2]. 그런 모험들은 결코 쉬운 여행이 아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를 확인하기 위해 나무의 허리를 뚫어내는 일처럼, 그런 모험은 항상 대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모험을 마치고 났을 때, 그 주인공들은, 그리고 우리는 자아의 결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소설과는 달리, 우리에게 그 모험은 일생에 단 한 번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아는 유동적이고, 나무의 나이테는 매년 쌓일 것이다. 자아의 결의 모습이 변할 때마다 우리는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 그 모습을 들여다봐야 한다. 산다는 것은 자체로 어려운 일이지만, '나'를 제대로 알고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아의 결을 아는 일

자아의 결을 나무테와 나란히 놓는 일은 탁월한 비유다. 함미나 작가의 <나이테>가 아름다운 작품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3]. 나쁜 비유는 대상을 비유되는 것의 범속함으로 처박고, 보통의 비유는 대상을 비유되는 것까지만 이끌 수 있다면, 탁월한 비유는 우리를 쓰인 것, 그려진 것 이상으로 데려갈 수 있다. <나이테>가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아마도 아주 깊고 넓은 곳일 것이다. 


고대 중동과 서양 문화에서 "안다"라는 말은 무언가를 지각한다는 것을 넘어 앎의 대상을 취하여 하나가 된다는 의미까지 가졌다고 한다 [4]. 그런 의미에서라면, 자아의 결을 안다는 것은 내 안의 낯선 무언가까지 내 것으로 포용하는 일일 것이다. <나이테>의 비유가 데려가는 깊고 넓은 곳은 결국 더 깊고, 더 넓은 나의 자아일 것이다. 


내 안에는 수많은 자아의 결이 있고, 그 결은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의 좋은 부분들을 담은 결은 물론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들은 죄와 어둠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자아의 결을 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결만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모든 부분들까지 아는 일일 것이다. 포스트닥터로서의 지금은 분명 내 안 어딘가에 어떤 결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가문 해에 나무는 잘 자라지 못하므로, 그 해의 나이테는 촘촘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만약 지금이 내 삶의 가뭄이라면, 내 안 어딘가에도 촘촘한 결이 생기지 않았을까. 아마 나는 <나이테>를 나의 초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작품에 몰입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이 그림과 함께 나이 먹으며 그 세월들이 내게 만든 자아의 결을 쳐다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깊고 넓기를.



[1] 글 메인 이미지는 하우스 아트페어를 주최한 ArtTrip의 인스타그램 계정(@arttrip.space)에서 가져왔고, <나이테> 작품 이미지는 함미나 작가 인스타그램 계정(@painter.hmn)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2] 어쩌면 <반지의 제왕>이나 <오딧세이아>와 같은 신화적 서사시의 모험 또한, 진정한 나를 찾는 내적인 모험이 외적인 모험을 통해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서사시의 인물들은 모험을 통해 나를 완성한다.

[3] 이때의 "아름답다"는 고전적인 미(美)의 개념이라기보다 현대에 확장된 미의 개념을 일컫는 말이다.

[4] 그렇기에 고대에 "안다"라는 표현은 성관계를 의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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