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서 살아남기 그리고 행복하기
누군가가 말하길 학계에서의 삶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한국에서 대학원에 들어갈 무렵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학위를 마치고 포닥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학계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의 성취에 뛸듯이 기뻐하다가도 다음날이면 그 성취가 별 것 아니었다는 사실에 절망하길 반복한다.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는 롤러코스터처럼.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포닥으로 몇 년, 그러니까 한 7년 정도를 학계에 있다 보니 이런 아카데믹 롤러코스터(academic roller coaster)에 지쳐서 학계를 떠나는 사람들을 꽤나 많이 보게 되었다. 그것은 학문에 대한 재능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얼마나 똑똑하든, 얼마나 성실하든, 학계에 남는 것은 롤러코스터 타기에 적응하냐 할 수 없냐의 문제인 것이다.
상아탑 롤러코스터는 특히 아직 어딘가에 자리 잡지 못한 포닥과 테뉴어를 따지 못 한 젊은 교수들에게 가혹하다. 사실 오늘의 성취가 별 것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도, 천천히 그러나 우직하게 밭을 가는 소처럼 일을 한다면 결국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결과물이 크냐, 작냐에 대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지만 젊은 학자들은 우직하게 무언가를 할 시간적 여유를 허락받지 못 한다. 포닥의 경우 1~3년, 조교수의 경우도 (학교마다 다르지만) 수년 이내로 무엇인가를 이루어서 입증하기를 요구받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직장을 옮기거나, 몇 개월간 직장을 찾지 못 하며 학계 주변에서 표류하거나, 최악의 경우 학계를 떠나야만 할 수도 있다. (위의 코믹스를 보라! 한 쪽 문은 안정적인 정교수로, 한 쪽 문은 맥도날드 알바로.)
그렇기 때문에 젊은 학자들에게 상아탑 롤러코스터는 '타임 어택' 롤러코스터라는 아주 특이한 장르의 놀이기구로 변한다. 아주 빨리 떨어지고, 아주 빨리 올라가고, 절대 좌절하여 주저 앉지 말 것. 시간 안에 도달하지 못 하면 레일이 사라져 버리는 아주 위험한 놀이기구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롤러코스터의 추락 하나 하나에 좌절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나의 경우, 한 2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당장 갈 곳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2년 뒤에도 자리를 잡지 못 한다면 내가 계획했던 (혹은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또 다시 미뤄져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 내가 살게 될 곳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만약 2년 안에 자리를 잡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미국의 다른 곳으로 갈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유럽이나 호주가 다음 행선지가 될 가능성 또한 있다. 누군가는 내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것도 좋은 경험이 아니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장기적인 생활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은 이 생활의 가장 안 좋은 점이다.
정말 힘들 때에는 랩탑을 키거나, 심지어 노트에 수식을 적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있다. 분명 나는 물리를 사랑해서 물리학자가 된 것인데, 어쩌다 물리를 쳐다보기조차 싫은 순간을 맞이 하게 된 것일까. 사실 이것은 나만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인 과학자의 문제도 아니다. 젊은 과학자라면 전세계의 어느 누구나 겪는 문제일 것이다. 예전에 운 좋게도 한국 대표로 린다우 노벨상 수상자 회의(Lindau Nobel Laureate Meeting)에 참가해서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과 의견을 나누고 그들에게 조언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어떤 미국인이 한 노벨상 수상자에게 물었다. "왜 캠퍼스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요?" 나는 그 질문을 한 젊은 미국 학자와 정곡을 찔린 것 같은, 그러나 씁슬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그 노벨상 수상자의 얼굴을 잊지 못 한다.
내 주변의 많은 젊은 물리학자들은 '살아남기'와 '행복하기'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받는다.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살아남기와 행복하기는 '또는'의 문제이다. 살아남으려면 행복을 포기하거나, 행복을 선택하면 학자로서 살아남기 어렵거나. 우리의 삶이 살아남기 '그리고' 행복하기가 될 수 있을까? 진지하게 학계의 삶을 선택한 이후로 그것은 내게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것은 내게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남아 있다.
나는 늘 왜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힘들어 하는지 궁금했다. 어두운 밤이 되고서 적막 속에 한참을 생각하고 나니, 나는 물리가 힘든 것이 아니었다. 물리 자체는 즐거웠다. 내가 어제까지 몰랐던 사실은 인류의 어느 누구도 몰랐고, 내가 오늘 새로 알게 될 사실은 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알지 못 한다는 기분은 과학자가 아닌 이상 알기 힘든 희열이다. (물론 과학자 두 명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학문적 기쁨 사이에 사회-경제적 문제가 끼어들면 상황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는 것은 학자에게 분명한 기쁨이다. 학자들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는 새로운 도전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에 답을 하는 시간에 제한이 걸리고, 그 제한을 지키지 못 할 경우 경제적 페널티가 주어진다면 그때부터 학자의 즐거움은 사라진다. 그러니까, 내가 물리를 하면서 힘든 것은 나와 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와 세상의 문제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물리를 하며 힘들 때마다 이런 것을 다시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가라앉는다. 그렇게 나는 세상으로부터 물리를 보호해야 물리를 계속해서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물리학자로서 있을 수 있는 세계와 물리학자가 아닌 나의 세계, 그 두 세계를 나누는 것이 물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일까? 그 방법이 "살아남기 그리고 행복하기"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방법만이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