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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Sep 10. 2017

길 잃은 비행기가 향하는 곳

영화 <중경삼림>과 영원에 대하여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흐르는 시간 앞에 음식은 부패하고, 청춘은 덧없이 지고, 사랑은 빛을 바라고, 인간은 죽는다. 우리는 필멸의 세상 속에서 필멸의 삶을 살기 때문에 영원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역사에 영원히 남을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고, 학자는 영원불멸의 법칙을 찾고 그것에 자신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며, 기업인은 세세대대로 흔들리지 않을 기업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는다는 자연의 법칙뿐, 모든 것은 사라진다 [1].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이 낳은 것들이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그 유한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면 어딘가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중경삼림> 중, 1994년 5월 1일까지 유통기한의 통조림들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그 연인들이 평생 같이 살 운명이던, 그렇지 않던, 모든 연인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하지만 모든 연인들의 맹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랑은 그들의 생이 다할 때까지 영원한 반면(드문 경우일 것이다), 어떤 사랑은 3년, 어떤 사랑은 3개월, 이런 식으로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경삼림>의 주인공들은 유통기한이 지난 사랑에 슬퍼하는 남자다. 1부의 주인공인 경찰 233(금성무)은 만우절에 이별을 선고받고,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 기다려보자며 그때까지가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은다. 2부의 주인공인 경찰 633(양조위)은 승무원이었던 여자 친구와의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집에 있는 낡은 물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수건은 찢어져서 걸레나 다름없고, 비누는 거의 다 써서 납작한데, 그것들도 분명 유통기한이 지난 물건들이다. (물건과 이야기하는 양조위의 지질한 연기는 일품인데, <중경삼림>을 과대평가된 영화라며 좋아하지 않는 박찬욱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타월이나 비누 붙들고 말 거는 장면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중경삼림>의 주인공들은 버려버린 편지를 찾기 위해 비 오는 밤에 쓰레기통을 뒤지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유통기한이 지나 상해버린 사랑을 쉽게 놓아주지 못 하지만, 이별의 고통을 견딜 수 없기에 놓아주지 못한 사랑을 파인애플 통조림이나 수건이나 비누와 같은 낡은 물건들에 옮겨 놓는다. 1부의 경찰 233이나 2부의 경찰 633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그 낡은 물건들이 사라지거나 버려질 때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경찰 233은 유통기한이 지나는 5월 1일에 밤새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먹어버리며, 경찰 633의 경우 자의는 아니지만 새 연인인 페이가 몰래 들어와 낡은 물건들을 버리거나 정리해버린다. 버려진 남자는 그 스스로의 아픔을 견딜 수 없기에 낡은 사랑을 낡은 물건에 전이시키고, 그 물건이 폐기될 때 물건에 깃든 사랑 또한 사라진다.


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2]

낡은 물건에 깃든 옛사랑이라는 영화의 테마를 해석할 때, 그 비유가 '낡은' 물건과 '옛' 사랑을 견주는 것인지, 아니면 낡은 '물건'과 옛 '사랑'을 견주는 것인지에 따라서 결론은 정반대로 향할 수 있다. '낡은'과 '옛'에 강조를 둔다면 낡은 물건을 버림으로써 새 사랑을 만나는 그들의 태도는 진정한 인연과 함께 하는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는 진취적인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물건'과 '사랑'에 강조를 둔다면 사랑 또한 물건처럼 반드시 유통기한이 존재한다는 우울한 결론에 도달한다. 때문에 <중경삼림>은 사랑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일 수 있으며, 동시에 모두를 불만족시키는 영화일 수 있다.


길 잃은 비행기가 향하는 곳

길 잃은 비행기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연료를 가득 실은 비행기는 영원히 비행할 것 같았지만 연료는 언젠가 바닥난다. 경찰 633이 새로 시작하는 연애 또한 언젠가 그 수명을 다 할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 <중경삼림>은 영원한 사랑, 진정한 사랑에 대한 낙관주의와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메멘토 모리'식 비관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 같아 보인다.(1부가 2부에 비해 더 비관적이다.)


<중경삼림> 중 경찰 633(양조위)과 페이(왕페이)

물론 <중경삼림>의 주인공들만 놓고 보면, 그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옛사랑이 그들을 떠날 때, 새로운 사랑이 그들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주인공들이 20대 초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옛사랑을 잃는 일은 그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은 충분히 옛사랑을 새 사랑으로 치환할 수 있다. 반면, 왕가위 감독의 5년 뒤 영화 <화양연화>는 조금 더 회의적이다 [3]. 중년의 연인들은 시한부 사랑을 하고 강제로 이별당한 뒤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여생을 보낸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옛사랑이 타고 남은 회색 잿더미일 뿐, 새로운 불꽃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런 차이점은 <화양연화>의 주인공들의 나이가 <중경삼림>의 주인공들의 나이와 달라서일까? 아니면 왕가위 감독이 사랑의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5년 사이 비관주의로 기울어서일까? <중경삼림>이 사랑의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모두를 담고 있듯, 왕가위 감독의 생각에 대한 두 대답은 모두 정답일 수도, 둘 모두 오답일 수도, 둘 모두 정답의 파편들을 가진 부분 정답일 수도 있다. 물론 진실은 감독만이 알며, 그것은 영원히 '말해지지 않은 영역'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난제가 우리에게 남는다.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는 것일까?" <중경삼림>은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는다. 그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을 모호한 방법으로 던질 뿐이다. 사랑은 유한할 수도, 무한할 수도 있다. 그것뿐이다. 어쩌면 그 문제는 풀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수학에는 본질적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제에도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아마도 사랑의 유통기한의 존재 증명은 절대적 불가능에 속하는 문제일 것이다.


<중경삼림> 중, 1년이 지난 뒤 승무원이 되어 돌아온 페이

길 잃은 비행기가 향하는 곳이 어디일지는, 끝까지 가봐야 한다. 아마도 사랑도 그럴 것이다. 끊임없이 고민하며, 끊임없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자. 내 발자국에 후회를 남기지 않고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사랑이 유한한 지 무한한 지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 것이다. 가자, 캘리포니아로, 그리고 홍콩으로.



[1] 예를 들어, 뉴턴 법칙이나 맥스웰 방정식과 같은 물리 법칙은 우주의 어디서나, 그리고 우주의 언제나 영원하겠지만, 그 법칙에 붙은 '뉴턴'이나 '맥스웰'과 같은 인물의 이름은 인류의 문명이 사라지면 잊힐 것이다.

[2] 사진출처: wikipedia

[3] <중경삼림>은 1995년, <화양연화>는 2000년에 개봉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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